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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80)화 (80/138)

80화



 

왕국민들은 새로운 수확제 영웅의 탄생에 열광했다. 레오에 얽힌 과거사 역시 그의 영웅담으로 추가되기 딱 좋은 것들이었다.

몰락한 공작가의 마지막 후손, 혹독한 북부를 지킨 자, 그리고 왕국민을 위해 싸우는 기사단의 단장.

벌써 몇몇 신문사에서는 제라드의 소설과 실제 역사를 비교하는 특집 기사까지 내놓았다.

왕국에는 칼릭스 공작가에 대한 동정 여론이 퍼지고, 무능한 국왕과 그의 곁에서 국방을 주무르며 호의호식하는 아르투아에 대한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기사단원들은 검투대회를 직관하지 못한 것에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레오를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에르네스트 대공의 기사로 검투대회에 나선단 사실을 왜 말 안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봤다는 단장님의 우승 장면을 저희가 못 본 게 말이 됩니까!”

“여동생이 평소엔 절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절 존경한다며 쿠키를 구워주지 뭡니까. 제가 소속된 기사단이 칼릭스 님의 기사단이었냐면서요!”

과연 뤼미에르 기사단의 명성은 하루하루 치솟고 있었다. 치솟는 명성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기사단 일 덕분에, 오스칼은 가까스로 혼란스러운 감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오스칼의 마음은 읽다가 펼쳐놓은 책처럼 여전히 같은 페이지에 머무른 채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오늘도 기사단에 입단하고 싶다는 청년이 다섯 명이나 찾아왔어.”

마티스가 불평하는 건지, 자랑하는 건지 모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마티스가 오스칼과 잠깐 짬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기사단원들이 쉼 없이 그를 찾았다.

“부단장님, 국경 근처 영주들에게서 토벌 임무 의뢰 서한도 계속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회신할까요?”

“부단장님, 이거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부단장님, 이번 정기 훈련은 어떻게 진행할까요?”

몰려드는 일에 지친 마티스가 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사단이 작았을 땐, 혼자서도 거뜬했는데 말이야. 이젠 내가 기사인지 행정관인지 모를 지경이야. 난 현장에서 뛰는 게 체질인데.”

“그래서 이런 일에는, 전문가가 필요한 법이야.”

마티스가 들고 있는, 숫자가 빼곡한 서류를 흘끔 바라본 오스칼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티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스칼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문가라니?”

“아마 오늘쯤 도착할 거라고 했는데.”

“오스카알!”

입구에서부터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뿐한 발걸음 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문이 벌컥 열리고 아름다운 자태의 마드모아젤이 웃음을 띤 채 달려와 오스칼을 끌어안듯 손을 마주 잡았다.

“꺄아! 오스칼.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답니다.”

“로즈!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오스칼이 로잘린을 맞이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어. 로, 로잘린 영애 아니십니까.”

로잘린의 등장에 마티스가 자리에서 허둥지둥 일어나 말을 더듬었다. 다시 만난 영애는 여전히 아찔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마티스 경, 그간 잘 지내셨지요?”

그제야 오스칼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챈 로잘린은 마티스에게 예를 갖추어 품위 있는 인사를 건넸다. 그 우아한 모습에 마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예, 영애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오스칼 경이 제게 기사단 운영에 도움을 주기를 요청하셔서 한달음에 달려왔답니다.”

담백하게 대답한 로잘린이 다시 한번 생긋 웃었다. 꽃 내음이 날 것 같은 미소에 말문이 막힌 마티스가 무슨 말인가 싶어 입을 벌리고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로즈는 검증된 훌륭한 영지 경영인이잖아? 기사단 운영에 조언을 얻을까 편지를 보냈는데, 직접 와서 방법을 전수해 주겠다지 뭐야. 우리야 영광이지, 전문경영인의 손길이라니!”

“아이, 참, 오스칼은 항상 절 과분하게 칭찬해주신다니까요.”

칭찬을 들은 로잘린의 뺨이 핑크빛으로 상기되었다.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인데요, 뭘. 흔쾌히 와줘서 고마워요. 로즈에게 경영 노하우를 배우면 기사단의 사정도 한결 나아질 거예요.”

“오스칼에게 도움이 된다니 기뻐요! 그리고 제가 들으면 깜짝 놀랄 좋은 소식도 갖고 왔답니다. 그럼 기사단 살림부터 먼저 들여다볼까요?”

미처 겉옷도 벗지 않은 로잘린이 의욕을 불태우며 팔을 걷어붙였다.

***

외출에서 돌아온 레오의 미간이 뜻밖의 얼굴을 보고 좁아 들었다.

“로잘린 영애…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스칼이 제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로잘린이 눈을 접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의 미간이 조금 더 좁아졌다.

“노이어 영지 일이 그다지 바쁘지 않으신가 보군요.”

“바빠도 오스칼이 절 원한다면 달려와야 하지 않겠어요? 레오나르도 칼릭스 경.”

“제 이름은 레오폴드 칼릭스입니다만.”

“아, 이런. 오스칼이 경을 ‘레오’라고 부르는 것만 기억하고 있어서요. 말씀하신 대로 제가 경의 성함까지 기억할 만큼 한가하진 않답니다.”

로잘린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응수하자, 레오의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에헤이. 거 참,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른 인사들 나누시고, 식사부터 하시죠!”

오스칼이 손을 휘휘 저어 두 사람 사이의 열기를 흩어 놓았다.

