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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92)화 (92/138)

92화



 

엷은 갈색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창백한 눈꺼풀이 번쩍 열렸다. 크게 떠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익숙한 천장을 담았다.

“지독한 악몽이었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다 쉬어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입안이 모래를 잔뜩 씹은 듯 까끌까끌해 켁켁 기침을 했다.

오스칼이 침대에 누워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창문으로 햇살이 잔뜩 들이치고 있었다.

눈이 부셔 이마 위로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리자 머리가 띵- 울렸다. 가슴을 옥죄는 것이 없는 편안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편안하다.’

순간, 느껴서는 안 될 생경한 감각에 오스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제 몸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조이는 것이 없는 허전한 가슴이 셔츠 안으로 만져졌다.

허겁지겁 고개를 돌리니 책상 옆에 걸린 라일락 빛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구겨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드레스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아….”

악몽 따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스칼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르투아 대공저의 정원에서 레오를 마주치고 도망가다 호수에 빠졌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지난밤 살갗을 에던 차가운 호수의 감각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

뤼미에르의 방에서 눈을 뜨다니, 대공저에서만큼은 무사히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그래, 대공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서 발사자르의 피를 얻으려 했었지.’

그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듯 오스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피!”

까맣게 잊을 뻔했다. 물에 빠졌을 때 잃어버렸으면 어쩌지?

오스칼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윽.”

호수에 빠지며 수면에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오스칼은 찌릿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다급하게 방안을 살폈다.

책상 위로 가지런히 올려진 홀스터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뤼미에르.

오스칼이 애써 뤼미에르에서 시선을 돌리고, 홀스터를 집어 들었다. 단단히 조여진 홀스터의 주머니 안에서 크리스털 병이 상한 곳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오스칼이 진이 빠진 듯 책상을 짚고 기대어 섰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낡은 양피지를 꺼냈다.

심호흡을 한번 한 오스칼이 크리스털 병의 뚜껑을 열고 천천히 기울였다.

후두둑-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양피지에 붉은 핏방울이 맺히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텅 빈 양피지에서 붉은 글자가 서서히 떠올랐다.

[사르데나 왕국의 왕궁 설계도와 군사기밀을 대가로 칼릭스 공작가의 가주 이든 칼릭스 그리고 차남인 근위대장 세드릭 칼릭스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조작해 국왕에게 전달한다.]

[계약자 아르투아 라인하트]

“하아.”

드디어 드러난 증거에 맥이 탁 풀려 오스칼이 깊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한 고생이 헛되진 않았구나.

모든 것을 바로잡을 유력한 증거를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그제야 방안에 놓인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타박상에 바르는 연고, 오한을 막아주는 물약 따위가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바구니에는 에렌의 저택에 두고 왔었던 오스칼의 소지품들이 곱게 담긴 채였다. 바구니와 의약품은 척 봐도 귀족들이 쓸 법한 고급품이었다.

정신을 놓기 전 물속에서 제 팔을 붙잡아 이끌던 손은 분명 레오의 것이었다.

그 뒤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레오가 정신을 잃은 자신을 뤼미에르 가옥으로 데려왔고, 치료를 위해 에렌의 사용인들이 다녀갔던 모양이었다.

적어도 레오가 직접 제 옷을 갈아 입힌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스칼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다 끝났어.”

다시 한번 계약서를 확인한 오스칼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은 오스칼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목선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 화장기 없는 흰 얼굴, 평민 남자가 입을 법한 실내복 차림. 입술이 파리한 것만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정말 최악이다.”

오스칼이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모습만을 알고 있던 레오가, 어제 자신을 마주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레오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오스칼이 공허한 눈으로 어젯밤의 성과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르투아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칼릭스가에 대한 국왕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계약서는 틀림없이 칼릭스가의 복권에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설혹, 국왕이 이 사실을 여전히 감추려 한다면 레오에겐 진실을 외면하고 폭정을 일삼는 국왕을 응징한다는 명분이 생긴다.

제라드의 소설과 뤼미에르 기사단의 영웅담으로 여론이 기울어진 상황이니, 이 계약서를 근거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투아와 잔느가 이교도 세력을 이용해 무력을 행사한다면, 이미 충분히 강해진 뤼미에르 기사단이 나설 수 있다. 로잘린의 북부가 합세할 수도 있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러자,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비겁한 자아가 유혹하듯 말을 걸었다.

