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하얀 레이스 커튼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자, 드레스에 꿰어진 자잘한 보석들이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하늘거리는 질감의 드레스는 체력 훈련으로 다져진 오스칼의 탄탄하고 날씬한 몸에 우아하게 맞았다. 그리고 파스텔 톤의 라일락색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아리땁게 차려입은 오스칼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후광이라도 비치는 듯 눈이 부셨다.
“어때요? 낯설죠? 저도 저 같지 않은데….”
알랭과 에렌이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오스칼이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오늘처럼 제 일에 자부심을 느낀 적이 없었답니다. 정말 최고의 작업이었어요. 제가 마법사라도 된 줄 알았지 뭐예요.”
가브리엘의 칭찬에 쑥스러운 듯 오스칼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가브리엘 역시 오스칼을 몽롱한 눈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사고가 정지한 듯 에렌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도자기같이 잘 빚어진 그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속절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사용인들이 서로 눈짓을 보내며 에렌의 표정을 살폈다. 에렌을 모신 지 오래였지만, 청산유수 같은 말발을 가진 그가 말문이 막혀 당황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브리엘의 드레스가…. 정말 대단하죠?”
에렌이라면 평소처럼 입에 발린 플러팅이라도 늘어놓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별다른 말이 없었다.
민망해진 오스칼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들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오스칼이 움직일 때마다 치맛단의 보석들이 마치 은하수를 뿌려놓은 듯 일렁였다.
“정말, 아름다워. 세상에서 제일.”
늘 여유 있던 에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참았던 숨을 뱉은 그의 호흡이 달떴다.
작은 얼굴에 청초함이 묻어나는 이목구비, 그 아래 자리한 생기 있는 뺨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에렌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반할 수도 있는 건가.
그의 말에 오스칼이 안심한 듯 활짝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예쁜 드레스는 처음 봤어요.”
“아니, 그대가…. 더….”
“어흠.”
퍼뜩 정신을 차린 알랭이 체통을 지키라는 듯, 에렌의 허리를 쿡 찌르며 헛기침을 했다. 오스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에렌의 시선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정처 없이 떠돌았다.
“아. 다, 다들 수고했네. 가브리엘 자네는 과연 명성대로군. 비용은 알랭을 통해 청구하게.”
에렌의 눈짓에, 알랭이 오스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물렸다. 손님방의 응접실에 둘만 남게 되자 에렌이 오스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른침을 넘기는 그의 울대가 꿈틀거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오스칼에게 다가가 입 맞추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이게 필요하다고 했지?”
에렌이 잘게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건넸다. 오스칼이 상자를 열자 작은 단도와 크리스털 병, 그리고 소가죽으로 만든 허벅지 홀스터가 들어있었다.
“맞아요! 고마워요.”
오스칼이 단도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다가 에렌을 향해 씩 웃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말괄량이 아가씨의 웃음이었다.
낯설 정도로 아름다워진 오스칼의 얼굴에 익숙한 표정이 떠오르자, 잔뜩 굳어있던 에렌의 입가가 한결 풀어졌다.
“난 그대의 그런 모습도 좋아.”
“지금, 드레스랑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날 놀리는 거죠?”
에렌을 향해 눈을 흘긴 오스칼이 샐쭉하게 말했다.
총총걸음으로 파우더룸에 들어간 오스칼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허벅지에 홀스터를 묶고는 단도와 크리스털 병을 단단히 꽂아 넣었다.
오스칼이 각오를 다지듯 주먹을 한번 말아 쥐었다. 이제, 피를 볼 시간이었다.
***
지나치다 싶게 번쩍거리는 큼지막한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작전을 모의 중이었다.
“오늘 무도회는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 그대는 내 파트너로 참석하는 건데, 이게 그대의 가짜 신분이야.”
에렌이 건넨 종이를 읽어보던 오스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르데나의 상단주 딸이요?”
“귀족들 사이에서 귀족으로 위장했다간 들통나기 쉽거든. 외국의 상단주 정도가 적절해.”
