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가뜩이나 심란해 머리가 시끄러운데, 심란만 가중할 남자의 등장이었다. 밤늦게 또 찾아왔느냐고 대꾸할 기력도 없는 듯 오스칼이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당신까지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 줄래.”
오스칼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클로드는 오스칼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이 상했네.”
클로드가 손가락을 뻗어 오스칼의 푸석한 뺨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그 손끝의 감각에 오스칼이 몸을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
“당신이 계약서를 확인할 피를 내놓지 않았잖아. 그게 속상해서 그래.”
“정말이야?”
제 탓이라는 말에 클로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 말이 진짜라 믿는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냐. 괜히 투정 부려 본 거야. 신경 쓰지 마. 당신은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꽤 오랜만인 거 같은데.”
그 물음에 클로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오랜만’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오스칼의 방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밤마다 은빛 회오리와 함께 이곳에 나타나 몇 시간이고, 곤히 잠든 오스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사라지곤 했다.
그저 오늘 밤은 오스칼이 평소보다 늦게까지 잠들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비밀을 살며시 숨겼다. 말해봐야 칼날이 날아올 테니까.
“그동안 샤무아를 정리하느라 바빴거든.”
“진짜…? 정말 샤무아를 그만두기로 한 거야? 그럼 당신은 이제 뭐 먹고 살아?”
오랜만에 만난 남자에게 의미 없이 물은 안부 인사였는데, 돌아온 대답이 일을 그만둔다는 거라니. 오스칼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클로드가 쿡쿡 웃었다.
“설마 내가 굶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긴. 당신이라면 그동안 앞으로 백 년은 먹고 살 만큼 돈을 모아뒀겠지. 내가 누굴 걱정해.”
오스칼이 괜한 걱정이었다는 듯 팔짱을 끼고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평소보다 힘이 없는 오스칼의 목소리에 클로드의 눈매가 가라앉았다.
“정말 당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냥 나 스스로가 한심해서 울적해. 모든 게 엉망진창이거든.”
슬픈 목소리였다. 클로드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는 여태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옛날엔 나도 자주 슬펐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런 감정을 잊고 살았어. 지난 500년간 내게 찾아온 자들이 보이는 감정은 증오, 욕망. 그런 것뿐이었거든.”
“당신도 참 힘들었겠다.”
“먼 옛날 일이지만. 내가 슬플 땐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났어.”
“어떻게 했는데?”
오스칼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500년 전 조상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무엇인가.’라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클로드가 또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궁금해?”
“응.”
그러자 클로드가 대답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오스칼을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궁금하다며, 꽉 잡아.”
놀란 오스칼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클로드가 생긋 웃었다.
***
은빛 연기가 휘몰아치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캄캄한 어둠뿐인 곳이었다.
오스칼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칠흑 같은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사람을 데리고 어디로 온 거야? 여긴 왜 이렇게 깜깜해. 귀신 나오는 건 아니지? 나 무섭다고!”
오스칼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반쯤은 울먹였다.
공포영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설마 그런 류는 아니겠지?
“흠. 여기가 맞는데.”
클로드가 여전히 오스칼을 단단히 품에 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시야 속에서 젖은 흙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드문드문 물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오스칼이 답답한 듯 되물었다.
“샤르트르의 숲이야.”
“뭐어? 지금 여기가 검은 숲이란 소리야? 얼른 다시 집에 데려다줘! 여기 엄청 무서운 곳 아니냐고!”
검은 숲이라는 말에 질겁한 오스칼이 클로드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검은 숲은 결코 슬플 때 도움이 되는 곳이 아니었다.
“원래 이곳에 반짝거리는 곤충들이 떠다녔어. 아주 예뻐서, 한참 바라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었거든. 그래서 당신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그런데… 왜 없지?”
“설마 반딧불이 말하는 거야?”
“곤충 이름은 나도 몰라. 하지만 이제 모두 떠났나 봐. 역시, 이곳에 봉인되어 있던 내 심장의 흑마법 때문일 거야.”
클로드가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그의 말에 오스칼이 기가 막힌 듯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반딧불이는 여름 곤충이거든? 지금은 초겨울이고! 당신 심장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지금은 추워서 없는 게 당연하다고.”
오스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 탓이 아니란 오스칼의 말에 클로드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런 거겠지?”
“당연하지. 지금은 반딧불이가 나올 날씨가 아니야! 하여간 당신도 참 허술한 구석이 있다니까. 이제 됐지? 빨리 다시 돌아가자. 여기 춥고 무섭다고.”
오스칼이 클로드를 재촉했다. 클로드는 잠시 눈을 굴려 생각에 잠기더니 오스칼을 향해 속삭였다.
“대신 이렇게 하면 어때?”
순식간에 캄캄했던 숲이 반짝거리는 빛들로 가득 찼다. 빛이 들자 빽빽한 나무 사이 동그랗고 작은 호수가 있는 아담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클로드가 주저앉아 하염없이 반딧불이를 구경하던 공간이었다.
작은 별들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그 호젓한 공간에 뿌려놓은 것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우와.”
두 사람 곁을 가득 에워싼 깜박거리는 작은 반짝임에 넋을 잃은 듯 오스칼의 입술이 벌어졌다.
