94화
오스칼은 응접실에 마주 앉은 레오를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엉엉 울며 레오에게 고백한 일을 떠올리자 귓바퀴가 얼얼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그리고 첫 키스라니!
속으로 악- 소리를 지른 오스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동안…. 내가 널 속인 거에 화… 안 났어?”
“전에 네가 말했었지. 어느 날 네가 다른 사람이 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오스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남자든 여자든, 내겐 그저 너일 뿐이다. 그동안 네가 내게 보여준 모습이 진심이었단 것쯤은 구분할 수 있어.”
“그래도 지금껏 네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고 수줍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레오의 귓가도 살짝 붉어졌다. 그가 오스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널 향한 내 마음만으로도 벅차서 네게 화를 낼 여유 같은 건 없거든.”
오스칼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레오는 지금껏 알던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해댔다.
오스칼은 도저히 레오와 시선을 맞출 자신이 없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계약서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중요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발사자르의 피로 계약서를 확인했거든…. 이제 이걸 왕궁에 제출해서 칼릭스가의 복권을 위한 재판을 하면….”
레오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도록도록 눈알을 굴리며 어물어물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눈은 오스칼의 솜털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오스칼을 향했다.
“오스칼.”
오스칼의 이야기가 끝나자, 레오는 부드럽게 오스칼의 이름을 불렀다.
“으…응?”
“지금 키스해도 되나.”
“콜록콜록. 뭐, 뭐라고?”
레오의 노골적인 질문에 목이 멘 오스칼이 기침을 내뱉었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그러니 너와 닿고 있어야 실감이 날 것 같아서.”
그가 눈썹을 늘어뜨리고는 순진한 눈매를 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매가 품고 있는 검은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올라 번들거렸다. 오스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식 이거…. 진짜 그 이유 맞아?
“누, 누가 키스를 물어보고 해?”
오스칼이 말을 더듬으며 허둥거렸다.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그럼 묻지 않고 언제든지 해도 되나?”
“차, 창피하니까 그런 말 좀 하지 마. 나, 나는 처음이었다고.”
“크흠. 나, 나도 아마….”
레오가 약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열로 정신을 잃은 오스칼의 입술과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일을 ‘생존의 기술’로 분류한다면, 어쨌든, 그에게도 첫 키스였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레오가 약간의 가책을 받고 있을 무렵, 오스칼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기사단에도… 사실을 알려야겠지?”
레오가 미간을 좁혔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가 대답했다.
“기사단에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까진 밝히지 않는 게 좋겠군.”
“왜…?”
“네가 여자인 걸 알면 마티스 녀석이 분명히 네 거처를 따로 만들어 주겠다고 할 텐데. 이제 난 너 없인 하루도 못 살겠거든.”
“윽.”
레오는 거침이 없었다. 그간 그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한을 풀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오스칼은 화끈 달아오른 뺨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정말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괜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사단에 혼란을 불러오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오스칼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로즈에겐 사실대로 말할 거야.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아.”
그 부분은 타협할 수 없다는 듯, 오스칼이 딱 잘라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로즈도… 이해해주겠지? 로즈에게 미움받는 건 상상도 하기 싫어.”
울상을 짓는 오스칼의 얼굴에 레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내겐 툭하면 널 싫어해도 된다더니! 왠지 로잘린 영애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라 불쾌해.”
“뭐? 이기고 지는 게 어딨….”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오스칼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한 손으로 오스칼의 턱을 살며시 올려잡은 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오스칼의 입술에 밀착해 파고들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입술을 떼어낸 그가 오스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실감이 나네.”
그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창피한 듯 얼굴을 붉힌 오스칼은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섞인 불평을 터뜨렸다.
“꼬, 꼭 닿고 있어야지만 실감이 난다는 말, 진짜 맞아?”
“그래, 그러니까 내 곁을 떠날 생각 하지 마.”
웃음기 어린 대꾸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다시 오스칼의 입으로 흘러들었다.
