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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75)화 (75/138)

75화



 

검투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울렸다.

콜로세움의 모습을 본뜬 원형 경기장 안에는 흥분이 감돌았다. 평민과 귀족이 분리된 관람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채워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 해의 가장 큰 축제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아르투아와 발사자르가 왕실 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등장에 군중들이 술렁였다.

발사자르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은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왕족의 등장에 평민들 역시 관심 어린 눈을 했다.

발사자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그가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다. 왕국의 영웅으로 알려진 아르투아에게도 박수가 쏟아졌다. 두 부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와아아아!

곧, 아까의 곱절은 되는 큰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에렌의 등장이었다. 왕국의 공식행사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던 그의 등장에 관중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늘따라 더욱 반짝거리는 에렌의 금발은, 마치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라도 비춘 듯 눈부시게 빛났다. 군중들은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확대경을 꺼내 들었다.

“이야! 진짜 남신 같은데?”

“저분이 그 유명한 에르네스트 대공인 거지?”

에렌은 평민들 사이에서도 왕국 최고의 미남으로 소문이 자자한 유명 인사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가 나타나자 발사자르는 순식간에 잊혀졌다.

“쳇, 재수 없어!”

순식간에 군중들의 관심을 빼앗긴 발사자르가 얼굴을 구겼다.

아르투아 역시, 에렌이 그들보다 뒤에 등장하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왕위 계승 서열이 떠올라 불쾌해졌다. 왕실의 서열은 나이나, 항렬과 관계없이 계승권 순서에 따라 결정되었다.

“어우, 깜짝이야. 뭐야 에렌… 인기 폭발이잖아?”

평민석에 앉아 아르투아와 발사자르의 등장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오스칼이 에렌을 향한 어마어마한 환호성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확제 참석을 비밀로 한 덕분에, 기사단에서 레오를 응원하러 온 것은 오스칼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국왕이 등장했다. 앞선 자들에 비해 초라한 등장이었다. 귀족석에서 드문드문 박수가 터져 나오긴 했지만, 평민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투실투실 살이 찐 국왕의 얼굴이 푸석했다.

“올해도 세금을 올린다면서?”

“그 소설 읽었죠? 국왕이 무능하고 신의도 없는 게 우리 국왕이랑 똑같더라니까!”

“국사는 돌보지도 않고 밤마다 주색잡기에 바쁘답니다.”

험악한 표정을 한 왕국민들이 수군거렸다. 싸늘한 반응에 국왕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에렌이 착잡한 얼굴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반면, 아르투아는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검투대회의 진행자가 등장하고, 드디어 경기의 막이 올랐다.

대회에 참가하는 귀족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되면, 분리된 대기실에 머무르던 그들의 기사가 원형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력 노출을 막기 위해, 직전까지 기사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는 것이 대회의 관례였다.

벌써 수차례 대회를 진행해온 노련한 진행자는 쇼맨십을 발휘해, 참가자 명단에 오른 귀족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능숙하게 기사를 소개했다.

이미 여러 번 참가해 얼굴을 아는 기사는 즉시 소개하고,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기사에겐 등장하기 전 타이밍 좋게 이름을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발사자르 라인하트 공자의 기사, 드레이코 호그 경.”

지난해 우승자인 왕실 근위대장의 등장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드레이코가 우쭐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관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자 먼저 호명된 다른 귀족의 기사들이 선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행자가 명단의 마지막 이름을 확인했다. 참가자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에렌이었다. 진행자가 에렌의 기사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물었다.

“저 실례지만 기사님 성함이 어찌 됩니까?”

“레오폴드 칼릭스.”

낡았지만 잘 손질된 투구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고맙소. 칼릭…. 으잉?”

진행자가 헛것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호명이 늦어지자 경기장 바깥에서 진행요원이 재촉하듯 손짓을 했다. 진행자가 손바닥 안에서 느슨해진 확성기를 허둥지둥 고쳐 쥐었다.

