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78)화 (78/138)

78화



 

“오늘 밤, 나와 함께 보내지 않겠나.”

레오가 평소답지 않게 자신감 없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오스칼을 불렀다. 바로 곁에 서 있는데도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오스칼이 자리에 멈춰서 그의 얼굴을 향해 귀를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뭐라고?”

“오늘 밤에, 흠, 같이 시간을, 크흠 보내자고.”

그는 고작 몇 개의 단어를 말하는데 헛기침을 두 번이나 했다.

“오늘 밤? 투구라도 함께 닦자는 거면 사양이야! 난 투구도 없다고.”

“그게 아니라…. 밤엔 광장에서 야시장이 열리는데…. 혹시… 불꽃놀이 같은 거 좋아하나 싶어서.”

그는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 마른침을 삼켰다. 레오의 입에서 나온 생경한 단어에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투구 닦기나 훈련이 아니라 야시장의 불꽃놀이라고? 설마, 지금 레오가 나와 축제를 같이 구경하자는 건가?

〈여기사 오스칼〉 원작 속 설정에 따르면 수확제의 검투대회가 끝난 뒤,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내심 오스칼은 소설 속에서만 보던 축제의 야시장이 궁금하던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로판의 꽃’ 아닌가!

하지만 레오라면 그런 북적거리는 행사 따윈 질색할 게 뻔했다. 그런 걸 구경할 시간에 투구라도 하나 더 닦고 싶어 할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축제 구경을 제안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었는데….

오스칼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너 혹시, 오늘 밤에 같이 축제를 구경하자는 얘기야?”

“네, 네가 가고 싶다면….”

오스칼의 눈이 크게 휘어졌다. 그리고는 입을 벌려 웃었다.

“하하하, 레오 너 생각 외로 이런 이벤트를 챙기는 타입이었구나? 넌 이런 거에 관심 없을 줄 알았어!”

야시장을 돌아다니는 레오라니.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커다란 근육질 팔뚝으로 검이 아닌 풍선이나 꼬치구이를 들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오스칼의 웃음소리에 레오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 내가 관심이 있다기보다….”

레오가 쑥스러운 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나도 축제는 처음이다. 그냥…. 혹시 너라면 그런 걸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오스칼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던 레오는 오스칼과 제라드가 나누던 대화를 뛰어난 청각으로 모두 들어버리고 말았다. 변명하자면 그저 들려 온 것일 뿐, 엿들은 건 아니었다.

분명 오스칼은 제라드에게 수확제의 야시장과 불꽃놀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자신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소곤거렸었다.

오스칼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냉큼 대답했다.

“응! 당연히 환영이지! 나도 축제는 처음이거든.”

***

오스칼은 한껏 들떠있었다. 음모를 꾸미는 흑막도, 칼릭스 가문이 뒤집어쓴 누명도, 심지어 엔딩을 보고 소설을 탈출하겠다는 목표조차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공연장이며, 노점상이며, 게임 부스며, 어느 것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스칼은 축제로 왁자지껄한 시에나의 광장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레오는 그런 오스칼의 모습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정말 너도 축제에 처음 와보는 거야?”

“이런 건 나와 다른 세계의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아….”

눈치 없는 말을 한 건가 싶어 오스칼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가 살아온 가시밭길 인생을 떠올려보면, 그동안 그에게 느긋하게 축제를 즐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오스칼과 함께 축제에 참가하게 되어 좋았다. 근래 들어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오스칼과 함께였다.

앞으로 인생에서 그가 처음으로 경험했던 일들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오스칼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이 좋았다.

“우리 둘 다 처음이니까, 더 의미 있는 것 아닌가?”

“응! 맞아.”

오스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오스칼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꽤 길어진 연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치 그 웃음소리에서 새콤달콤한 향이 나는 것 같아 레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두 사람은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등불이 걸린 광장을 나란히 걸었다.

오스칼이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 축제의 이모저모를 구경하는 동안에도 레오의 눈은 언제나 오스칼을 향해 있었다.

그에겐 다른 것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축제를 구경하는 오스칼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어느덧 한 노점 앞에 멈추어 선 오스칼이 장난스럽게 레오에게 고갯짓을 보냈다. 오스칼의 시선 끝에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를 잡동사니가 널려있었다. 레오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잠시 뒤, 노점을 찾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오스칼 표정의 의미를 이해한 그가 질겁했다.

“설마, 지금 나더러 저런 걸 머리에 쓰라는 건가?”

“이런 걸 쓰지 않으면, 축제에 제대로 참여했다고 할 수가 없지!”

오스칼이 좌판 위에 대중없이 마구잡이로 늘어져 있는 머리 장식 중 하나를 골라 자기 머리 위에 얹었다. 축제에서 판매하기 위해 급히 만든 티가 나는 조잡한 도깨비 뿔 장식이었다.

그리고 다른 장식 하나를 잽싸게 집어 들더니, 깡충 뛰어올랐다. 오스칼이 땅에 사뿐하게 착지하자, 레오의 머리 위로 무언가 솟아있었다.

“푸하하하! 레오 너 진짜 귀엽다.”

