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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88)화 (88/138)

88화



 

대단한 귀족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발사자르는 우쭐해졌다. 높은 계단 위에서 비굴한 표정의 귀족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짜릿했다.

발사자르는 홀 내부를 눈으로 훑으며, 양팔에 매달린 영애들보다 더 매력적인 영애가 있지는 않은지 살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연회장의 한편에서 멈추었다. 그의 등장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낀 여인.

괘씸함이 치밀어 올랐다. 감히 제 앞에서 저런 불손한 태도를 보이다니.

그는 간신히 표정을 간수하며 문제의 영애를 쏘아보았다. 우아함을 가장한 발걸음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가 계단을 반쯤 내려오자, 영애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 넓은 홀에서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낯이 익었다.

‘뭐…뭐야?’

발사자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결국 우아함 따윈 내버리고 여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앗, 공자님! 너무 빨라요.”

팔에 매달린 영애들이 그의 다급한 걸음에 미처 따라붙지 못하고 당황해 앙앙댔다.

급기야 그가 걸리적거리는 두 사람을 매섭게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홀 안을 가득 메운 귀족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사자르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그가 가까워진 것도 모른 채 어딘가에 골몰한 기색이었다. 발사자르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레나…? 너 설마 세레나 자르제야?”

낯선 목소리와 낯선 이름이었다. 오스칼은 그것이 저를 향한 부름인 줄도 몰랐다.

오스칼이 고개를 든 까닭도, 눈앞에 선 인영의 그림자로 시야가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누구….”

눈앞의 남자를 확인한 오스칼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발사자르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혼란스러운 것은 오스칼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흘끔거리자, 제게 쏠린 이목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이 남자한테 접근해야 하는데…. 먼저 말을 걸어주니 고맙지.’

잠깐 고민하던 오스칼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발사자르 공자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연회장을 구경하며 곁눈질로 익힌 대로, 드레스 자락을 잡고 예를 갖추었다. 에렌이 알려준 가짜 신분으로 자기소개를 하려는 찰나, 발사자르가 말을 가로챘다.

“그 목소리! 너 진짜 세레나 맞구나?”

세레나가 누구야…?

오스칼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발사자르가 제게 와서 저도 모르는 이름을 부르다니.

“어…. 음….”

오스칼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발사자르였다.

“너, 그 살롱에서 빠져나왔던 거야?”

“!”

난데없는 질문에 오스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살롱이라면 자신이 처음 눈을 뜬 살롱을 말하는 걸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발사자르는 빙의 전 그녀를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빙의한 영애의 진짜 이름은 ‘세레나 자르제’. 그 사실을 알아챈 오스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빙의물의 일곱 번째 법칙, 빙의 전의 인물을 아는 자에게 내가 빙의자라는 걸 들켜선 안 된다.〉

가까스로 태연한 척을 한 오스칼이 입을 열었다.

“발사자르 공자님을 뵙습니다.”

“하! 세상에. 널 여기서 보리라곤, 아니 네가 살아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네가 살아있다면 당연히 날 찾아올 줄 알았거든.”

“죄송합니다, 공자님. 제가 살롱에서의 사고로 불행히도 예전의 기억을 일부 잃고 말았답니다.”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발사자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을 잃었다고? 그럼 그렇지! 넌 나 없이 못산다고 했잖아.”

“네…. 그렇죠…. 네?”

그의 말에 대충 영혼 없는 맞장구를 치려던 오스칼이 터무니없는 소리에 새된 소리를 냈다.

“너 카탈리나에서 날 졸졸 쫓아다니던 거 기억 안 나? 아. 기억을 잃었다고 했나. 네가 사랑하는 건 나뿐이라고 했었잖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오스칼의 턱이 빠질 것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 황당해 절로 벌어진 입에서 영혼이 그대로 빠져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 제가… 공자님을 사…사랑했다고요?”

오스칼이 빙의한 영애를 향해 마음으로 울부짖었다.

세레나씨…. 왜 볼 거라곤 반반한 얼굴뿐인 쓰레기 같은 놈을 쫓아다닌 거예요?!

“맞아. 네가 불쌍해 보여서 몇 번 만나줬지. 아, 착각하진 마. 우리가 미래를 약속하거나 한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

기가 막힌 대답에 오스칼이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발사자르는 삐딱하게 서서 오스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척 봐도 이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이 입은 드레스 중에 가장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였다. 게다가 전에도 꽤 아름다웠던 외모는 눈에 띄게 매력적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가 알던 세레나는 멀거니 생기 없는 얼굴을 하고 공허한 눈빛으로 제게 안달하는 시시한 여자였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생기가 감도는 뺨과 반짝이는 눈망울을 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요 몇 개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흠. 넌 그새 돈 많은 노인이라도 잡은 거야? 그 드레스 하며…. 보석들….”

오스칼은 주먹을 날리고 싶은 것을 억누르느라 이를 으득 갈았다. 발사자르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세레나는 그를 사랑했고, 어쨌거나 그도 세레나와 만남을 가진 것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는다면 상처받을 말만 족족 내뱉고 있었다.

“공자님은 말솜씨가 워낙 좋으셔서, 말씀하실 때 뇌를 굳이 사용하지 않으셔도 되나 봅니다.”

그게 아니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머리에 우동 사리만 든 자식아!

오스칼이 뒷말을 애써 삼켰다.

“허,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입이 있는데 못할 건 뭐예요?”

세레나의 입에서 빈정거리는 말이 나오자 발사자르가 눈을 크게 떴다. 달라진 세레나의 모습에 흥미가 일었다.

매력적인 자세로 머리를 쓸어 올린 발사자르가 은근슬쩍 오스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구랑 온 거야? 하긴, 누구랑 왔든 상관없지.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내게 잘 보여야 하거든. 널 내 파트너로 달라고 하면 줄걸?”