뤼미에르의 응접실에는 로잘린을 환영하는 만찬이 마련되었다. 좁은 식탁 덕에 한정된 인원만 참석한 식사에는 레오와 마티스 외에도 뜻밖에 제라드가 초대되었다. 그는 초대받지 못한 뭇 기사단원들의 부러움을 잔뜩 받았다.

“제가 제라드 작가님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아하핫, 영광입니다.”

새콤달콤한 과일 소스에 절인 돼지고기 튀김을 썰다 말고 제라드가 헤벌쭉 웃었다.

“제라드 작가님의 소설은 노이어에서도 인기랍니다. 영지의 여인들이라면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죠. 역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남자 노예 화가가 망나니 남자 귀족이랑….”

“흠흠, 로즈. 그 얘긴 나중에 따로 할까요?”

으깬 감자를 입으로 밀어 넣던 오스칼이 황급히 로잘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제라드의 19금 남색 소설이 최애작이라니, 생각보다 로잘린도 편견 따윈 없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로잘린은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낮에 제가 기사단의 재무상태와 경영상황을 살펴봤는데요, 좋은 소식은 제가 도움 드릴 일이 꽤 있을 것 같다는 거예요. 영지나 기사단이나 운영의 기본 틀은 같거든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총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며 오스칼이 씨익 웃었다.

“역시, 로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정말 든든하네요.”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3년간의 서류를 훑어보시고는 기사단의 현금 흐름과 챙겨야 할 주요 일정을 바로 파악하시더군요.”

마티스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 어린 칭찬에 로잘린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코를 찡그리더니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나쁜 소식은 지금 수준의 재무상태로는 커진 기사단의 규모를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거죠. 최근 기사단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끊어졌더군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제라드의 소설이 판매가 중단되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마티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어느새 제 몫의 접시를 말끔히 비운 로잘린이 앞에 놓인 냅킨으로 입가를 새초롬하게 닦았다.

“제가 아까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고 했죠?”

“그게 뭔가요 로즈?”

식탁에 둘러앉은 청년들의 이목이 로잘린에게 집중되었다. 줄곧 아무 말 없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레오도 로잘린을 흘긋 바라보았다.

“북부 사람들이 수도의 일에 관심이 없다곤 하지만, 사실 레오폴드 경이 왕국 수확제에서 우승한 소식은 북부에서도 꽤 화제였어요.”

“레오 너,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나 봐.”

로잘린의 말에 오스칼이 레오를 바라보며 킬킬거렸다. 로잘린이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다른 것보다, 3년 전 야만족의 침략에서 북부를 구한 영웅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죠.”

로잘린의 말투에 힘이 들어갔다. 마티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가 왕국 기사단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임무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아요. 그때 왕국 군이 북부를 도와 간신히 큰 피해를 막았었죠. 다들 그 영웅들이 후한 대접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니었더군요.”

“대접은커녕 해산만 당했지요. 국왕이 저흴 북부로 보낸 이유도 북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북부에서 죽길 바란 겁니다!”

마티스는 분을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는 모두 경악했어요. 다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번엔 북부가 그 기사들을 도울 차례라고 뜻을 모았어요.”

로잘린의 말에 기사단 모두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드디어 레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북부의 영주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았어요. 물론 작은 영지들이라 큰 액수는 아니지만. 북부를 지키다 희생한 기사들과 북부를 구한 영웅들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거죠.”

로잘린이 전해주는 엄청난 이야기에 오스칼의 표정이 환해졌다.

“세상에! 정말요?”

“제가 북부 영주들을 설득했어요. 자금뿐 아니라, 필요한 곳에 북부 연합군 형태의 병력도 지원할 겁니다.”

로잘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영애께… 뭐라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 레오가 목이 멘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뤼미에르는 노이어를 두 번이나 구해 주신 셈이니까요. 북부를 대표해서, 늦었지만 다시 한번 뤼미에르 기사단께 감사드립니다.”

로잘린이 품위 있는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울컥한 감정이 드는지 마티스의 눈가가 붉어졌다. 오스칼 역시 눈물을 글썽였다.

“로즈,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북부연합에서 약속받은 지원금만으론 어림도 없어요. 결국, 기사단엔 자금 확보를 위한 추가 대책이 필요한 상황인 거죠.”

감동으로 촉촉하게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도 기백을 잃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용병 의뢰를 모두 승낙할 수는 없습니다. 뤼미에르 기사단은 왕국민을 위해 검을 드는 기사들이지, 돈을 받고 용병 일을 하는 용병단이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한 레오 역시 답답한 현실이 막막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로잘린은 레오가 그렇게 대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식탁에 앉은 청년들을 휘- 둘러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덕후는 계 못 탄다는 말이 있죠.”

“예에? 그게 무슨 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식탁에 둘러앉은 남자들은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직 오스칼의 얼굴만이 새빨갛게 변했을 뿐이었다.

“로, 로즈…. 그 말은 제가 그냥 재밌으라고 알려준….”

오스칼이 로잘린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재미 삼아 알려준 문장이었다. 그녀가 그 문장을 정말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오스칼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로잘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뇨, 오스칼. 그건 아주 의미 있는 말이었어요. 그게 앞으로 기사단의 새로운 수입원이 될 예정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결국, 레오조차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닦달하듯 로잘린을 채근했다. 로잘린이 팔꿈치를 식탁에 올린 채 양손을 얼굴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 쥐었다. 기사단을 향한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우린 덕후에게 계를 타게 해줄 겁니다. 물론, 유료로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은 로잘린의 보랏빛 눈동자가 야심 차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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