클로드가 눈을 휘어 웃으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푸른 천 위에 오스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마법으로 따뜻한 공기막을 만들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을 위한 내 마법이야.”
키다리 나무들 사이에 폭 싸인 잔잔한 호수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자, 그 연기를 따라 클로드의 마법이 만든 작은 빛들이 일렁였다. 호수 위 내려앉은 빛이 수면에 비치어, 온통 보석을 뿌려놓은 듯 황홀한 광경을 만들었다.
마법이 만든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꼭 크리스마스 같아.”
눈앞의 광경에 매료된 오스칼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잘게 쏟아지는 신비로운 빛들이 숲 전체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로 만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뭐야?”
“그런 날이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
“그럼 앞으로 당신의 날들은 전부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다.”
오스칼이 고개를 돌려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오스칼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반짝임이 비쳤다. 오스칼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이던 오스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난 당신이 원하는 걸 들어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이제 날 찾아오지 마.”
지금껏 반쯤은 농담처럼 치부해 온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알았다.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건 더 큰 상처만 남길 뿐이다.
오스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클로드의 보랏빛 눈이 일렁였다.
“당신은 나를… 버릴 거야?”
“계속 내 곁에 머물면 당신은 상처받게 될 거야.”
“나는… 당신을 좋아해. 당신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어.”
서글픈 그의 말에 오스칼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야 할 때였다.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
“알아.”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지만 슬펐다. 그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오스칼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런데도 왜 날 좋아해?”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봐, 지금도…. 내가 아니라 당신이 울잖아.”
오스칼이 뻐근해진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써 깜빡거렸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사실… 이기적이고, 거짓말쟁이거든.”
“그것도 알아.”
“윽.”
뼈를 때리는 긍정에 오스칼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날 좋아한다면서 빈말이라도 좀 부정해 줄 순 없었나….
하지만 어떤 걸 안다는 거지? 오스칼이 의문이 서린 눈으로 클로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클로드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당신, 정체를 숨기려고 남자 행세를 하고 있잖아.”
“뭐?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왜 그동안 모른척했어?”
“난 당신을 남자로 알고 있다고 말한 적 없어. 왕국 최고의 정보상을 그런 허술한 변장으로 속일 수 있을 줄 알았어?”
오스칼이 입을 딱 벌렸다. 남자란 걸 알면서 추근대는 변태인 줄 알았더니?
“설마 당신 투시라든가…. 하는 이상한 방법으로 알아낸 건 아니지?”
“그런 짓 따위 안 해도 충분해. 내가 당신을 몇 번이나 안았는데? 당신의 향기, 감촉, 영혼만으로도….”
“제발 그런 끈적한 표현 좀 쓰지 마!”
또 야릇한 단어만 골라서 문장을 조합하는 클로드에게 소리를 버럭 지른 오스칼이 씩씩댔다. 순식간에 눈물이 쏙 들어간 기분이었다. 클로드가 오스칼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역시, 우는 것보단 낫네.”
그 말에 오스칼이 클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잠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날 위로해줘서 고마워. 이 예쁜 광경은 평생 못 잊을 거야. 하지만 이제 내게 이러지 않아도 돼. 난… 정말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거든.”
클로드의 눈이 순수한 슬픔으로 차올랐다. 텅 빈 가슴 안을 가득 채우는 아픈 기분.
아, 이런 게 ‘슬픔’이었지.
그가 오스칼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의 반딧불이는 오스칼이 되고 말았는데, 영원히 그의 계절엔 반딧불이가 찾아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가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좋아하는 게 나였으면 좋겠어.”
“미안해.”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냥 날 이용해도 돼.”
“난 그럴 수 없어.”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얼굴에 괴로움이 떠올랐다.
클로드는 그가 마음을 알아달라고 조를수록, 곁에 있게 해달라고 할수록 오스칼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리란 것을 알았다.
오스칼이 원한 건 늘 하나뿐이었다. 클로드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당신이 욕심쟁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클로드가 제게 심장을 준 사람을 향해 곧 울 것처럼 웃어 보였다.
오스칼이 궁금했던 날들, 오스칼을 지켜보았던 시간들, 그리고 다른 남자를 질투했던 순간조차도, 오랫동안 캄캄했던 제 삶에서 빛 같던 나날들이었다.
그가 살아온 긴 세월에 비하면 형편없이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모든 순간이 낯설고 설렜다.
호수에 비친 그림자가 밤바람에 일렁거렸다. 나부끼는 그의 머리칼이 달빛처럼 반짝였다. 클로드가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는 제 모습에서 더는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스칼은 언제나 그를 짓누르던 은빛 머리칼을 달빛처럼 아름답다고 말해줬으니까.
‘그리고 이젠 이 모습을 보면 당신이 떠오르겠지.’
끔찍했던 제 모습도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모습을 보고서 오스칼이 떠오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은 은빛을 내뿜었다. 그 빛에 눈이 부셔 오스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어둠 속에서 당신과 이별하고 싶진 않았어.”
클로드가 작게 속삭였다. 이윽고 은빛 소용돌이가 걷히고, 오스칼이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어느새 그녀의 침대 위였다. 클로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클로드가 이 방을 찾아온 마지막 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