***
다음날, 로잘린은 아침부터 오스칼을 찾아왔다. 로잘린은 제라드의 후원회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하게 늘어놓으며 기쁜 듯 재잘거렸다.
“후원금도 틀림없이 받았고, 마티스 경이 도와준 덕분에 뒷마무리도 잘했어요! 부인도 만족하셨으니 다음 후원회도 문제없을 거예요.”
“로즈,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고마워요.”
“뭘요! 부인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기로 했어요. 통하는 부분이 많아서 좋은 언니가 생긴 것 같답니다!”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오스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토록 제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로잘린을 더는 기만할 수 없었다. 이제 로잘린에게 진실을 고백할 시간이었다. 오스칼이 긴장감에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로즈, 그리고…. 음, 사실 로즈에게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로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오스칼은 그녀가 설명할 수 있는 범위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실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로잘린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졌다가, 또 놀랐다가, 시시각각 변했다.
“로즈를 속이게 돼서…. 정말 미안해요. 로즈에게 상처를 줄 마음은 없었어요. 저도 제가 정말 한심….”
로잘린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침묵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울상을 지었다. 만사를 제치고 뤼미에르 기사단까지 달려와 도움을 준 로잘린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괴로웠다.
덥석-
로잘린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스칼의 두 손을 와락 붙들었다. 오스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말없이 오스칼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로잘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세상에! 어쩐지 오스칼은 다른 남자들과 다르다 했어요.”
“네?”
오스칼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로잘린을 응시했다. 로잘린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어쩜 오스칼은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어요? 여자인데 기사단에서 최고 실력자가 될 정도로 검술까지 뛰어나단 말이에요? 세상에, 나 또 반할 것 같아.”
“예?”
“난 오스칼이 여자라도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좋아.”
“어…. 음…. 고, 고마워요.”
오스칼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로잘린의 최애작이 남색 소설이라고 할 때부터 느꼈지만, 역시 편견이라고는 없는 아가씨였다.
“오스칼은 늘 제게 대단하다고 말해줬지만, 사실은 오스칼이 훨씬 대단해요! 정체를 숨기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힘든 기사단의 임무를 모두 잘 해냈잖아요!”
로잘린의 다정한 말에 오스칼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죠. 제게 오스칼의 비밀을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그래도 전 여전히 오스칼이 좋아요.”
로잘린이 그녀의 굽이치는 백금발 머리칼을 수줍게 귀 뒤로 쓸어넘겼다.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고 우물쭈물, 로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로즈. 그런데 저는 사실….”
“역시, 오스칼은 그 양철 병정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거죠?”
로잘린이 심통 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샐쭉한 표정으로 가슴 앞에 팔짱을 두른 채 콧방귀를 뀐 로잘린이 볼을 부풀렸다.
“야, 양철 병정이요?”
“그 투구 닦는 남자요! 아이 분해. 그 남자한테는 정말이지 지고 싶지 않았는데.”
“어…. 그, 그건 어떻게….”
오스칼이 뒷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노이어에서부터 그 작자가 오스칼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레오날드 경이 남색가라고 생각했죠.”
“레…레오폴드….”
억울한 듯 열을 내는 로잘린을 향해, 오스칼이 소심하게 레오의 이름을 정정해주었다.
“제가 오스칼과 친하다는 사실을 어찌나 견제하던지! 하지만 오스칼도 그 목석같은 남자보단 저와 마음이 더 잘 맞았다고 생각하죠?”
“예? 어…. 예…. 물론….”
확실히 로즈가 마음이 잘 맞는 여자 친구 같긴 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기사단에 온 뒤에, 오스칼을 지켜보면서 알게 됐어요. 오스칼이 그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휴우…. 너무 다정하더라고요. 사랑이 담긴, 그런 눈이었어요.”
“아….”
내가 그런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던가. 그에 대한 마음을 도통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야트막한 탄식을 했다.
