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다음 날 아침, 오스칼은 긴장감도 심란함도 느낄 틈이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로잘린이 들이닥쳐 오전 내내 부산스럽게 움직여준 덕분이었다.
로잘린은 제라드의 후원회를 완벽하게 치르겠다는 각오로 최종 점검에 여념이 없었다.
“작가님, 오늘 후원회의 성패는 작가님에게 달려있답니다. 오늘 뵙게 될 부유한 후원자께서 단단히 만족하시고 여기저기에 입소문을 내주셔야 앞으로 이 후원회가 계속될 수 있을 테니까요.”
로잘린은 의자에 앉은 제라드의 머리를 만져주며 다짐을 받았다.
“옙!”
제라드는 긴장한 얼굴을 했지만 들뜬 기분을 감추진 못했다. 제라드는 오늘 그가 가진 옷 중 가장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로잘린이 살짝 떨어져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마침내 로잘린이 느릿한 리듬으로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손뼉을 세 번 울렸다.
“완벽해요. 이 이상으로 꾸민다고 해서 작가님을 더 멋있게 만들 수는 없어요. 사람에겐 자신이 가진 기본기라는 게 있으니까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로잘린의 말에 제라드가 눈알을 굴렸다. 로잘린은 어수선해지는 제라드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후 타이르듯 단단히 일렀다.
“작가님께서는 항상 경청하는 자세로, 그리고 생기 있는 눈으로 후원자를 대하셔야 해요. 말린 생선 같은 눈깔은 금물이에요.”
“물론이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후원자의 말씀에 절대 해서는 안 될 대답이 뭐라고 했죠?”
“아 진짜요?”
“아주 좋아요!”
오스칼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킬킬거렸다. 제법 능숙하게 제라드를 조련하는 것이, 로잘린은 역시 관리자가 체질인 모양이었다. 그때 오스칼 곁으로 다가온 레오가 불쑥 말을 걸었다.
“넌 오늘 친구를 만나느라 함께 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으응…. 아마 오늘 늦을 것 같아…. 어쩌면 내일 들어올 수도 있고.”
오스칼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오늘 발사자르의 무도회에서 피를 언제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오스칼이 외박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레오가 한쪽 눈매를 찡그렸다. 그는 간신히 언짢은 기색을 숨겼다.
“어제 하려던 말은 뭐였나.”
“아….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일 말할게.”
오스칼은 여러 가지 일을 앞두고 괜히 신경이 쓰일 말을 꺼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말을 둘러댔다. 레오가 손을 꼼지락거리고 서 있는 오스칼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친구와 너무 늦게까진 돌아다니지 말고. 얼굴이 꽤 피곤해 보이니까.”
그가 다정하게 오스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해 푸석한 오스칼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로잘린이 눈을 치켜떴다.
“레오날드 경.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저 선물 꾸러미들을 정리해 주시겠어요?”
“레오폴드라고 누누이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레오가 눈썹을 한번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군말 없이 로잘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 뜻대로 레오를 저쪽으로 보내버린 로잘린이 오스칼 곁으로 다가왔다. 오스칼이 로잘린을 향해 웃어 보였다.
“기사단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정말 감사해요. 후원회는 몇 시부터라고 했죠?”
“오후 세 시부터 시작할 거예요. 티타임 후 저녁 식사가 있어요. 작가님이 미공개 외전을 낭독하고 나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거고요, 마지막엔 책에 사인도 해드릴 거예요.”
완벽한 일정이었다. 부디 오늘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오스칼이 초조한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늘, 모든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잘 될 거예요. 오스칼은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와요.”
로잘린이 생긋 웃으며 오스칼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때맞춰 마티스가 기사단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드모아젤! 살롱까지 모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좋아요! 다들 출발하시죠!”
로잘린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제라드와 마티스가 문을 빠져나갔다. 레오는 문을 나서기 전 오스칼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럼 나중에 보지.”
오스칼이 손을 흔들어 네 사람을 배웅했다.
네 사람을 태운 마차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쯤, 오스칼이 입을 굳게 다물고선 검집을 허리에 둘렀다. 이제 제 일을 할 차례였다.
***
오늘 파티가 열리는 곳은 아르투아 대공저이건만, 오히려 에르네스트 대공저가 더욱 분주했다. 에렌의 진두지휘 아래,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마치 국왕이라도 초대하는 파티를 준비하는 듯 정신이 없었다.
에렌은 대공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청소를 지시했다. 커튼과 카펫은 모두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대공저에서 가장 실력 있는 요리사들은 모두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데 동원되어 온갖 음식 재료와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중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왕국 최고의 디자이너, ‘가브리엘 보뇌르’가 며칠 전부터 대공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젯밤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던 에렌은, 5분마다 한 번씩 초조한 기색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분명 점심때쯤 오기로 했는데.”
연신 대공저의 복도를 서성대는 에렌 곁에서 알랭이 헛기침을 한번 했다.
“흠흠. 전하께서 그렇게 돌아다니신다고 오스칼 님이 더 일찍 도착하는 것도 아니니 제발 고정하고 앉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오늘 오는 건 맞겠지?”
에렌이 눈썹을 잔뜩 늘어뜨리고는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알랭이 못마땅하다는 듯 안경을 고쳐 썼다. 에렌의 어깨너머로 창문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 그가 짧게 대답했다.
“드디어 도착하신 것 같군요.”
에렌이 얼른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긴장한 듯 힘을 주어 입술을 다문 오스칼이 대공저 앞에서 사용인들에게 신원을 확인받고 있었다. 에렌이 체통도 잊고 후다닥 달렸다.
