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레오와 에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일었다. 레오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와 저는 아르투아 대공과 잔느를 막아야 하는 이유도, 목적도 다릅니다. 그러니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다르다니?”
“그들이 꾸미는 음모 때문에 왕국민이 폭정과 침략, 그리고 이교도의 범죄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전 그것을 막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왕실의 일원이 아닙니까.”
“왕실의 일원은 왕국민에게 관심이 없을 거란 뜻인가? 나도 왕국민이 고통받는 걸 바라지 않아.”
에렌의 표정이 굳었다. 레오가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군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르투아는 물론, 현 국왕도 좋은 군주가 될 자들이 아닙니다. 선왕과 국왕은 충신을 내치고, 국정을 팽개쳐 왕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배후에 아르투아가 있었다고 한들, 그런 사실조차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왜 나와 협력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건가.”
“바로, 전하께서 왕실의 핏줄이자, 왕위 계승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에렌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가 손을 모아 엄지와 검지 사이를 주물렀다. 그는 레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전하께서 이 일에 나선 까닭이 아르투아를 저지하고 핏줄인 국왕을 지키는 것이라면, 폭군의 안위를 위해 기사단을 희생시킬 순 없습니다.”
“국왕을 지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하면?”
“그 말씀은 곧 아르투아 대공과 국왕을 제거하고 전하께서 왕좌에 오르는 것에 협력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기사단을 반역자로 만들 순 없습니다.”
에렌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역시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었다. 처음엔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를 쫓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추악한 왕실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충신을 견제해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숙청한 제 아버지, 왕좌에 집착해 흑마법에 세뇌당한 형, 충신의 가면을 쓰고 왕위를 탐내 온 숙부까지.
아르투아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만약 제 손으로 왕실의 과오를 낱낱이 밝히고 국왕을 끌어내린다면, 늘 형님이 의심했던 대로 결국 자신은 왕좌를 탐낸 자가 되고 마는 것일까.
“그럼 잔느와 아르투아의 악행을 알고서도 자네는 그냥 구경만 하겠단 건가?”
“왕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설 겁니다. 그러나 전하의 검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에렌이 천천히 눈을 들어 레오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나와 협력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정말 그것뿐인가?”
“전하께서 기사단에 이유 없는 호의를 보이시는 것 역시 부담스럽습니다.”
에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 부러 여유 있는 얼굴을 했다.
“기사단이라니, 말은 바로 하지. 난 자네 기사단에 호의를 보인 적 없어.”
힘주어 꾹 다문 레오의 입술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에렌은 턱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는 레오를 바라보며 설핏,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유 없는 호의가 아니야.”
묵묵히 곧은 자세로 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던 레오가 번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주친 푸른 눈동자가 심연처럼 깊었다. 어느새 두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게 무슨….”
“오스칼을 좋아하거든. 내가.”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레오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내가 오스칼을 좋아한다고. 이제 이유가 됐나? 오히려 자네야말로 고작 기사단 동료면서 이유 없이 오스칼에게 관심이 많은 것 아닌가?”
차분하지만 묘한 우월감이 깃든 목소리였다. 레오는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오스칼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면서,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턱이 딱딱하게 솟아오를 정도로 이를 악다물고 있던 레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게 오스칼은 기사단 동료가 아닙니다.”
레오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그 눈빛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에렌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저도… 좋아합니다. 오스칼.”
두 남자 사이에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여유를 가장하던 에렌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고지식해 보이던 레오가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에렌의 얼굴이 굳었다.
“그 녀석이…. 남자인데도? 오스칼은 남색가가 아니야.”
마른침을 삼키는 에렌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알고 있습니다. 오스칼에게 무리해서 제 마음을 보일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담담하지만 곧은 그의 목소리가 에렌의 마음을 찔렀다. 커다란 벌레 한 마리가 자신의 배 속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에렌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누군가 자신을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었다.
이윽고, 에렌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그러니 자네 역시, 마음을 보이지 않겠다는 그 말을 반드시 지키길 바라지.”
“오스칼에게 상처 줄 생각은 없습니다.”
레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성큼성큼 방을 돌아 나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에렌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에렌이 레오를 바라보던 오스칼의 반짝거리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칼릭스가 오스칼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에렌이 피가 나도록 자신의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오스칼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두 사람은 영원히 몰랐으면 해.”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명예나 체면 따위가 아니었다.
***
오스칼은 경기장 바깥 한쪽 벽에 기대서서 레오를 기다렸다.
기사단이 북부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니.
관중석에서 바라본 레오의 넓은 등에는 고뇌와 회한이 서려 있었다. 눈밭에 쓰러진 동료를 그대로 두고 떠나며 그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험지를 돌며 위험을 무릅써온 그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목숨을 걸고 동료를 위해 싸웠고, 곤경에 빠진 이들을 지켜냈다.