‘도망쳐. 이제 네가 할 일은 다 끝났어. 그 녀석도 이제 널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생각할 거야.’

눈두덩이가 뻐근해졌다. 오스칼이 참아내듯 힘을 주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없어도 이 증거만 있다면 레오는 모든 걸 되찾게 될 것이다. 이 외전의 결말이 머지않았다. 곧 자신은 이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지리라.

기사단을 떠나, 외전의 결말까지 잠시만 숨어있으면 되지 않을까?

순식간에 판단력이 흐려졌다. 오스칼이 허겁지겁 가방을 꺼내 짐을 챙겼다. 그러다 문득, 오스칼의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진 뤼미에르에 멈췄다. 서랍장의 옷가지를 가방 안으로 밀어 넣던 손이 멎었다.

“내가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

다정했던 레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스칼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란 인간은 정말 최악이구나.”

오스칼이 서랍장 위에 짐가방을 털썩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레오를 속인 것도 모자라, 도망까지 치려고 하다니…. 나는 어디까지 비겁해질 셈이었던 걸까. 그를 마주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해야….

달칵-

오스칼의 생각이 정리되고 있을 무렵, 등 뒤에서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은 오스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오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오스칼이 깨어나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그의 눈이 오스칼이 등지고 선 서랍장에 닿았다. 그리고, 서랍장에 올려져 있는 짐가방을 확인한 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레오의 시선을 좇던 오스칼이 그가 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는 황급히 짐가방을 등 뒤로 숨기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스칼의 당황한 시선이 레오를 향하자, 무서운 얼굴을 한 레오가 오스칼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뭘 하는 거지?”

***

어젯밤, 레오는 그가 어떤 정신으로 뤼미에르까지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차에 올라타 뤼미에르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오스칼을 품에서 놓지 않았다는 것만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네스트 대공저의 하녀들이 가옥 안으로 우르르 들이닥쳤다.

레오로서는 도대체 어디에 쓰는지 감도 오질 않는 다양한 세면도구와 옷가지, 그리고 의약품까지 바리바리 챙겨온 그들은 오스칼의 방과 응접실을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공저의 하녀들이 제 역할을 해내는 동안, 레오는 응접실 한편에 우두커니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기사님, 옷이 온통 젖으셨는데. 얼른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흠뻑 젖은 채, 응접실 마룻바닥에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를 향해 하녀 한 사람이 툭, 조언을 건넸다.

그녀는 응접실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 중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가 하녀를 향해 물었다.

“아, 오스칼은…. 어떻습니까….”

“맥을 볼 줄 아는 하녀 말로는, 정신을 잃긴 했지만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깊이 잠들어 계신 것 같대요. 오늘 낮에도 좀 피곤해 보이셨거든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오스칼이 잠들어 있는 2층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방금 그와 대화를 나눈 대공저의 하녀가 낮에 오스칼을 만났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실감이 났다.

“오늘 무도회에 참가하는 일 역시, 오스칼이 먼저 내게 부탁했어. 그리고 자네가 오늘 일을 모르길 바랐지.”

에렌의 말을 곱씹은 그가 천천히 머리를 쓸어올렸다. 고향 친구를 만난다던 오스칼은, 에렌과 함께였다.

대공저의 하녀들이 할 일을 모두 마친 뒤 짧은 인사를 건네고 떠난 후에도, 그는 한참을 응접실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오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오스칼이 보인 행동들이 퍼즐을 맞추듯 맞아떨어졌다.

결코, 다른 사람과 함께 씻지 않던 모습, 누가 들어올세라 늘 꽁꽁 잠겨있던 방문, 고열로 쓰러졌을 때 가슴께에 매어져 있던 붕대 자락.

“내가 네 엄마 친구 아들이다…!”

그를 처음 만난 날, 오스칼은 스스로를 어머니 친구의 아들이라고 했었다. ‘아들’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스칼이 제 어머니와 관계가 있는 건 맞는 걸까?

“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분이었어. 오히려 왕국 기사단에서 쫓겨났는데도 왕국민을 위해 기사단을 만든 널 분명 자랑스러워하실걸.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그 말을 하는 오스칼의 눈빛은 분명,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것마저 거짓일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레오가 양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대체 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모습이지, 오스칼?”

무거운 목소리가 땅에 떨어져 바닥에 가라앉았다.

오스칼이 깨어나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장작이 다 탄 벽난로의 불꽃이 틱틱-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불씨도 남지 않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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