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로잘린이 제안한 사업은 바로 〈젊은 예술가를 위한 후원회〉였다. 물론, 실상은 제라드의 유료 팬 미팅을 열자는 것이었지만.
로잘린의 말에 의하면, 지금 왕국 여인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제라드의 소설이었다.
귀족 부인부터 여염집 아낙네들까지, 모였다 하면 제라드의 소설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했다.
“젊은 예술인을 후원하는 행사는 귀부인들의 오랜 취미 중 하나거든요. 귀부인들 중에 제라드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이 꽤 있답니다.”
“저, 저 녀석을요?”
마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로잘린의 이야기를 듣던 오스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왕실에서 제라드의 소설을 문제 삼고 있어요. 귀족 부인들을 상대로 제라드의 후원회를 공개적으로 열긴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 제가 나서야죠. 전 시에나의 사교계에 참여할 자격이 충분하잖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마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 시에나의 사교계에서 귀부인들과 친분을 쌓을 거예요. 그리고 작가님과의 일대일 후원회를 주선할 겁니다.”
로잘린이 한쪽 눈을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그녀의 기지에 오스칼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교 모임으로 위장하겠다는 거군요!”
“맞아요. 왕실에선 귀부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열리는 후원회를 알지 못할 겁니다. 설령 알려지더라도, 그저 여인들의 시답잖은 행사라고 둘러댈 수 있어요.”
모두 로잘린의 치밀한 계획에 새삼 놀라는 눈치였다. 로잘린이 찰랑이는 밝은 금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전 내일부터 시에나에서 가장 잘나가는 살롱을 하나씩 돌아다닐 예정이랍니다. 그러니 슬슬 시내에 잡아둔 숙소로 돌아가야겠어요.”
로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티스가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으니, 제가 숙소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야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로즈, 정말 고마워요. 조심해서 가요.”
“오스칼도 잘 자요.”
오스칼이 로잘린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로잘린이 생긋 마주 웃더니 오스칼을 끌어안듯 바짝 가깝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 레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잘린이 그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오스칼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오스칼, 방문 꼭 잠그고 자요.”
***
로잘린이 시에나에 머무는 몇 주 동안, 마티스는 내내 상기된 얼굴이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로잘린 영애의 곁에서 경영 수업을 받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잘린은 오전에는 기사단의 업무를 돕고, 오후에는 시에나의 사교계에 눈도장을 찍으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북부에서 온 영리하고 아리따운 영애는 예상대로 사교계의 환영을 받았다. 그녀는 뤼미에르 기사단에서 그 누구보다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요즘 사교계는 온통 아르투아 대공저에서 열릴 파티 얘기밖에 없어요. 발사자르 공자의 사교계 데뷔 무대 말이에요. 갑자기 등장한 미혼 왕족이라니, 부인들의 신경이 온통 집중될 만하죠.”
로잘린이 어깨에 두른 두툼한 숄을 내려놓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내려놓은 숄에서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묻어났다.
최근 시에나 사교계의 가장 큰 화두는, 발사자르 공자의 이름으로 열리는 무도회에 누가 초대되었고, 어떤 드레스를 입고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유례없이 성대하게 열리는 무도회는 뭇 귀족들의 기대를 잔뜩 받았다.
검투대회에서 창피를 당한 이후, 아르투아가 압도적으로 화려한 파티를 열어 체면을 세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로잘린의 입에서 발사자르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오스칼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로즈. 그런데…. 설마 로즈도 발사자르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죠?”
“제가요? 발사자르 공자의 소문을 안다면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갈걸요. 그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살롱에 파다해요. 사교계에 데뷔도 하기 전에 벌써 갈아치운 여자가 몇이라더라….”
로잘린이 혀를 내밀고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오스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역시 로즈라면 그 작자의 진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았어요.”
“게다가 발사자르 공자 덕에 후원회를 잡기가 어려워졌어요!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니까요.”
