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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93)화 (93/138)

93화



 

캄캄하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로 붉은 해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레오가 터벅터벅,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잠들어 있는 오스칼의 모습이 보였다.

스르륵-

그가 문을 밀자, 새로 단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어쩐지 그도 모르게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스칼이 고열로 쓰러졌던 날, 내가 이 문을 부쉈었지.’

오스칼 앞에선 늘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었다.

그때는 오스칼이 남자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설령, 인간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오스칼은 어둠뿐인 그의 삶에 빛 같은 존재였으니까.

“내게, 너는 항상 너였지.”

레오가 잠든 오스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지친 듯 잠들어 있는 오스칼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오스칼을 봤을 땐, 눈물에 젖은 채로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네가 아는 사람이 아니게 되더라도…. 내게 실망하지 마.”

“혹시 네가 내게 실망하게 되더라도. 그냥 한 번만. 한 번만 이해해 줘.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줘.”

수확제에서 오스칼이 그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스칼은 울고 있었다. 혼자 비밀을 간직한 채,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동안 오스칼이 제게 보여준 따뜻한 말과 행동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오스칼이 진실을 숨긴 데는 분명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숨겼든, 왜 숨겼든, 그는 오스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파리한 낯빛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오스칼의 얼굴 위로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그 빛에 레오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오스칼이 깨어나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실망하지 않았다고, 다 이해하겠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해야겠다.

레오는 오스칼이 깨지 않도록 조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

분명 그랬었는데.

“지금 뭘 하는 거지?”

레오는 오스칼의 방에 물을 가져다 두려고 들어온 참이었다. 그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 주전자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오스칼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에 화가 넘실거렸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레오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오스칼은 그대로 굳은 자세로 눈동자를 떨며 레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었어.”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낮고 고요한 목소리. 그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오스칼이 주춤 뒷걸음을 쳤지만, 등 뒤의 서랍장에 탁- 막히고 말았다.

오스칼의 코앞까지 다가선 레오가 그녀의 등 뒤, 서랍장 위에 올려진 짐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이러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칼의 짐가방을 본 순간 이성이 끊어지고 말았다.

“하!”

그가 짧게 실소했다. 그 차가운 숨에 오스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되었다.

“그게 네 선택인 건가? 결국, 네 입에서 나온 건 온통 거짓말뿐이었군.”

레오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믿음을 져버린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오스칼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오스칼이 해명하듯 입을 열었다.

“레오…. 미안해, 사실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여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오를 올려다보는 녹색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여길 떠나지 않겠다고 네 입으로 약속한 게 불과 이틀 전인데, 넌 결국 또 이대로 도망치려던 건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군데군데 격양된 감정이 묻어있었다. 오스칼이 바짝 말라버린 입안을 달래듯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다 설명할게. 어젠…. 처음에 내가 널 돕겠다고 약속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어.”

오스칼이 하얗게 질린 손을 들어 책상 위를 가리켰다. 붉은 글씨가 빼곡히 쓰인 계약서.

오스칼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레오의 표정이 싸늘했다.

“하! 그래, 저 계약서. 네 목적은 처음부터 저거였었지. 왜지? 내 아버지의 누명을 네가 벗겨야 할 이유가 있었나? 네가 내 어머니 친구의 아들…. 아니, 이제 아니지. 딸이라서? 아. 그건 사실이 맞는 건가? 고향 친구를 만난다는 네 말도 모두 거짓이었잖아.”

레오는 중간중간 진정하려는 듯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를 만나러 간다던 오스칼이 에렌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또 한 번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오스칼이 어딘가에 가로막힌 듯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 변명하지 않을게.”

오스칼의 사과에 레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참 간단하네. 갑자기 어느 날 나타나서 날 송두리째 흔들고는, 고작 네가 한다는 말은 미안하다, 할 일은 끝냈으니 이제 떠나겠다?”

“미안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그것뿐이었다. 결국, 오스칼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레오의 눈빛이 거칠게 일렁였다.

“내가 어떤 기분으로 밤새 널 기다렸는데! 난 네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밤새 고민했는데. 넌 겨우 그 말만 남겨 둔 채 날 떠나버리려고 했던 건가?”

“아니야, 떠나려던 게…. 아니,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네게 사정을 설명하려 했어.”

“어떤 사정? 네가 남자가 아니었다는 거?”

