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90)화 (90/138)

90화



 

뻐억-!

발사자르에게 향하던 오스칼의 손이 그대로 주먹을 쥐고 그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크억.”

순식간에 주먹으로 코를 가격당한 발사자르가 비명을 질렀다.

퍽!

발사자르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의 얼굴 위로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왔다. 예상치 못한 강한 충격에 발사자르가 뒤로 벌러덩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첫 번째는 내 거, 두 번째건 세레나 몫이다. 이 자식아! 개뼈다귀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오스칼이 욕을 내뱉으며 얼얼한 주먹을 허공에 털었다. 침대에 고꾸라진 남자의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솟구치는 분노를 주먹으로 풀어낸 오스칼이 씩씩대며 발사자르를 노려보았다.

“더 두들겨 패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참는 줄 알아. 나쁜 자식아!”

오스칼이 재빨리 허벅지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발사자르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받아내자, 투명한 크리스털 병이 붉게 차올랐다.

“이걸 얻으려고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단 거지.”

오스칼이 복잡한 표정으로 피가 담긴 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계약서의 흑마법만 풀어내면, 칼릭스 공작가에게 누명을 씌운 아르투아 대공을 끝장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작가 역시 제 자리를 찾을 것이었다. 물론 여기 쓰러져 있는 놈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이제 내가 할 일도 끝이네.”

오스칼이 굳은 표정으로 병을 허벅지의 홀스터에 넣고는 끈을 단단히 조였다. 분명 처음엔 이 소설에서 탈출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으으….”

기절한 발사자르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란 오스칼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방을 빠져나왔다. 저택을 탈출하기도 전에 왕족 폭행 혐의로 붙잡혔다간 모든 것이 수포가 될 것이다.

오스칼이 서둘러 별채를 빠져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에렌은 정원과 연결된 뒷문 근처에 탈출용 작은 마차를 준비해 두겠다고 했었다.

‘제발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때까지 기절해 있어라.’

드레스 자락을 단단히 붙잡은 오스칼이 저택의 뒷문을 향해 달렸다.

***

시에나의 우아한 살롱.

방안에는 레몬과 로즈메리, 그리고 삼나무 냄새가 섞인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테이블 위에는 은 식기들이 반짝였다.

제철 굴로 만든 아뮤즈 부쉬부터 생선, 육류, 그리고 달콤한 사과 타르트 디저트까지. 격식을 차린 스무 가지의 요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서대로 참석자들 앞에 놓였다.

그리고 밤이 깊은 시각. 요리가 나올 때마다 어울리는 포도주를 페어링해 마신 부유한 후원자는 몽롱한 눈빛으로 제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좌까님, 제가 말씀드렸었놔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좍품이 〈공작 아내의 유혹〉이라고?”

“예예, 부인. 이미 17번 정도 말씀하셨습니다.”

제라드가 테이블에 놓인 냅킨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눈앞의 우아한 귀부인은 제라드의 열혈 팬으로, 〈청년 작가 후원회 - 작가와의 대화>(라고 쓰고 팬미팅이라 읽는다〉의 첫 번째 고객이었다.

“공좍부인이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은 척한 뒤, 점을 찍고 나타나 공작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그 복수극! 정말 속이 시원했지 뭐예요, 호홍. 공좍쉐키 다 주겨버려!”

귀부인이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를 냈다. 제라드가 만취한 귀부인을 향해 곤란한 듯 말을 이었다.

“하하하…. 제 작품을 좋아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인, 술을 꽤 많이 드신 거 같은….”

“줴가! 지금 맨정신으로! 있을 수과 엄써서 구래요오!”

“하하하…. 부인께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으흑흑흑.”

별안간 귀부인이 앞에 놓인 냅킨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부, 부인. 괜찮으신지….”

제라드가 안절부절못하며 부인의 어깨를 토닥이자 귀부인이 제라드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엉엉 울어댔다.

먼발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레오와 마티스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난들 어떻게 알아요!”

귀부인 근처에 서 있던 로잘린이 양어깨를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향해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으흑흑.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어떻게 내 아버지의 힘을 빌려 지금 자리까지 오른 남자가, 내가 낳은 딸들을 밀어둔 채 밖에서 낳아온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할 수가 있냔 말예요! 네?”

“예……. 예?”

제라드가 제 옷을 눈물과 콧물로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귀부인의 사정에 놀란 눈을 했다.

“좌까님,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잔인하답니다. 〈공작 아내의 유혹〉의 쟝 고빈느 공작보다 더 악독한 이가 바로 내 남편이라고요. 으흐흐흑.”

패앵-

악에 받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귀부인이 냅킨에 코를 풀었다.

“부, 부인께 그런 사정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좌까님의 소설이 없었다면 정말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을 거예요. 소설을 보면서 얼마나 대리만족이 되던지. 외전 주세요. 외전이요오- 흑흑.”

“예예. 제가 꼭 〈공작 아내의 유혹〉 외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고….”