자신의 안목이 퍽 만족스럽다는 듯 오스칼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의 커다란 덩치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보송보송한 하얀 토끼 귀였다. 귀 안쪽의 핑크빛 디테일이 살아있는 사랑스러운 머리 장식은, 적어도 오스칼의 도깨비 뿔보다는 성의 있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흑발의 청년이 토끼 귀를 매달고 있는 광경은 꽤 볼만했다. 그 괴이한 조합에 좌판을 지키고 서 있던 주인장이 간신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자신의 꼴이 어떤지 알아챈 레오가 얼른 제 머리 위의 장식을 떼어냈다. 그의 목덜미가 새빨개져 있었다.

“왜 그래, 잘 어울리는데.”

오스칼의 장난스러운 놀림에, 레오가 발끈하여 제 손에 들린 토끼 귀 장식을 오스칼의 머리에 냅다 올려놓았다.

“으악, 뭐 하는 거야.”

머리 위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오스칼이 낮게 불평을 했다.

레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했다. 이번에는 제가 오스칼을 비웃어 줄 차례였다. 그의 눈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끔찍하게도 잘 어울렸다.

작고 동글동글한 머리통 위에 얹은 보드라운 토끼 귀는, 마치 처음부터 오스칼의 머리에서 자라고 있던 것이라 해도 믿을 것처럼 찰떡같이 어울렸다. 그 모습이 당황스러운 듯 레오가 입을 뻐끔거렸다.

저 말갛고 예쁘장한 얼굴, 봄 들판 같은 연두색 눈동자, 보드랍게 바삭거리는 갈색 머리, 그리고 거기에 매달린 하얀 토끼 귀라니!

그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멀거니 아찔한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던 레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곤 허겁지겁 오스칼의 머리 장식을 떼어내 판매대에 내려놓았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북적이는 광장에서 남들에게 다 보이게 내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가 심호흡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바, 방금 그건 좀 아닌 것 같군.”

그가 말까지 더듬어가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이건 어때?”

오스칼이 까치발을 하고는 알록달록한 꽃으로 엮은 화관을 레오의 머리에 갖다 댔다.

“네 녀석은 내 체면을 다 깎을 작정인가.”

레오가 짐짓 부루퉁한 표정을 해 보였다. 그 표정이 재미있는지 오스칼이 킬킬거렸다.

결국, 두 사람은 한참의 옥신각신 끝에 오스칼은 도깨비 뿔, 레오는 사자 귀 장식을 쓰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들이 떠나자 노점의 주인장은 질려버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머리 장식을 쓴 뒤로 조금 더 들뜬 기분이 되었다.

마음이 들뜬 만큼 발걸음이 더 빨라질 줄 알았건만, 마음이 한 뼘씩 떠오를수록, 걸음은 한 발자국씩 늦어졌다. 흙바닥에 나란히 새로 생기는 발자국마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문장들을 하나씩 공유했다.

레오가 돼지고기보다는 양고기를 좋아한다는 것. 라즈베리는 시큼해서 싫어한다는 것.

어릴 때부터 머리는 혼자 다듬었기 때문에 지금도 머리는 직접 자르는데, 그 실력이 꽤 수준급이라 기사단원들의 머리를 손질해 줄 때도 있다는 것.

오스칼은 고기라면 다 좋아하지만, 돼지 발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 귀신을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한다는 것. 베개가 없이는 못 잔다는 것.

그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두 사람은 내내 웃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광장엔 완연한 어둠이 번졌다. 늦가을의 밤은 어제보다 오늘 더 빨리 찾아왔다. 어느새 온통 깜깜해진 광장을 등불의 반짝거리는 불빛이 가득 채웠다.

“푸에이취!”

쌀쌀해진 공기에 오스칼이 요란스러운 재채기 소리를 냈다. 오스칼은 소녀 같은 인상과는 달리, 뜻밖에 아저씨 같은 구석이 있었다.

“넌 몸에 붙은 살이 없어서 그렇게 추위를 잘 타는 거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온기가 오스칼을 감쌌다. 레오의 커다란 재킷이 오스칼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늦가을의 공기가 더는 춥지 않았다. 오스칼이 발그스름해진 코를 한번 문지르더니 볼멘소리를 했다.

“흥, 기사가 보온이 될 정도로 살이 붙으면 큰일인 것 아냐?”

“그렇다고 해도, 넌 너무 말랐으니까.”

매번 그의 곱절은 더 먹는 거 같은데, 살이 붙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비실비실한 몸은 아니지만, 여전히 기사라기에는 여윈 체구였다.

매번 다른 사람들 일에 오지랖을 부려 발발거리며 쫓아다니니까 살이 찔 새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게 이렇게 네 옷을 주면 넌 안 추워?”

“난 너와 달리 온몸이 근육질이거든.”

“쳇.”

재수 없지만 백 퍼센트 맞는 말에 오스칼이 분한 듯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레오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몰래 키득거렸다.

오스칼과 함께 있으면 추운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오스칼이 웃을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제게 따스한 온기가 밀려들었다.

오스칼이 금세 뭐라고 또 조잘거릴 줄 알았는데 고요했다.

“오스칼?”

오스칼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린 레오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오스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