로잘린이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댔다. 후원회에 관심을 보이는 귀부인들은 꽤 많았지만 그들의 신경이 온통 무도회에 쏠려 있으니, 당분간 후원회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오스칼이 로잘린을 토닥였다.
“로즈는 지금도 충분히 기사단에 큰 힘이 되고 있어요. 그러니 후원회를 열지 못하게 되어도 괜찮아요.”
“음, 하지만…. 전 ‘로잘린 노이어’잖아요?”
로잘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스칼이 무슨 말인가 싶어 로잘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오늘 제가 대어를 낚았죠.”
“대어요?”
모든 것은 깜짝 소식을 전하기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듯, 로잘린이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네! 익명을 요구한 아주 부유한 부인인데, 제라드 작가님의 열렬한 팬이래요. 후원금은 얼마를 내도 좋으니, 제라드 작가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셨어요.”
로잘린이 회심의 눈빛으로 귀부인이 내겠다고 한 후원금 액수가 적힌 종이쪽지를 오스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쪽지에 쓰인 ‘0’의 개수를 헤아리던 오스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 제라드…. 정말 성공했네요.”
오스칼이 혀를 내둘렀다. 최애와의 만남에 이 정도 플렉스 할 수 있는 재력이라니. 덕중의 덕은 성덕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로잘린은 기쁜 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귀부인이 정한 날짜가 발사자르 공자의 파티 당일이지 뭐예요! 시에나의 귀족 중 그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는 귀족이 있었다니, 정말 잘됐죠. 후원회를 더욱 은밀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됐어요.”
“모든 귀족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무도회라면서요. 로즈는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조심스러운 오스칼의 질문에 로잘린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흥. 북부 귀족은 아무도 초대받지 못했어요. 철저하게 시에나의 세력가 위주로 초대했대요. 물론 저는 그런 무도회에 관심도 없지만요.”
“안 가는 게 이득이에요. 발사자르가 로즈에게 추근거리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거든요.”
호색한인 발사자르가 로잘린을 본다면 틀림없이 그럴 테지.
오스칼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로잘린이 생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북부의 윈터가드 후작영애는 상심이 큰가 봐요. 에르네스트 대공도 이번 무도회에 초대받았다고 해서 영애의 기대가 컸거든요.”
“에, 에르네스트 대공이요?”
뜻밖의 맥락에서 등장한 에렌의 이름에 오스칼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로잘린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에르네스트 대공은 북부에서도 미남으로 꽤 유명해요.”
“그가 발사자르의 무도회에 초대받았대요? 사이가 나쁜 줄 알았는데….”
“그런 파티에 왕족이 한 명도 참석하지 않는 건 큰 불명예랍니다. 발사자르 공자가 수확제의 일로 마음이 상했겠지만, 형식적으로라도 대공을 초대할 수밖에 없었겠죠.”
로잘린의 설명에 오스칼이 눈을 굴렸다. 발사자르의 무도회와 에렌이라…. 이거 어쩌면?
오스칼이 무엇인가 떠오른 듯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로즈,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 우린 내일 또 만나요!”
“이 시간에 외출을요? 내일 일찍 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로잘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오스칼을 만류했다.
“급한 일이거든요! 로즈의 에스코트는 마티스에게 부탁해 놓을게요!”
그 말을 남긴 오스칼이 문을 박차고 저녁 어스름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에르네스트 대공저의 집무실은 대낮처럼 밝았다.
에렌은 반들반들한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고급스러운 금장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렸다. 내일 있을 라인하트 은행장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데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에렌의 손끝에서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만년필이 회전을 멈추었다. 그가 빳빳한 종이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오스칼’
그가 만년필을 쥐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헝클어뜨렸다. 요즘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모든 생각의 끝에서 그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가 생각해도 중증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오스칼의 모습이 어땠더라.’
에렌이 고개를 들어 천장 벽에 새겨진 복잡한 무늬를 멍하니 응시했다.