“마,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 라인하트 대공 전하의 기사, 레오폴드 칼릭스.”

레오가 성큼성큼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이름이 불리자 군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세상에, 설마 칼릭스 공작가의 자손이야?”

“그 반역자 근위대장의 아들?”

투구를 써 내내 모습을 감추고 있던 레오가 마침내 투구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투구 밖으로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진지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결연하게 다문 입술에서는 어쩐지 귀족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가 이마 위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올리자 관중석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도, 왕국 최고 공작 가문의 후손답긴 하군요.”

“에르네스트 대공께서 저자를 자신의 기사로 삼으신 걸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칼릭스 가문이 국왕에게 배신당해 억울하게 숙청되었다는 소문이요.”

드레이코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를 악다문 그가, 마주 선 레오의 얼굴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왕실 관람석에서도 한바탕 파란이 일었다. 몽롱한 표정으로 저녁에 열릴 연회를 떠올리고 있던 국왕이 눈을 번쩍 떴다. 아르투아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카, 칼릭스라고?”

국왕이 에렌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 네 이놈! 기어이 네가 반역자와 붙어먹었구나. 네 놈이 아르투아 대공을 두고 음해를 일삼더니, 진짜 반역자는 네놈이 아니냐?”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에렌이 짐짓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 당치 않습니다. 저자는 왕국 기사단에도 소속되어 있던 어엿한 기사입니다. 그리고 드레이코 경같이 이름난 기사들은 다른 분들이 차지해 제게 남은 건 평민 기사뿐이었지요.”

에렌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아르투아 대공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검투대회에서 근위대장 드레이코가 우승을 한다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실 근위대장이 왕국민들 앞에서 ‘버림받은 기사단’의 평민 기사 따위에게 패한다면, 자질을 의심받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근위대장을 기사로 내세운 발사자르의 명예는 물론이요, 국방 책임자인 아르투아의 체면도 크게 깎일 것이었다. 그야말로 개망신이었다.

‘저 교활한 놈이 그걸 알고 일부러 준비한 것이구나.’

아르투아가 괘씸함에 이를 뿌드득 갈았다. 역설적이게도, 아르투아는 레오폴드 칼릭스의 실력을 가장 잘 아는 자였다. 몇 번이고 그를 죽이는 데 실패했으니까.

발사자르만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끔뻑였다.

“에르네스트 대공. 아무리 법적 문제가 없다고는 하나, 감히 반역자의 후손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다니 경거망동했군. 자네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게 될 걸세.”

아르투아가 꽉 다문 잇새로 싸늘한 경고의 말을 내뱉었다.

“숙부님께서 이렇게까지 조카 걱정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왕실 근위대장께서 미천한 제 기사를 살살 다뤄주셔야 할 텐데요.”

에렌이 싱긋 웃었다.

***

왕실 관람석에서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동안, 검투대회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토너먼트 형태로 진행되는 검투대회는 추첨으로 대진표가 결정되었다.

어떤 경기는 치열하게 호각을 이루며 계속되기도 했고, 어떤 경기는 압도적인 기량 차이로 단번에 끝나기도 했다.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들의 좀처럼 보기 힘든 대련에 관중들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 중 단연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기사는, 스물네 명의 참가자 중 유일한 평민 기사인 레오폴드 칼릭스였다.

그가 첫 번째 대진 상대였던 레밍턴 후작 가의 기사를 단 세 합 만에 굴복시켰을 때, 사람들은 그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남부의 강자, 플랑드르 백작가의 수석 기사 보나파르트 경을 상대해 완승하자, 관중들은 흥분했다.

보나파르트 경은 드레이코와 함께 매년 대회의 우승 후보로 꼽힐 정도로 꽤 이름난 기사 중 하나였다.

“보나파르트 경이 정말 진 건가?”

“마치 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던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

레오의 뛰어난 실력에 관중들이 혀를 내둘렀다. 마침내 그의 세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관람석의 은밀한 내기판에서는 레오에게 돈을 거는 자들이 쏟아졌다.