“뭐라고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사자르가 오스칼의 손목을 붙들었다. 오스칼이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발사자르는 힘을 빼지 않고 손목을 더욱 움켜쥘 뿐이었다. 오스칼이 챙겨온 단도를 떠올리며 눈을 치켜떴다.

“이 손 놓지 않으면 정말 베어버리는 수가…!”

콱-

그때, 단단한 팔이 발사자르의 손목을 잡아챘다.

“새로 생긴 사촌께서 내 파트너에게 관심 가지는 건 상당히 불쾌한데.”

“윽.”

강한 악력에 발사자르가 신음을 내며 오스칼의 팔목을 놓았다.

입매를 살짝 올린 에렌이 발사자르를 바라보았다. 여유 있는 미소와는 달리 그는 발사자르를 꿰뚫듯 형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오스칼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확인한 에렌이 발사자르의 팔을 거칠게 놓았다.

통증이 남은 손목을 허공에 털어내던 발사자르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에렌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든 가진 잘난 남자라니, 불쾌했다.

“세레나…. 설마 네 파트너가 에르네스트 대공이었어?”

“네, 물론 이 연회장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고요. 공자님께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란 뜻이죠.”

오스칼이 발사자르를 향해 생긋 웃었다.

“발사자르 공자.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하는데. ‘내’ 파트너와 둘이 있고 싶어서 말이야.”

발사자르의 한쪽 눈매가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분한 듯 에렌을 쏘아보았다.

‘저건’ 내 거였는데.

발사자르가 눈짓을 하자, 내팽개쳐진 두 영애가 쭈뼛쭈뼛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골이 잔뜩 난 그가 두 영애를 양팔에 단단히 끼운 채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오스칼을 응시하고 있었다. 연회장의 귀족들은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젊은 왕족들의 기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원래 알던 사이였어?”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에렌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오스칼이 기가 다 빨렸다는 표정으로 에렌의 손에서 샴페인을 받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한 번에 다 마셔버릴 줄은 몰랐다는 듯 에렌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저와 카탈리나에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래요.”

“서…설마, 저놈이랑 사귀었던 거야?”

에렌의 물음에 오스칼의 손에서 크리스털로 만든 샴페인 잔이 빠직- 금이 갔다. 갈라진 샴페인 잔을 지나가던 사용인의 쟁반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둔 오스칼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얘긴 입 밖에도 꺼내지 말아요. 난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일뿐더러, 생각만 해도 소름 돋으니까. 기억을 잃기 전 나는 다른 사람이에요. 한마디로 전생! 전생이라고요.”

오스칼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우아한 머리 장식이 반짝였다. 에렌이 형형한 눈으로 발사자르를 노려보았다.

저놈을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군. 그가 이를 갈았다.

어느덧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무도회의 춤곡이 시작되었다. 파티의 주최자인 발사자르가 귀여운 금발 영애의 손을 잡고 먼저 춤을 시작하자, 다른 귀족들이 일제히 연회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경쾌한 선율에 에렌이 구겨졌던 미간을 살짝 풀었다. 그가 오스칼을 향해 미소 지었다.

“무도회에 왔으니, 우리도 춤을 춰야 하지 않겠어?”

“추, 춤을요?”

에렌이 오스칼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한 곡 추시죠, 마드모아젤.”

내려다보는 얼굴이 아름다워 오스칼이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렌의 손이 단숨에 오스칼을 이끌었다.

‘사교계의 왕자’란 별명은 과연 허풍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춤 실력은 단연 수준급이었다. 노련하게 오스칼을 리드하던 에렌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춤 실력도 꽤 대단한데? 그대는 못 하는 게 뭐야?”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보죠.”

오스칼이 피식 웃으며 서툴렀던 자신의 첫 번째 춤을 떠올렸다.

작은 테라스에서 창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레오와 함께 추던 춤. 오스칼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에렌의 표정은 살짝 굳었다.

지금 누굴 생각하고 있어? 묻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볼 안의 살을 짓씹으며 말을 삼켰다.

홀 안의 젊은 귀족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오스칼과 에렌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처음엔 두 사람에게 무관심한 척 다른 영애와 춤을 추던 발사자르도 이젠 숨기는 기색도 없이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저 자식이 그대에게 단단히 관심이 있는 모양이야. 이쪽을 무섭게 쳐다보고 있거든.”

에렌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의 어깨너머로 발사자르의 표정을 흘긋 확인한 오스칼이 소곤거렸다.

“이번 춤곡이 끝나면 전하가 자리를 비우세요. 그러면 제가 홀을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갈게요. 아까부터 제게 추근거리지 못해 안달이 났으니, 제가 혼자가 되면 따라올 거예요.”

“뭐? 그러다 저놈이 허튼짓이라도 하면….”

“원래 계획이 그거였잖아요. 저자를 유인해서 피를 얻는 거.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난 정말 내키지 않아.”

에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제 혈관을 흐르는 건 피가 아니라 저놈에 대한 분노니까 괜찮을 거예요. 전하는 제가 실수로 저놈을 죽여버리지 않길 기도해줘요.”

오스칼의 심술궂은 표정에 에렌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에 있는 무모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인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삐끗-

발사자르를 때려눕히는 상상을 하던 오스칼의 발이 드레스 자락을 밟았다.

“앗!”

낮은 신음을 흘리며 휘청이는 오스칼의 몸을 에렌이 얼른 받아 안았다. 바짝 붙어선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에렌의 푸른 눈이 오스칼을 응시했다. 웃음기 없이 진지한 눈이었다.

그가 오스칼의 허리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의 손길에 오스칼의 드레스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오스칼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오스칼. 나와 결혼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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