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레오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가 눈앞에 우뚝 멈춰선 인영을 멀거니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인영은 틀림없이 여인의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여자를 모른다고는 하나, 여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여인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겨울밤 차가운 공기를 견디기엔 드레스가 얇은 것일까. 추위를 많이 타는 걸까. 오스칼도 추위를 많이 타는데.
백지가 되어버린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은, 또다시 오스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바로 오스칼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 오스칼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멋대로 환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눈을 힘껏 감았다가 떴다.
아니, 틀림없는 오스칼이었다. 수백 명의 관중 속에서도 그는 오스칼만은 단번에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제가 눈앞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여인은 그대로 얼어버린 듯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가 어깨를 떨지 않았다면, 정원의 조각상이라고 믿어버릴 뻔했다.
레오의 시선이 여인의 떨리는 어깨를 지나, 흰 목덜미에 닿았다. 목 아래 내려오는 녹색의 펜던트를 확인한 레오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동요했다.
그제야 그는 현실을 직시했다.
“오스…칼?”
넋이 나간 듯한 레오의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얼어붙은 듯 섰던 오스칼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눈앞의 남자가 레오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온몸에 서리라도 내려앉은 듯 피가 식어 얼어붙었다.
‘지금 내가 어떤 꼴을 하고 있더라.’
오스칼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발걸음마다 드레스 자락이 걸려 보석들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다시 한번 그녀가 완연한 여인의 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오스칼의 눈가가 붉어졌다. 새하얗게 된 머릿속에서 지금 당장 도망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그대로 오스칼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오스칼!”
등 뒤에서 또렷하게 제 이름이 들렸다.
처음 이름을 불렀을 때의 의구심 어린 목소리와 달리, 이번엔 확신에 찬 부름이었다. 레오의 목소리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오스칼의 시야가 흐려졌다.
이제 그는 저를 뒤쫓고 있었다. 레오의 걸음은 자신보다 곱절은 빨랐다. 그러니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쳐도 결국 그에게 따라 잡힐 것이 분명했다.
‘제발, 제발 쫓아오지 마.’
도망쳐 봐야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오스칼이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그에게 진실을 이렇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오스칼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처 없이 달렸다.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어느새 그녀는 아르투아 대공저의 커다란 인공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스칼, 잠깐! 기다려!”
레오의 간절한 목소리에 날카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정신없이 달리던 오스칼이 주춤거렸다. 그의 목소리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경멸이 담겨 있진 않았다. 오스칼이 눈물을 삼켰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사정을 설명하면….
오스칼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때, 어둠이 짙게 깔린 발아래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뚜둑-
가느다란 구두 굽이 돌다리 틈에 박혀 부러지는 소리였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 급히 몸을 돌려세운 오스칼의 몸은 순식간에 구두 위에서 중심을 잃었다.
“아.”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오스칼의 몸이 기울었다. 관상용 돌다리의 야트막한 난간은 쓰러지는 오스칼의 몸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미처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오스칼의 몸이 다리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오스칼!”
레오의 절박한 외침도 이미 늦었다. 희미한 달빛을 머금은 어여쁜 정원의 풍경을 뒤에 둔 채, 연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실루엣이 공중에 떠올랐다.
풍덩-
순식간에 오스칼의 몸이 호수로 추락했다. 얼음장 같은 물이 달려들어 온몸을 난도질했다. 살을 에는 듯한 예리한 냉기에 숨이 막혔다.
호수의 수심은 끝을 모르게 깊었다. 물을 머금은 드레스가 무거워지고, 드레스에 달린 보석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오스칼의 몸을 짓눌렀다.
‘괴로워.’
오스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트라우마가 호수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오스칼의 몸을 옥죄었다. 차마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어둡고 차가운 호수 안, 심연으로 가라앉는 몸과 함께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깨어나면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어.’
오스칼이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순간, 커다란 손이 오스칼의 몸을 붙잡았다.
***
눈앞의 여인이 오스칼이라는 확신이 들자, 레오는 혼란에 휩싸였다.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오스칼이 제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레오는 이곳이 아르투아 대공저라는 사실도 잊고, 오스칼을 쫓아 달렸다.
왜 오스칼이 제게서 도망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를 마주한 이후,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굳은 오스칼의 표정과, 파리한 안색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오스칼의 작은 등이 위태로워 보였다.
“오스칼, 잠깐! 기다려!”
그의 외침에 오스칼이 멈칫 발걸음을 멈추는 듯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이 그를 돌아보았다. 간신히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가 팔을 오스칼에게 뻗었다. 하지만 그 팔이 오스칼에게 닿기도 전에 오스칼의 몸이 휘청였다.
작은 인영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이내 물속으로 사라졌다. 모든 장면이 그의 눈에 느릿하게 비쳤다. 적막을 가르는 물보라에 그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첨벙!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곧장 호수로 뛰어들었다.
“응. 어릴 때 물에 한 번 빠진 기억이 있어서. 내가 수영을 못하거든.”
그 녀석은 분명, 수영을 못한다고 했었다.