“혹시 절 알아보는 귀족이 있으면 어쩌죠.”
오스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귀족 영애의 차림을 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나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를 아는 귀족이 라인하트에 한 명도 없다는 거야. 그대를 처음 만난 그 살롱은 귀족들이 드나드는 곳인데 말야. 정말 그대는 정체가 뭐야?”
에렌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오스칼의 표정은 불안한 듯 어두워졌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가 얼른 피만 얻고 도망쳐야겠어요.”
오스칼이 불안한 듯 손바닥을 주물렀다. 긴장감에 손가락이 차가워져 곱아들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에렌이 오스칼의 옆자리로 옮겨 왔다. 그는 장갑을 벗어 오스칼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오스칼이 움찔 몸을 떨었다.
“긴장하면 될 일도 안 돼. 너무 무리하진 마. 그리고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따뜻한 그의 체온으로 얼었던 손가락이 녹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오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마차는 아르투아 대공저의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바뀐 풍경에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오스칼이 낮은 탄성을 질렀다.
“여기가… 정말 집이에요?”
왕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웅장한 저택이었다. 에르네스트 대공저의 화려함에도 놀랐었는데, 이곳은 규모부터가 달랐다.
본채와 별채를 포함해 유리온실, 마구간, 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들까지. 대공저를 이루는 건물만 족히 열 채는 넘어 보였다.
정문을 통과하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저택의 앞과 뒤에서 끝도 없이 펼쳐졌다. 따뜻한 계절이었다면 꽃이 만발해 웬만한 궁전의 정원보다도 아름다웠을 풍경이었다.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초목이 남아있는 정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을 가져다 놓은 듯했다.
저택의 뒤편으로 조성된 넓은 인공 호수 위로는 정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고급 화강암으로 만든 아치형 다리가 있었다.
정원 곳곳에서 신화 속 인물들과 상서로운 동물을 조각한 예술품들이 위용을 뽐냈다.
오스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창밖을 내다보는 사이, 연회가 열리는 별관 건물 앞에 도착했다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저의 풋맨이 깍듯한 태도로 마차 앞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별관 앞에는 먼저 도착한 귀족들이 타고 온 고급스러운 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
자연스러운 태도로 풋맨에게 고갯짓을 한 에렌이 품위 있게 오스칼을 에스코트했다. 그의 팔짱을 낀 오스칼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주위를 흘긋거렸다. 노이어의 무도회와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이었다.
건물 내부는 화려한 장식물들로 번쩍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실내장식은 오늘의 파티를 위해 완전히 새로 바꾸었는지 광이 났고, 벽에는 왕국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을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마블 무늬가 인상적인 대리석 바닥에는 사치스러운 수입 양탄자가 깔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한 감각이 발바닥에 전해졌다.
오늘의 연회가 열리는 별관 ‘거울의 방’은 대공저의 하이라이트였다.
방안을 가득 채운 호화로운 17개의 아치형 거울과 이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게 설계된 17개의 유리창, 금으로 장식된 벽, 수천 개의 크리스털로 만든 샹들리에까지.
아르투아가 이번 무도회를 위해 단단히 이를 간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상황도 잊고 저택을 감상하다가 입을 딱 벌렸다.
“마드모아젤이 침이라도 흘리면 큰일인데.”
“앗.”
정신없이 연회장을 둘러보는 오스칼의 모습에 에렌이 쿡쿡거렸다. 오스칼이 당황해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와 그 파트너 드십니다.”
사용인의 외침과 함께, 오스칼이 연회장의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발을 내딛자,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홀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오스칼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사교계의 왕자’로 불리는 에렌이 파티에 데려온 첫 공식 파트너였다.
에렌은 늘 연회장에 혼자 나타나 여러 영애와 가볍게 어울리다 돌아가곤 했다. 그런 에렌이 처음으로 무도회에 파트너를 대동하고 나타나자, 모두의 이목이 오스칼에게 집중되었다.
