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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89)화 (89/138)

89화



 

오스칼의 몸이 다시 한번 크게 휘청였다. 제 몸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에렌의 손길을 느끼며 오스칼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게 무슨 신종 놀림이냐고 항의를 하려던 오스칼의 입술이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그대로 멈추었다.

“농담이 아니야.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거든.”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오스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평화로운 왈츠곡 안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폭풍처럼 얽혀들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대공 전하가 저같이 신분도 불확실한 자와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겨, 결혼이란 건 사랑하는 사람끼리….”

오스칼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웃음기 사라진 에렌의 얼굴이, 그 얼굴에 담긴 진심이 두려워 오스칼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대를 좋아해.”

에렌의 고백에 오스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지금껏 아닌 척 해왔지만, 이제 무리야. 확실히 깨달았어. 내가 그대를 얼마나 원하는지.”

“나는… 나는 전하를….”

에렌이 오스칼의 말을 가로막았다.

“날 선택해. 난 그대가 원하는 걸, 뭐든 줄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매일 오늘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고 화려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 그것뿐만이 아니야. 내가 가진 돈, 보석, 명예. 모두 그대 것이 될 거야.”

에렌의 입에서 달콤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 유혹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스칼은 도리질했다.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그래 알아, 전부 줄게. 그대가 진짜 원하는 것조차도.”

서늘한 에렌의 목소리에 오스칼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느새 왈츠곡은 절정으로 흐르고 있었다. 오스칼은 말을 잇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에렌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에렌이 낮게 읊조렸다.

“칼릭스의 복권, 폭군의 실각, 새로운 왕. 그런 거잖아. 그대가 원하는 건.”

“!”

오스칼이 마른침을 삼켰다. 에렌이 오스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춤의 일부분인 것처럼 우아한 동작이었다.

“난 한 번도 왕좌에 관심을 가진 적 없어. 평생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겼지. 그건 형님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왕좌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신념 같은 거였어.”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감각에 오스칼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대를 위해서라면 형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나라를 그대에게 바친다고 하면 내게 와줄 건가?”

어느새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어 오스칼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처연할 정도로 간절했다.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랫입술을 꾹 짓눌러 다문 그녀가 비로소 결심한 듯 에렌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하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아요. 전하께서 제게 해준 모든 것들에 감사하고요.”

“난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고.”

오스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날 위해 전하가 평생 지켜온 신념을 버리지 말아요.”

“그대가 없는데 신념이 무슨 소용이지?”

격양된 에렌의 목소리가 잇새로 빠져나왔다. 오스칼의 손을 맞잡은 그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대공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상관없어. 내게 기회를 줘. 그대가 날 선택한다면 뭐든 할게.”

“전하께 기회를 드릴 수가 없어요. 제겐 이미….”

오스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에렌의 표정이 일순간 무너져 내렸다. 그가 괴로운 얼굴로 오스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더 말하지 마. 그 이상은 아무리 나라도 너무 비참하잖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린 마음의 조각들이 에렌의 심장을 통증으로 가득 메웠다. 오스칼의 허리를 붙든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어느덧 춤곡이 끝나고, 춤을 추던 귀족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새 표정을 바꾼 에렌도 예를 갖춰 오스칼에게 인사했다. 오스칼의 손등에 살짝 입 맞춘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진동했다. 그의 눈가가 붉었다.

“그럼, 그대가 성공하길 바라지.”

담담하게 읊조린 그는 오스칼이 부탁한 대로 춤곡이 끝나자 오스칼 곁을 떠나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오스칼이 입술을 꾹 깨물고 구두코를 바라보았다.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두는 야속할 만큼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오스칼이 곁눈질로 발사자르를 힐끔 바라보았다. 발사자르는 여전히 그녀를 탐색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친 오스칼이 홀로 연회장의 문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복도에 이르자, 등 뒤에서 자신을 쫓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세레나. 왜 혼자 나왔어? 벌써 에르네스트 대공이 네게 흥미를 잃었나 보지?”

“그러는 공자님이야말로 왜 제게 관심을 가지시죠? 우리가 미래를 약속하거나 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가 알던 세레나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발사자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네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할 땐 언제고, 대공의 관심을 받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나 보지? 그 관심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아? 그 녀석 주위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어처구니없는 말에 오스칼의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네, 자기소개 잘 들었습니다.

“적어도 공자님의 관심보단 오래가지 않을까요? 대공 전하는 훨씬 신사적인 분이시거든요.”

“하하. 재미있네. 난 기억을 잃은 지금의 네가 훨씬 마음에 들어. 튕기는 맛이 있는데?”

발사자르가 춤을 추느라 살짝 흐트러진 오스칼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쪽 입꼬리를 비열하게 올렸다. 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에렌이 관심을 보이는 여자란 생각에 세레나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뺏어 와야지. 그놈 건 뭐든 뺏을 거니까. 왕좌든, 여자든.

발사자르의 눈에서 비틀린 소유욕이 일렁였다.

“그런가요? 그 전엔 제가 어땠는데요?”