오스칼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그는 얼른 사뿐한 걸음으로 바꾸어 걸었다. 그리고 다시 여유로운 척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어서 와. 내가 직접 데리러 갔어야 했는데, 혼자 오게 해서 미안해.”
“제가 거절한걸요.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기사단 사람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긴장감 때문인지 오스칼의 어깨는 평소보다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에렌이 우아한 손길로 오스칼의 어깨를 쓸었다.
“아직 식사 전이지? 곧 정신없이 바빠질 예정이니까 든든하게 배부터 채우자고.”
에렌의 에스코트에 따라 들어선 식당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기다란 만찬 테이블 위를 호화로운 요리들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어찌나 많은지 눈으로는 가짓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소, 돼지, 칠면조와 같은 육류는 물론이고 관자, 새우, 랍스터, 농어가 포함된 생선요리까지 육해공을 망라하는 산해진미가 흐드러지게 차려졌다.
모든 요리는 금테를 두른 고급스러운 문양의 접시에 놓였는데, 어찌나 산뜻한지 접시마저도 맛있어 보일 정도였다.
테이블 사이사이에는 온실에서 재배된 것이 분명한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센터피스가 화려함을 뽐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오스칼이 입을 딱 벌렸다.
“원래 왕족들은 매끼 식사를 이렇게 해요…?”
“그대가 온다니까 특별히 준비한 거야. 내 집에서 함께 하는 첫 번째 식사니까.”
“첫 번째요? 다음도 있어요?”
“그건 모르지. 앞으로 매일 아침을 같이 먹게 될지도.”
에렌이 푸른 눈을 접어 웃었다. 오스칼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허름한 재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화려한 식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차림이네요.”
“그대는 존재 자체로 충분해. 그러니까 맛있게 먹기만 해주면 돼.”
에렌이 능숙한 손길로 의자를 빼 주었다.
평소라면 진수성찬 앞에서 정신 줄을 놓고 음식을 즐겼을 오스칼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무언가 목에 걸린 듯 식욕이 돌지 않았다.
에렌을 흘긋 보자, 그는 눈을 빛내며 오스칼이 맛있게 먹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먹을게요.”
그의 기대에 보답하는 것이 예의란 생각에 오스칼은 간신히 제 앞에 놓인 캐서롤과 그레이비가 얹어진 으깬 감자를 접시에 조금 덜었다.
문득, 위엄 있는 자태를 뽐내는 노릇노릇한 칠면조 구이 옆에 놓인 요리를 알아챈 오스칼이 미소를 지었다. 이 호화로운 식탁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만, 당당히 식탁 한가운데를 차지한 음식.
“이건 조크바르네요.”
오스칼이 제가 준비한 회심의 요리를 알아본 것이 신이 났는지 에렌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전담 요리사가 꽤 공을 들였다고.”
에렌의 뿌듯한 목소리에 오스칼도 살짝 웃었다.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식사시간 내내 웃고 있었다. 오스칼은 숙제라도 하듯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아직 식탁 위의 음식은 사 분의 일도 먹지 못했지만, 이제 더는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겠어요.”
오스칼이 지쳤다는 듯 포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러자 에렌이 벽에 걸린 암갈색의 고풍스러운 괘종시계를 흘긋 들여다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무도회를 위한 준비를 시작해볼까?”
손님방으로 안내된 오스칼은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실내장식에 눈을 크게 깜박거렸다.
하늘하늘한 레이스 커튼과 윤기가 흐르는 벨벳 커튼이 겹쳐 시원하게 난 커다란 유리창을 살짝 가렸고, 천장에선 크리스털이 장식된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방 안에는 따뜻한 느낌을 주는 가구와 우아한 장식품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미술이라곤 잘 모르지만, 벽에 걸린 수많은 그림은 값비싼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대를 위한 요정 할머니를 소개할게.”
에렌이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방의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오스칼의 눈앞에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여성이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핑크빛 머리를 단단히 틀어 올린 여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오스칼이라고 합니다.”
“전, 가브리엘 보뇌르라고 해요. 오늘 당신을 왕국 최고의 마드모아젤로 만들어 줄 사람이죠.”
쭈뼛거리는 오스칼을 향해 가브리엘은 오만하지만, 똑 부러지는 목소리를 냈다.
“가브리엘을 섭외하는 게 쉽지 않았어.”
에렌이 오스칼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가브리엘이 역삼각형 모양의 멋스러운 안경 뒤로 눈을 뾰족하게 떴다.
“전하께선 오늘 파티의 의상을 제작해달라고 제게 연락한 귀족의 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아세요?”
“그야 당연히 모르지. 하지만 그건 알아. 그중에 가장 신분이 높고, 가장 비싼 값을 치르겠다고 한 게 나일 거라는 거.”
“그리고 제 부티크가 대공 전하의 건물 1층을 빌려 쓰고 있다는 점도 알고 계셨죠.”
가브리엘이 샐쭉하게 대답했다.
덩달아 민망해진 오스칼이 눈알을 굴렸다. 진짜 파트너도 아니니까, 적당히 창피당하지 않을 만한 드레스 정도면 충분했는데, 에렌은 대단한 디자이너에게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해 드레스를 구해온 모양이었다.
에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우아하게 몸을 돌려 문가로 걸어갔다.
“이제 오스칼은 그대에게 맡길 테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로 만들어줘. 물론 지금도 가장 아름답지만.”
에렌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