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레오와 드레이코의 검이 공중에서 거세게 맞물렸다.
카캉-!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레오의 검날이 분노로 타올랐다. 드레이코는 거센 공세를 교묘하게 흘려보냈다. 상대를 도발해 실수를 이끌어 내려는 계략이었다.
드레이코가 번뜩 옆구리를 찔러왔다.
홱!
레오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검을 피했지만, 분명 완벽했던 그의 검격에도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뜻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에 드레이코가 다시 한번 이죽거렸다.
“버림받은 기사단이라니, 네 놈의 허접한 실력과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
사악-
레오가 사납게 휘두른 검이 빗나가 드레이코의 귓가를 스쳤다. 드레이코의 눈이 간교하게 빛났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파고들 틈이 보일 것 같았다.
“네 주위 사람들은 네놈 때문에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거다. 내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던 그 건방진 오스칼이란 놈부터 손 봐주지. 그 이름부터 불쾌하거든.”
드레이코의 입에서 나온 오스칼의 이름에, 그를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드레이코에게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오스칼의 모습과,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교활하게 웃으며 불같은 공격에 대비하려던 드레이코가 어딘가 달라진 레오의 분위기에 멈칫거렸다. 검을 쓰는 자라면 모를 수 없었다. 레오를 휘감은 분위기와 검기는 그 어느 때보다 위압적이었다.
드레이코의 피가 식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가 초조하게 숨을 삼켰다. 들이마신 숨을 미처 내뱉기도 전에, 레오의 검이 눈앞에 번뜩였다.
채앵-
드레이코는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검을 막아냈다. 검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척에 닿는 거리에서 레오의 눈동자가 드레이코를 꿰뚫듯 응시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드레이코의 등이 오싹해졌다.
그 눈은 자신이 파멸로 몰아넣었던 남자의 것과 똑 닮아 있었다. 세월을 관통한 끔찍한 기시감에 드레이코의 검이 무너졌다.
레오의 날카로운 눈은 드레이코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단번에 검을 내질렀다.
쨍그랑-
드레이코의 검이 땅으로 떨어지며, 그가 그대로 땅에 굴렀다. 땅에 처박힌 드레이코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마침내 결정된 승부에 관람석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관람석 한편에서부터 시작된 술렁임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와아아-!
순식간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새로운 우승자의 탄생에 관객들은 흥분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멍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오스칼이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뺨에는 홍조가 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경기를 지켜본 바로는 드레이코 역시 꽤 실력자였다. 그러나 드레이코를 상대하는 레오는 넋을 잃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와, 정말 대단한데? 근위대장을 이기다니!”
“역시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가 지금까지 몸을 낮추고 있던 거였어.”
대회의 승리자가 된 레오와 에렌을 향한 관중들의 환호에 아르투아와 발사자르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아르투아는 드레이코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발사자르 역시 에렌에게 형편없이 패배하고 말았다는 현실을 부정하듯 발을 구르며 씩씩거렸다.
흙바닥에 얼굴이 처박혀 얼룩덜룩 멍이 들고 피부가 까진 드레이코는 망연자실한 채 경기장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었다.
에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껏 기세등등하던 자들이 경기에 처음 참여한 그와 레오에게 밀려 이토록 창피를 당했으니, 세 사람 모두 수치심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가 짐짓 겸손한 척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숙부님. 사촌님. 제 보잘것없는 기사에게 운이 따랐나 봅니다. 아, 물론 드레이코 경도 나이가 들긴 했죠. 검투대회는 그저 축제의 여흥일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길.”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던 아르투아가 몸을 홱 돌려 자리를 떴다. 발사자르 역시 에렌을 한번 쏘아보고는 아르투아의 뒤를 쫓았다.
반면 국왕의 표정은 공포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폐하. 그저 대회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폐하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국왕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에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대체, 저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자리이길래 동생조차 믿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지.
“시, 시끄럽다.”
국왕이 떨리는 손을 붙잡은 채 간신히 대답했다. 그때, 검투대회의 담당 관료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폐하, 검투대회의 우승자가 결정되었으니 관례에 따라 경기장으로 나가 우승자에게 상을 내리셔야 합니다.”
“카, 칼릭스를 눈앞에서 만나야 한다고? 저 반역자가 날 위협하면 어쩌나.”
국왕의 강박증 같은 억지에 관료가 당황한 표정을 했다.
아무렴, 칼릭스가 왕국민과 호위기사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할 만큼 어리석진 않을 텐데. 관료는 호위를 몇 사람 더 붙이겠다는 말로 가까스로 국왕을 설득해 경기장으로 향했다.
“미천한 몸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국왕의 등장에 레오가 기사의 예를 갖추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단정하고 반듯한 태도에 국왕이 마른침을 삼켰다. 칼릭스는 필시 음험하고 무도한 자라고 생각해왔는데, 뜻밖에 눈앞의 남자는 그가 생각한 모습과 달랐다.
생각해보면 국왕은 레오폴드 칼릭스를 직접 마주한 적이 없었다. 오직 아르투아로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다소 마음을 가라앉힌 국왕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관료의 신호에 따라 입을 열었다.