차마 그의 상처받은 표정을 볼 수 없어 오스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네게 이렇게 알리고 싶진 않았어. 몇 번이나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거짓말쟁이인 나를 경멸해도 돼.”

레오의 잇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넌 늘 이런 식이군. ‘날 싫어해도 돼, 경멸해도 돼. 내가 떠날게.’ 마치 정말 내가 그래 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난 대체 네게 뭐였나?”

“그건…. 내가…….”

오스칼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핏기없는 입술을 꽉 씹어보았지만, 제 뜻대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목소리가 울음에 잠겨 뚝뚝 끊겼다.

이제, 발치까지 다가온 레오가 오스칼의 어깨를 붙들었다. 오스칼의 어깨가 처연하게 떨렸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의 앞에 절박한 표정의 레오가 있었다.

“네가 내게 보여준 모든 게… 전부 가짜는 아니잖아.”

그가 오스칼의 어깨를 붙든 채 고개를 숙이고 무너졌다. 흘러내린 그의 검은 머리카락 끝이 오스칼의 어깨에 닿았다. 오스칼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자네보다 내가 먼저였어. 그녀를 먼저 만난 건 나야.”

“글쎄. 오스칼은 자네에게 진실을 알리길 원하지 않았어.”

레오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먼저였다고,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던 에렌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넌… 대공에게 갈 건가?”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오스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잖아. 내게는 말하지 못한 것들도, 그에겐… 했잖아.”

낮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오스칼의 귓가에 울렸다.

“왜?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날 믿을 수 없어서? 아니면 네가… 그자를….”

오스칼의 어깨를 쥔 레오의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는 차마 마지막 말을 입밖에 내뱉을 수가 없어 목 뒤로 넘겨버렸다.

“그게 아니야…. 네 탓이 아니라….”

이게 아닌데. 밀려드는 자괴감으로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켰다. 레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넘쳐 흐른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책하며 무너지는 그의 모습에 서러운 울음이 자꾸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오스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어.”

더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본심이 울먹임과 함께 불쑥 나왔다.

오스칼의 어깨에 기댄 채 떨구어졌던 레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

오스칼이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애달프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번 넘쳐 흘러 튀어나와 버린 감정은 제어할 수 없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계속 네 옆에 있고 싶어서 그랬어. 진실을 말하고 나면 더는 기사단에 남을 수 없을까 봐. 네가 거짓말쟁이인 내게 실망할까 봐. 그게 무서웠어. 네게 미움받는 게 두려워서, 말을 못 했어.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

오스칼의 마지막 말은 레오의 입술에 묻혀 그대로 삼켜지고 말았다.

***

“내가…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어.”

그 문장은 마치 주문처럼 레오를 움직였다. 몇 번이나 꾹꾹 눌러 담아 단단하게 자물쇠를 채웠던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오스칼의 마음을 확인하자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갈급하게 오스칼을 원했다.

눈물 어린 고백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레오는 오스칼의 뺨을 양손으로 감아쥔 채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갰다.

눈물에 젖은 오스칼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밀려들어 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동그랗게 뜬 오스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를 받아들이자 뺨에서 흘러내린 눈물과, 터진 입술의 핏물이 입안에서 뒤섞였다.

첫 키스는 짭짤하고, 씁쓸하고, 또 달콤했다.

레오가 오스칼의 입술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여전히 그의 손은 오스칼의 뺨을 놓지 않은 채였다.

뜨거운 그의 손길 때문이었을까, 창백했던 오스칼의 두 뺨이 어느새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신없이 서로를 향했다.

“널 사랑해. 네가 먼저 말하게 해서 미안해.”

레오의 아찔한 고백이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달콤해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나는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랑해. 언제나 그랬어.”

오스칼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레오의 눈빛과 속삭임에 숨이 막혔다. 오스칼이 달뜬 숨을 뱉었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 레오의 몸을 붙들었다. 몸에 닿는 오스칼의 손길에 레오의 몸이 뜨거워졌다.

그의 눈빛이 짙어지고,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이 오스칼의 입술을 삼켰다. 그를 붙잡은 오스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닿게 된 마음을 확인하듯 점점 깊어지는 입맞춤에 애가 닳았다.

숨이 가빠 입술을 떼어낸 레오의 눈초리가 붉었다.

“사랑해. 오스칼.”

지금껏 가슴에 품은 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마치 지금까지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 그는 끝없이 그 말을 오스칼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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