인쇄소를 폐쇄한 이후부터는 오스칼을 볼 일이 요원했다. 핑계 없이는 그녀를 만날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궁색했다. 한집에 살면서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는 칼릭스에게 질투가 났다.
똑똑-
그가 불쾌한 듯 눈을 치켜떴다. 달칵,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에렌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저녁 시간 이후엔 날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물론, 그렇게 말씀하셨죠.”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알랭은 어딘가 언짢은 얼굴이었다. 에렌이 노집사의 무례에 기가 막힌다는 듯 투덜거렸다.
“하! 다른 사용인도 아니고. 자네였나? 저녁 시간 이후엔 집무실에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내 지시를 잘 알면서 왜 그래?”
“글쎄요. 주인님을 잘 아는 저니까, 타박을 하실 걸 알면서도 이 시간에 굳이 찾아온 거겠지요.”
어딘가 빈정거리는 투였다. 집사의 불손한 태도에 에렌이 눈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스칼 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저 문밖에요.”
“뭐…? 뭐라고? 자네 농담하는 건 아니지?”
“제가 왜 그런 농담을 하겠습니까?”
알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아한 마호가니 의자가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알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 보십시오. 지시하신 대로 방문객을 돌려보냈다면 화내셨을 거잖습니까.”
“알랭, 이거 혹시 꿈이야?”
에렌이 늘 상상만 하던 일이었다. ‘보고 싶다.’라고 말하면 그녀가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나는 것.
오늘 라인하트의 신에게 어떤 기쁜 일이 있었기에 제게 이런 은혜를 베푼 것일까?
알랭이 허둥지둥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에렌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에렌은 벽에 걸려있는 거울 앞에 다가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느라 법석을 떠는 중이었다.
“오스칼 님을 방으로 들일까요.”
“자, 잠깐. 5분, 아니 3분만 기다려줘.”
“그렇게까지 단장하지 않으셔도 주인님은 충분히 매력적이십니다. 그냥 1분이라도 더 빨리 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알랭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충고를 건넸다. 에렌이 그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얼른 들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에렌이 뛰다시피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알랭이 문을 활짝 열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지요.”
열린 문 바깥으로 빼꼼, 오스칼의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에렌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띤 채 오스칼을 맞이했다.
“세상에, 그대가 날 찾아오다니!”
“오랜만이에요. 여전하시네요. 에렌 경…. 아니 대공 전하.”
여전히 그 호칭이 익숙하지 않다는 듯 오스칼이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에렌이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그의 반짝거리는 금발처럼 눈부신 미소였다.
“하하, 대공전하라니. 그대는 날 그냥 에렌이라고 부르면 돼.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야?”
“사실 전하를 만나려면 인쇄소 말고 어딜 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에르네스트 대공저라고 하니 찾기가 쉽던데요?”
오스칼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에렌은 지금껏 그가 오스칼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 새삼 머쓱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대를 내 집에서 보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에렌이 자연스럽게 오스칼을 에스코트해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는 문가에 서 있는 알랭을 향해 말했다.
“지금 주방장이 깨어 있을까? 달콤한 것들을 좀 내어오라고 하면….”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알랭이 이미 주방은 마감이라고 단호한 대꾸를 하려는 찰나, 오스칼이 먼저 두 손을 내저어 사양했다.
“하하, 맞아. 지금은 좀 늦었지?”
웃음이 떠나질 않는 에렌의 얼굴에 오스칼이 피식 웃었다. 그는 어쩐지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오스칼이 이 시간에 제 집까지 찾아와 할 부탁이라니.
에렌의 푸른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오스칼이 지금은 대답하기 어렵다는 듯 알랭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눈치챈 에렌이 손짓해 알랭을 밖으로 내보냈다.
둘만 남게 된 것을 확인한 오스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발사자르의 무도회에 절 파트너로 데려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