“수확제 검투대회의 우승자, 에르네스트 대공의 기사 레오폴드 칼릭스에게 상금을 하사하노라.”
국왕의 말이 끝나자 관중들이 열렬한 박수로 레오를 축하했다. 시상대 옆에 선 에렌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레오는 그저 담담한 얼굴이었다.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제가 감히 전하께 청할 것이 있습니다.”
국왕이 흠칫 놀라 레오를 응시했다.
“무, 무엇인가.”
“상금은 3년 전 혹독한 추위 속에서 북부에서 싸우다 전사한 왕국 평민 기사단의 유족에게 나누어주십시오.”
뜻밖의 발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저는 ‘버림받은 기사단’의 마지막 전투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3년 전,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전투였다.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 왕국 평민 기사단 소속이었던 그들에게 북방 경계선에서 남하하려는 야만인들을 토벌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보급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출정을 나간 그들은 생사의 선을 넘어 3개월 만에, 겨우 삼 분의 일만이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조차 기적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적들을 베던 레오가 없었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전투였다.
그리고 간신히 국경을 지켜내고 돌아온 그들 앞에 놓인 것은 기사단의 해산 소식이었다. 그들이 북방에서 몰살당하리라 여긴 왕실에서는 이미 기사단을 없애버린 뒤였다. 덕분에 그들은 제대로 봉급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지듯 쫓겨났다.
“그때 저는 수많은 동료를 잃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약탈자들로부터 왕국을 지켰습니다만, 지금 그들을 기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국왕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전하께서 그들에게 존중을 보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는 거센 눈보라 속에서 그들의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청명한 목소리에서 올곧음이 느껴졌다. 경기장에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세상에 그런 일이…?”
“3년 전 야만족 대습격 때 북방을 지킨 기사가 칼릭스였나요?”
“그런 자들을 외면하다니! 국방 담당은 아르투아 대공 아닌가.”
관람석 곳곳에서 웅성대는 목소리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레오를 내려다보는 국왕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건 나, 난 잘 모르는 일이야. 기사단 일은… 전적으로 아르투아 대공이….”
국왕이 웅얼거리던 말을 삼켰다. 그는 사실 그런 일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하는 일 없이 봉급만 축내는 평민 기사단을 해산해야 한다는 아르투아 대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뿐이었는데.
“폐하, 그 일은 따로 소상히 알아본 후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관료가 황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수신호를 받고 헐레벌떡 달려 나온 시종장이 국왕을 부축해 사라지자, 레오는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멀리 오스칼의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그는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오스칼을 단번에 찾아냈다. 경기가 시작된 후 줄곧 날카롭던 그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그가 오스칼을 향해 미소 지었다.
“뭐야,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날 찾은 거야? 저렇게 멀리 있는데?”
레오와 눈이 마주친 오스칼이 깜짝 놀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귀만 밝은 줄 알았더니, 시력마저도 좋은 모양이었다. 쑥스러운데도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오스칼이 그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잘! 했! 어!”
양 손바닥을 입에 대고 확성기처럼 만든 오스칼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 모습에 레오가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국왕이 떠난 뒤에도 경기장에 남아 있던 에렌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초조한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목 안쪽이 답답해졌다. 목을 감싸는 화려한 옷깃을 차갑게 식은 손끝으로 두어 번 잡아당긴 에렌이 입을 열었다.
“잠깐 날 따라오지.”
***
에렌이 이끈 곳은 경기장과 연결된 왕실 전용 내빈실이었다.
에렌은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푹신한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묻은 채 레오에게 자리를 권했다. 레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반듯한 자세로 에렌과 마주 앉았다.
“자네 실력을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 대단하더군. 정말 우승을 하다니.”
“대공 전하께 빚은 꼭 갚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조금의 빈틈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에렌이 피식 웃었다.
“어쨌든 계산은 확실하군. 덕분에 그자들에게 한 방 먹였어.”
“그렇습니까.”
레오가 높낮이가 없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에렌이 가만히 레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국왕 알현 때 올린 청은…. 미리 준비했던 건가? 사실 나도 그런 사정이 있었던 건 몰랐어.”
“항상 생각해 오던 일입니다. 그간 상황이 좋지 않아 돕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늘 일로 아마 자네에 대한 여론에도 변화가 있겠지. 그 소설도 한몫할 테고. 어쩌면 오스칼이 처음부터 계획한 일일지도 모르겠군.”
에렌이 흘긋 레오를 바라보았다. 에렌의 입에서 나온 오스칼의 이름에,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다.
“오스칼이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는지는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맞아. 그건 기사단과는 별개로 오스칼이 개인적으로 ‘나’와 함께하는 일이니까.”
에렌이 레오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의 의도적인 단어 선택에 레오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것 역시 오스칼이 ‘기사단’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레오의 단호한 어조에 에렌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
“어쨌거나, 좋든 싫든 우린 한배를 탄 것 같은데 당분간 서로 협력하는 게 어때.”
“전하께 진 빚은 모두 갚았습니다. 제가 전하와 함께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기사단은 이제 전하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단호한 시선으로 에렌을 응시했다. 에렌의 눈썹이 솟아오르고, 그가 소파에 기댔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게 무슨 뜻이지?”
늦가을 바람보다 싸늘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