먼저 도착해 달콤한 식전주를 즐기고 있던 귀족 영애들이 오스칼을 향해 뜨거운 눈빛을 쏘아댔다. 대체 어떤 대단한 영애기에 그의 파트너가 되었냐는 투였다.
그러나, 오스칼을 신랄하게 평가하기로 작정한 듯 삐딱하게 눈을 떴던 사람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대공의 곁에 선 여인은 빛이 난다는 표현조차 부족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움직임을 따라 보석이 반짝였고, 녹음을 닮은 눈동자에선 싱그러움이 흘러나왔다.
영애들은 질투 어린 시선을, 영식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벌써 오스칼에게 반해 넋을 잃은 청년들도 보였다.
“역시 그대를 내 호위기사로 데려올 걸 그랬어. 쓸데없는 경쟁자만 잔뜩 생긴 거 같은데.”
오스칼을 향해 쏟아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에렌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오스칼이 내 눈에만 예쁠 리 없지. 그가 낮게 욕을 중얼거렸다.
“전하는 항상 무도회에 오면 이런 시선을 받으시는 건가요? 저 지금 너무 떨려요.”
노이어의 무도회에선 레오 외엔 제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는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오스칼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겠다는 계획은 벌써 실패인 모양이었다.
“긴장을 풀 만한 달콤한 거라도 가져다줄게.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남자들이 꼬신다고 넘어가면 안 돼.”
에렌이 오스칼을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미소를 머금자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귀족 영애들의 입술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나도 저런 남자랑 질척하게 엮여봤으면 좋겠다.
“빠, 빨리 와요.”
오스칼이 그에게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그 얼굴이 귀여운 듯 에렌이 오스칼의 눈을 응시하며 손등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런 그를 올망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오스칼의 모습에, 문득 인쇄소에서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빨리 올게, 마드모아젤.”
에렌이 쿡쿡대며 웃었다. 그땐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고 괴성을 지르더니만, 드레스를 입더니 마드모아젤의 예법에 적응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눈만 깜빡여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에렌이 자리를 비우고, 백조 모양의 얼음조각상 앞에 서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오스칼은 곁눈질로 연회장을 흘끔거렸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3중주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홀에서는 가지각색의 드레스를 갖춰 입은 귀부인들과 고급스러운 연미복을 입은 신사들이 우아한 모습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이런게 바로 소설에서 보던 귀족들의 사교계인가 싶은 광경에 심장이 떨렸다.
온실에서 따왔을 수천 송이의 꽃들이 연회장 곳곳에서 자태를 뽐냈다. 은은한 꽃향기가 현악기의 선율에 실려 오자 오스칼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때 제각기 떠들던 귀족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였다. 어딘가 달라진 연회장의 분위기에 오스칼이 고개를 돌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 서 있는 사람은 발사자르였다. 새하얀 연미복을 입은 남자가 홀과 연결된 계단 위로 나타났다.
곱슬한 흑발을 멋들어지게 쓸어 넘긴 그가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우아한 걸음으로 내려왔다.
오른팔로는 귀여운 인상의 금발 영애를 에스코트하고, 왼팔로는 요염한 자태의 붉은 머리 영애를 끌어안은 채였다.
“발사자르 공자 드십니다.”
사용인의 우렁찬 외침에, 참석자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발사자르는 흡족한 듯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를 위해 준비된 무도회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 절 위해 마련해 주신 자리입니다. 제게 모든 걸 일임하고 자리를 비우셨으니, 참석하신 분들은 지엄하신 아르투아 대공 전하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파티를 즐겨 주시면 됩니다.”
하하하-
그의 농담에 귀족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씨구. 아주 양팔에 여자를 끼셨구먼.”
오스칼이 실소를 머금었다. 오스칼은 발사자르의 등장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유일한 손님이었다.
발사자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아르투아는 전략적으로 자리를 피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타깃은 한 명뿐이다.
그나저나 옆에 영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접근하지? 오스칼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여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오만함이 섞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세레나…? 너 설마 세레나 자르제야?”
눈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오스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