“오스칼은 정말 그 남자에게 과분한 사람이라고요! 다시 생각해봐요, 대체 그 삐걱거리는 남자가 어디가 좋은지!”
로잘린이 부러움이 섞인 가느다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오스칼이 머쓱한 듯 웃었다.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던 로잘린도 오스칼의 너털웃음에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레오폴드 경이 훌륭하다는 건 저도 알아요. 샘이 나지만 어쩌겠어요. 그와 함께해서 오스칼이 행복하다면 저도 기쁠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로잘린이 오스칼을 향해 생긋 웃고는 와락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로잘린의 품에 안긴 오스칼의 마음에 몽글몽글 따뜻한 것들이 피어올랐다.
“언제나 행복하길 바랄게요.”
“로즈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멋지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에요.”
오스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제야 그녀를 품에서 놓아준 로잘린이 눈에 힘을 주어 또렷하게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오스칼을 슬프게 하면 언제든지 노이어로 와요. 나랑 같이 덕질! 그거 하면서 평생 즐겁게 살아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테니까!”
알려준 표현을 잘도 사용하는 로잘린에 오스칼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로잘린도 깔깔거렸다. 오스칼이 로즈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난 이미 로즈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요.”
“저도요!”
마주 본 두 사람이 활짝 웃었다.
***
아르투아 대공저 별채, 호화로운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젠장.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인간이 바뀐 게 분명해.”
얼굴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 있던 발사자르가 또 한 번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성난 목소리로 씩씩거렸다.
그가 이렇게 몸서리치며 일어난 것이 벌써 다섯 번째였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애꿎은 침대의 시트를 구겼다.
감히 ‘세레나’ 따위가 제 얼굴에 주먹을 갈기고 도망쳐 버리다니!
“에이 쪽팔려. 이래선 어디 가서 말도 못 하잖아.”
그가 다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무도회에서 다른 귀족의 파트너에게 추근거리다 얻어맞고 기절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평생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찰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침대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그는 당장 에르네스트 대공의 동행인으로 등록된 자의 신분을 확인했다. 하지만 동행인의 신분은 잘 위조된 가짜였다.
처음엔 대공이 그를 해치기 위해 세레나를 한패로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레나는 기절한 그에게 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차라리 세레나의 정체를 몰랐던 대공이, 세레나를 곁에 두려고 가짜 신분을 줬을 가능성이 컸다. 발사자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봤자, 그 자식도 어제 세레나에게 차인 것 같던데.”
사용인의 말에 의하면, 대공은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 파트너 없이 혼자 돌아갔다고 했다. 그를 때려눕힌 세레나는 당황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도망친 게 틀림없다.
‘그럼, 걔가 얼마나 날 좋아했는데. 순진한 애니까 내 손길에 놀라 순간적으로 실수를 하고 날 때렸다는 충격에 도망간 거겠지. 귀엽긴.’
축축해진 얼음주머니를 코에서 들어 올린 발사자르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찾아내고 말겠어.”
발사자르가 입맛을 다셨다. 어딘가 달라진 세레나의 모습은 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달칵-
“해가 중천인데 누워만 있는 게냐.”
문을 열고 들어온 아르투아 대공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침대에 드러누운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요 뭐.”
“쯧. 얼굴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자다가 침대에 얼굴을 부딪쳤어요.”
사실대로 말해봤자 꾸중만 들을 것 같아 발사자르가 말을 둘러댔다.
“어젯밤 네 녀석이 신나게 노는 동안, 잔느가 왔었다.”
“어머니가요? 오셨으면 제게 기별이라도 하시지! 지금은 어디 계세요?”
발사자르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자,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아르투아는 그 맹한 얼굴에 츳, 하고 혀를 찼다.
“한가하게 네 녀석이랑 잡담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 내게 계획을 알리고 곧장 떠났다. 네 어미가 우리의 계획을 실행할 완벽한 방법을 찾았거든.”
아르투아의 눈에서 욕망에 찬 환희가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