옷 속을 파고드는 찬 냉기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살을 에는 한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두운 수면 아래, 그는 본능에 의지해 오스칼을 찾아 잠수했다.
손에 걸리는 기다란 물풀들을 헤집고, 무작정 헤엄친 그의 손에 여린 살결이 붙들렸다. 레오가 사력을 다해 수면을 향해 솟아올랐다.
“오스칼! 오스칼!”
차디찬 물속에서 오스칼을 끌어올려 낸 레오가 다급하게 오스칼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아직 폐까지 물이 차진 않았는지, 호흡은 정상이었다.
그러나 파랗게 질린 얼굴은 눈을 꼭 감은 채 의식이 없었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얇은 옷 너머 희미하게 비치는 몸은 완연한 여인의 것이었다. 붙임머리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그가 사랑하는 삐죽삐죽한 연갈색 머리칼이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렸다.
머리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린 진실과 눈앞에 실신한 오스칼은 레오를 미치게 했다.
그러나 그사이에도 흠뻑 젖은 두 사람의 몸은 야속하게도 겨울밤의 냉기에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 오스칼을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
레오가 차갑게 얼어버린 오스칼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붕대를 감지 않은 말랑하고 부드러운 몸이 다시 한번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을 처참하게 부서뜨렸다.
“!”
뒤돌아선 레오의 눈앞에, 가라앉은 눈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에렌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절망스러운 얼굴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오스칼은 무도회의 홀을 빠져나간 뒤 한참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벌써 뒷문의 마차를 타고 떠났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오스칼이 걱정된 에렌이 정원으로 오스칼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곳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레오가 에렌과 오스칼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에렌이 걸친 흰 여우털 장식 코트 깃 안으로 고급스러운 검은색 연미복이 보였다.
연미복과 드레스. 레오가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형형한 눈으로 에렌을 노려보았다.
“제길.”
에렌이 낮게 욕을 읊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결국, 레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가장 알지 못했으면 하는 순간에.
“전하께 기회를 드릴 수가 없어요. 제겐 이미….”
에렌은 오스칼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오스칼이 무엇 때문에 그의 마음을 거절했는지 알고 있었다. 오스칼이 하려던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바로…. 눈앞의 이 남자.
에렌이 그늘진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모든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될까.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데, 도저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에렌의 등에 한기가 돌았다.
레오가 싸늘한 눈빛으로 에렌의 곁을 스쳐 지났다. 에렌이 다급하게 오스칼을 안아 든 레오의 팔을 붙들고 그를 막아 세웠다.
“놓으십시오. 전하.”
레오의 목소리가 무섭도록 시리게 울렸다. 에렌이 목이 탄 듯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로… 가는 건가.”
“전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내 거처로 가. 뒷문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
레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던 겁니까.”
오스칼을 안아 든 레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렌이 서늘한 눈으로 레오를 응시했다.
“그래. 자네보다 내가 먼저였어. 그녀를 먼저 만난 건 나야.”
레오의 가슴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러면서 제게 오스칼이 사내라도 좋으냐 물으셨던 겁니까.”
“여인인 오스칼을 자네 곁에 두는 게 싫었거든.”
에렌의 눈이 일렁였다.
“언제까지 속일 셈이었습니까?”
“글쎄. 오스칼은 자네에게 진실을 알리길 원하지 않았어.”
레오가 입술을 짓씹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그의 입술이 터져 피가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에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오늘 무도회에 참가하는 일 역시, 오스칼이 먼저 내게 부탁했어. 그리고 자네가 오늘 일을 모르길 바랐지.”
오스칼을 안아 든 레오의 손이 움찔댔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 레오를 에렌이 다시 막아섰다.
“대공저로 가. 내가 자네보다 오스칼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더 많아.”
“아니요. 오스칼은 집으로 갈 겁니다.”
이를 악다문 레오의 눈초리가 불그스름해졌다. 에렌이 착잡한 한숨을 내뱉었다. 흰 연기가 그의 입가에서 흩어졌다. 이곳에서 더 실랑이할 시간은 없었다.
“그 상태로 가면 분명 앓을 거야.”
에렌이 자신의 몸에 두른 흰 코트를 벗어 레오의 팔에 안긴 오스칼의 몸 위로 둘러주었다. 레오가 번민이 담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검은 마차가 있어. 그걸 타고 가. 그리고 기사단으로 오스칼의 시중을 들 사람을 보내지. 자네가 직접 여인의 시중을 들 생각은 아닐 테니.”
레오의 턱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입안의 여린 살을 꾹 씹었다. 혀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오스칼만 아니라면…. 전하의 도움 따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에렌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나 역시 오스칼이 아니라면 자넬 도울 이유가 없어. 내 눈앞에서 자네가 오스칼을 데려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인내심이 바닥날 지경이니까.”
레오는 에렌의 시선을 뿌리치듯 몸을 돌려 사라졌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선 에렌이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 저택을 떠났다.
바스락-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던 자가 몸을 움직였다. 가늘어진 눈 위로 빛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