그의 부모도, 그도 왕실에 배신당했지만, 결코 그는 왕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늘 왕국민을 위해 몸을 내던졌으니까.
그의 곧은 신념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리고 울렁거렸다. 오스칼이 야릇한 기분을 부정하듯 세차게 도리질했다.
“이건 훌륭한 기사에 대한 존경심이야. 동료애라고!”
늦가을 햇살에 돌벽이 달구어졌던지, 벽에 기댄 등이 따끈따끈 달아올랐다. 그때 저쪽에서 레오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금 전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레오!”
오스칼이 환한 얼굴로 레오를 반겼다. 굳어 있던 레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내내 여기서 날 기다린 건가?”
“당연하지! 검투대회의 우승자인데, 예를 갖춰 맞이해야 하지 않겠어? 오늘 너 진짜 멋있었어!”
오스칼은 연신 엄지를 치켜세우며 그를 향해 웃었다. 평소보다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어대는 오스칼의 모습에 레오가 선선하게 웃었다. 모든 근심, 걱정이 오스칼의 옆에서는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자가 네게 손찌검했던 걸 생각하면, 더 거세게 몰아붙였어야 했다.”
레오가 오스칼의 뺨에 남아 있는 희미한 멍 자국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에 오스칼의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오스칼은 어색하게 얼른 다시 칭찬을 이어갔다.
“오늘, 네 검술은 하나의 예술이었어. 어떻게 검을 그렇게 사용할 수가 있어? 아까 드레이코 놈의 허점을 파고들어서 단번에 검을 갈기는 모습은…! 이야, 내 속이 다 시원했다니까?”
오스칼은 요란한 손짓과 함께, 팔불출처럼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칭찬하며 검투대회의 소감을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레오의 광대가 슬그머니 솟았다.
“게다가 그놈은 네 아버지를 음해한 자잖아! 마지막 일격은 진짜 좋았어!”
쿵!
마지막 단어에서 연상된 문장에 레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도…. 좋아합니다. 오스칼.”
천진한 얼굴로 재잘거리는 오스칼의 얼굴 위로, 그가 에렌 앞에서 지껄인 문장이 둥실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련만, 창피해 어디론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제 생각으로부터 도망치듯이, 손바닥을 눈가에 올려 시야를 가렸다.
“레오, 갑자기 왜 그래? 혹시 어디가 안 좋아?”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는 레오를 향해 오스칼이 걱정이 담긴 물음을 던졌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 목소리가 좋아서 그는 또 한 번 괴로워졌다.
‘좋아한다.’라는 감정은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또렷해지고,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불어나는 감정인 것 같았다.
레오가 황급히 이마에서 손을 떼고는 좌우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차마 어디가 안 좋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그렇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다행이고. 아까 안에서 에렌 경… 아니 대공과는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두 사람이 피차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할 사이는 아닌데. 오스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레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둥실 떠올라 있던 기분이 다시 현실로 가라앉았다.
“더는 기사단이 그와 얽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아.”
오스칼이 자조 섞인 신음을 흘렸다. 그동안 정신없이 사건이 휘몰아쳐 잊고 있었지만, 에렌의 정체가 왕족이라면 레오의 판단이 옳았다. 오스칼이 굳은 표정의 레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네 말이 맞아. 우리 때문에 그 사람도 아르투아에게 불리한 패를 보였고, 기사단이 왕족 간의 왕위 다툼에 끼어드는 듯한 모양새는 좋지 않겠지. 우린 우리대로 그들을 쫓으면 돼.”
“네 생각도 그렇다니 다행이군.”
레오는 오스칼이 그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아 기뻤다.
“물론… 앞으로 기사단의 운영 자금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이내 오스칼이 말끝을 흐리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꽤 늘어난 기사단의 인원 탓에 점점 기사단의 운영도 복잡해지고 있던 터였다.
“이런.”
그제야 레오가 뭔가를 깨달은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책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투대회 우승 상금을… 그렇게 사용하지 말 걸 그랬군.”
“아냐. 넌 옳은 일을 한 거야. 그리고 우승상금은 네가 원하는 대로 써야지! 기사단의 자금은… 어떻게든 되겠지 뭐.”
오스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미소에 레오의 목덜미가 다시 붉어졌다.
“이제 슬슬 뤼미에르로 돌아가자. 네 검투대회 참가 소식이 기사단에 벌써 소문이 쫙 났을 거야. 마티스의 표정이 기대되는데?”
오스칼이 크게 기지개를 하며 제 곁에서 걷던 레오를 문득 바라보았다. 그는 왜인지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였다. 오스칼이 눈을 가늘게 떠 그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저…. 오스칼.”
“응?”
“혹시…. 오늘 밤에 시간 있나?”
“그건 왜?”
“오늘 밤, 나와 함께 보내지 않겠나.”
속삭이는 듯한 그의 낮은 음성에 오스칼이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