대단치 못한 실력이지만 기막힌 대진 운 덕분에 세 번째 경기까지 치르게 된 지그문트 남작가의 차남은, 레오의 기세에 눌려 새로 장만한 값 비싼 검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나가떨어졌다.

드디어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아르투아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구겨졌다. 모든 것이 에렌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관중들의 이목이 가장 집중되는 결승전에서 발사자르의 기사 드레이코와 에렌의 기사 레오폴드가 맞붙게 되고 말았으니.

와아아-!

결승전에 이르자, 관중들의 열기가 극에 달했다. 오늘의 대회는 요 몇 년 중 가장 흥미진진한 대회임이 틀림없었다.

지난 대회의 우승자이자 왕실 근위대장 드레이코 호그와 그에게 도전하는 젊은 평민 기사. 심지어 혜성처럼 등장한 평민 기사는 반역 공작 가문 후손이자, 전 근위대장의 아들이었다.

경기를 취재하러 온 신문사의 기자들은 벌써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으득-

결승전에서 레오를 마주한 드레이코가 이를 갈았다. 레오의 깊고 검은 눈동자, 반듯한 콧날, 강직하게 다물린 입매는 과거 자신이 질투하던 자를 꼭 닮아 있었다.

“네 놈이 분수도 모르고 검투 대회에 참가했군. 네 아비와 아주 똑 닮았구나. 자신이 가장 잘난 줄 알지.”

드레이코가 마주 선 레오에게 악의에 찬 말을 퍼부었다.

“그 비열한 입에 다시는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상대를 죽여선 안 된다는 대회의 규칙만 아니었다면, 넌 오늘 내 검에 죽었을 거다.”

“검을 들기도 전에 말이 많은 걸 보니, 역시 세치 혀로 근위대장이 된 자답군요.”

정곡을 찔린 듯 드레이코가 바짝 열이 올라 흥분했다. 그에 비해 레오의 표정은 서늘한 채 변화가 없었다. 오직 그의 눈만이 고요하게 타올랐다. 앞선 경기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였다.

두 사람이 검을 들자, 긴장감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관중들 역시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대회 내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에렌 역시, 이번만큼은 초조한 듯 손바닥을 맞잡아 주무르고 있었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요란한 파열음을 냈다.

“흡!”

드레이코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지금껏 상대했던 것 중 가장 빠르고 강한 검이었다.

레오의 검은 드레이코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재빨리 몸을 꺾어 검을 피한 드레이코가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레오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스릉-

드레이코가 강한 기세로 들어오는 레오의 검을 흘려보냈다. 비록 세드릭을 배신하고 근위대장이 되긴 했지만, 그도 뛰어난 검사였다. 과연 결승전다운 거센 공방에 관중들이 잔뜩 몰입했다.

레오가 다시 한번 땅을 박차고 달리며 검을 내리쳐 왔다. 그가 내딛는 발자국 위에 흙바람이 일었다.

깡-!

드레이코가 가까스로 검을 받아내자, 숨을 몰아쉴 새도 없이 레오의 검이 따라붙었다.

챙-챙-챙-

검이 빠르게 부딪쳤다. 대단한 공세였다. 레오의 칼끝을 눈으로 좇기 어려워지자 드레이코가 간신히 검을 물리며 간격을 벌렸다.

“헉헉.”

드레이코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상대의 검을 막아낸 것은 25년 만이었다. 그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이봐, 애송이. 네 반역자 아비가 처형당하기 전에 어떻게 목숨을 구걸했는지 알려줄까?”

그 저열한 음성에, 레오의 얼굴 위로 작은 동요가 일었다. 드레이코의 입가에 비열한 조소가 흘렀다.

검을 쥔 레오의 손마디가 불끈 솟아올랐다. 매서운 검이 드레이코를 향해 날아들었다. 드레이코가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오르며 검을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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