“제가 오늘 같은 날 집에 있을 수가 있었을까요? 이런 후원회라도 열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내 집에서! 감히! 내 딸들의 데뷔탕트보다 더 성대한 파티를 열다니!”

콱-

귀부인이 은제 나이프를 냅다 테이블 위에 꽂았다. 흠칫 놀란 제라드가 부인을 말렸다.

“부, 부인. 고정하세요….”

“내 아버지의 지원이 없었다면 군사도 하나 갖지 못했을 놈이었는데! 내 아버지가 곤경에 처하니까 뻔뻔하게 모른 체하는 나쁜 놈!”

부인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잔에 붉은 포도주를 콸콸 따랐다. 그리고는 제라드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으아악. 부인. 그만, 그만 드시지요! 이미 충분히 취하셨습니다.”

제라드가 부인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었을 때는 이미 귀부인이 잔을 다 비우고 난 뒤였다.

귀부인이 잔뜩 풀린 눈으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제라드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좌까님.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줴든지 말씀하쉐여. 줴가 이래 보여도 명색이 일국의 공주우우웨에엑-”

아….

제라드가 불길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로잘린도 그만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제라드의 첫 번째 팬 미팅은 토사물로 젖어버린 옷을 바라보는 제라드의 거친 생각과 레오와 마티스의 불안한 눈빛,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로잘린과 함께 전쟁처럼 끝나버렸다.

***

고급스러운 마차 안.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쉰 레오가 맞은편 의자에 길게 누워 잠든 귀부인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귀부인은 후원회도 익명으로 연 만큼, 자신이 타고 온 마차의 마부 외엔 하인도 하나 없이 후원회에 참석했다고 했다.

살롱에서 레오를 향한 로잘린의 사악한 표정이 어째 불안하다 싶더니, 그녀는 술에 취한 귀부인의 귀갓길을 레오에게 맡겼다.

“제라드 경은 꼴이 엉망이라 지금 부인을 모실 만한 상태가 아니고, 마티스 경은 후원회 장소를 정리한 후 저를 데려다주셔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귀부인을 모시는 건 여기서 가장 강한 기사님이 하셔야 할 임무가 아닐까요?”

로잘린이 눈부신 미소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결국, 술에 취해 정신을 놓은 귀부인을 둘러업고 마차에 실은 레오는, 홀로 그녀와 동행하게 되었다.

“우윳빛깔 좌까님….”

귀부인의 술주정에 가볍게 고개를 저은 레오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녀석은 지금쯤 돌아왔으려나.”

레오가 마차의 창틀에 팔꿈치를 얹은 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고향 친구라니, 어떤 사람일까. 많이 친한 녀석인가. 혹시 오스칼을 위해 필요할지도 모르니 그 친구라는 놈의 인적사항을 알아두는 게 좋겠지?

물론, 친구 놈에게 다른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냐.

‘보고 싶다.’

오스칼에 대한 생각 끝에는 항상 제 마음 깊숙이 묻어둔 감정이 튀어나왔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근처가 찌르르 울려 기분이 울렁거렸다.

어느새 일상이 된 감각에 레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느새 마차는 거대한 저택의 뒷문으로 향했다. 마부가 고갯짓을 보내자 굳게 잠겼던 뒷문이 스르르 열렸다. 귀부인이 외출하며 누군가와 미리 말을 맞춰 놓았던 모양이었다.

마차는 매끄럽게 뒷문을 통과해 호화스러운 정원의 인공 호수 앞 작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호숫가에 만들어둔 부인의 개인 별채였다.

마차가 아기자기한 외관의 별채 앞에 멈추자, 안에서 하녀들이 달려 나와 부인을 맞이했다.

“세상에,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낯선 사내가 부인을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리자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부인께서…. 좀, 아니 많이 취하셨습니다.”

“아휴. 오늘 외출에서 좀 늦으시겠다더니! 어쨌거나 대공비 전하를 무사히 데려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녀들이 부인을 부축해 떠나자, 나이가 지긋한 인상 좋은 하녀 한 사람이 레오에게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부인을 지칭한 단어에 레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대공비라고…?”

라인하트에서 대공 작위를 가진 자는 둘뿐이었다. 에르네스트 대공은 미혼이니, 방금 그가 모신 귀부인은 아르투아 대공의 비라는 소리였다.

레오가 당황해 주먹을 꾹 눌러 쥐었다. 아무리 딴생각을 하며 왔다 해도, 자신이 들어온 곳이 아르투아 대공저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채다니, 한심했다. 그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그때, 멀리서 여인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걸음이었다. 레오가 문득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인의 인영이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라일락 빛 드레스에 달린 보석들이 흔들려 잘그락잘그락 소리를 냈다.

한밤중에 드레스를 입고 정원을 달리는 여인이라니.

위험하진 않겠지만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에 레오가 나무 아래로 몸을 피했다.

딱-

하필이면 그의 발밑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눈치 없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달려오던 여인이 그 소리에 흠칫 걸음을 멈추고 경계심 어린 눈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짙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두 사람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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