오스칼이 도발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에 화답하듯 오스칼에게 가까이 다가온 발사자르가 오스칼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오스칼의 귓가에 은밀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고분고분하게 내가 원하는 건 다 해줬지. 참 편리했는데.”

오스칼이 또 한 번 그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욕구를 참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의 주인이라는 ‘세레나’는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던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애써 상냥하게 꾸며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나요? 호호호…. 공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옛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조용한 곳에 가서 옛날 일을 말씀해 주시는 건 어때요?”

오스칼이 순진한 척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 발사자르가 만족한 듯 웃었다.

“좋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발사자르가 은근슬쩍 오스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스칼이 웃으며 그의 팔을 탁- 쳐냈다.

“보는 눈이 많은데… 괜히 스캔들이라도 나면 공자님의 평판에 누가 되지 않을까요?”

“그, 그런가?”

여기 보는 사람 없는 것 같은데….

발사자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

발사자르가 오스칼을 데려간 곳은 빈 게스트룸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어쩐지 퇴폐적인 느낌을 주는 붉은 벨벳 캐노피가 길게 드리운 널찍한 침대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못다 한 얘기를 나누기에 알맞은 곳 같지?”

그가 찡긋 윙크하며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캐노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오스칼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오스칼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발사자르란 인간은 알면 알수록 최악이었다.

오스칼이 허벅지의 단도를 슬쩍 만져 확인하고는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문득 오스칼은 제 몸의 주인인 세레나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자신이 현실로 돌아가면 세레나는 어떻게 될까? 그녀는 이미 살롱에서 죽은 것일까?

“공자님은, 절 잘 아나요?”

“물론이지.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도 그럴 게, 네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잖아.”

발사자르가 조소를 흘렸다. 그것이 그가 세레나를 통제하는 방법이었다.

그녀를 아끼는 척하면서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작은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깎아내렸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갉아먹으며, 상대방을 지배한다. 잔느가 사람들을 조종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발사자르가 세레나에게 관심을 보인 유일한 사람이었다니. 오스칼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가족들은 없었어요?”

오스칼의 물음에 발사자르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가족 이야기를 묻다니,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정말인가 보네? 솔직히 난 네가 다른 남자와 무도회에 온 걸 들킨 게 창피해 기억을 잃었다는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넌 고아고, 네 숙부인 카탈리나의 자르제 백작이 널 내게 팔았어. 네가 어지간히 쓸모없었던 모양이야.”

“파, 팔았다고요?”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에 오스칼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일에 협조한 늙은 하녀 하나를 라인하트로 빼돌려야 했지.”

오스칼의 머릿속에 이자벨의 집에서 만난 카탈리나 출신 노파, 파트리샤가 스쳐 지나갔다.

“아, 아가씨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려던 게 아니에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주인님이 시키셔서 어쩔 수 없이.”

하나씩 끼워 맞춰지는 서글픈 진실에 오스칼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세레나는 발사자르가 운영하는 인신매매단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넌 그걸 행운으로 여겼어. 어차피 백작가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았거든. 널 그나마 사람처럼 대해준 건 나뿐이었으니까. 고맙지?”

발사자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말에, 오스칼이 망연한 눈을 했다.

“그래서… 그동안 절 찾는 사람이 없었던 거군요.”

“오. 그 표정. 예전에 네가 자주 짓던 표정이야….”

발사자르가 옛 기억을 떠올리듯 키득거렸다. 그에게 세레나는 언제나 함부로 대해도 되는 여자였다.

오스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카탈리나 출신인 제가 왜 라인하트의 살롱에 있었을까요.”

“아. 그날 우리가 거기서 만나기로 했었어. 난 일이 생겨 좀 늦었는데, 그 사이에 폭탄 테러가 일어났지 뭐야.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참, 슬픈 일이었지.”

발사자르가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꾸며냈다. 일순간 오스칼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서늘해졌다.

살롱 테러의 배후는 아르투아였다. 발사자르가 그 일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의도적으로 세레나를 살롱으로 불러냈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은 연인을 테러 현장으로 밀어 넣어 죽이는 것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주먹을 꾹 쥐었다.

〈빙의물의 여덟 번째 법칙, 빙의한 몸의 원래 주인은 대개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세레나는 사랑했던 남자의 계략으로 살롱에서 목숨을 잃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얼마나 괴로운 삶을 살았으면, 세레나는 이런 형편없는 남자에게 매달려 애정을 갈구했을까.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아낸 오스칼이 세레나를 향해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버려지듯 살롱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발사자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뱉은 막말이 효과가 있었던지, 영락없이 그가 알던 세레나의 모습이었다.

원래는 세레나를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세레나를 뺏는다면 잘난 에르네스트 대공이 얼마나 분하겠는가.

“넌 아직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내가 외롭지 않게 해줄 테니 이리와.”

마치 세레나가 된 듯 오스칼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의 목소리에 마치 세레나라도 된 듯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스칼이 텅 빈 눈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발사자르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아무리 달라져 봐야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영원히 넌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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