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한낮에 부는 바람에도 콧잔등이 살금살금 시린 계절이 왔다. 황금빛으로 출렁이던 라인하트의 들녘이 며칠 새 앙상해졌다. 그리고 앙상해진 들녘은 왕국의 큰 축제 중 하나인 수확제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물론 추수는 곧 징수가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왕실은 왕국민에게 점점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봄까지 더욱 빠듯한 살림이 되겠지만, 어쨌든 곧 다가올 축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수확제의 첫날, 왕국은 새로운 공자의 등장으로 술렁였다. 아르투아 대공이 혼외자를 정식 후계자로 들였다는 사실은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세상에, 혼외자를 후계자로 지명하다니!”
“어머니가 과연 누굴까요? 외국의 공주라는 얘기가 있던데. 그러니 그 자존심 높은 사르데나 공국의 공녀, 대공비께서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신 거 아닐까요?”
“대공비께서 최근 그 일로 두문불출하신대요.”
“저희 하녀가 대공저의 하녀에게 들었는데, 대공비께서 혼외자를 가문에 입적하는 일로 거의 혼절하셨대요.”
“그렇겠죠. 따님이 두 분이나 있는데…. 대공 전하가 딸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낸 이유가 그래서일까요?”
“요즘 사르데나도 전쟁으로 정신이 없다더니….”
“원래 사랑 없이 한 정략결혼이잖아요. 대공께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얌전해 보이는 대공비께서도 이미 정부를 들이셨을 수도 있죠.”
남편의 사생아를 새 아들로 들이게 된 아르투아 대공비에 대한 동정 어린 시선은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의 은근한 비아냥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야기의 끝에는 귀족들의 하이에나 같은 눈빛이 남았다.
“조만간 대공저에서 새로운 공자가 주최하는 파티가 있을 거라던데….”
“분명 저희 가문의 딸들은 모두 초대를 받겠죠?”
“후후, 작년에 소피아에게 들어온 혼담을 모두 물리길 잘했죠.”
대공비와의 사이에서 딸만 두고 있던 아르투아였다. 딸에게는 상속권이 없는 라인하트의 법에 따라 아르투아가 가진 비옥한 영지, 수많은 보석과 황금은 그의 외손자에게 상속될 것이었다.
제 아들을 아르투아 대공의 사위로 밀어 넣고 싶어 안달이 난 귀족들이 줄을 섰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그 기나긴 줄 앞에 익스프레스 티켓을 손에 쥔 공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들을 가진 귀족들이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반면, 딸을 가진 귀족들은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약삭빠른 귀족들은 그간 여식을 두고 오가던 혼담을 재빠르게 중단시켰다.
“발사자르 공자님을 실제로 보셨어요?”
“어휴, 말도 마세요. 저희 레이첼이 먼발치에서 바라본 것만으로도 한눈에 반했대요.”
“저도 들었어요.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에 견줄 미남이라고요.”
“외국에서 자라셔서 그런지, 이국적인 미남이세요!”
더군다나, 부모를 닮아 매력적인 발사자르의 미모는 사교계 여인들을 잔뜩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검투 대회가 시작되기 전, 아르투아가 머무는 왕실 전용 내빈실은 아르투아와 발사자르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귀족들로 인해 마치 서커스장처럼 붐볐다.
“처음 뵙겠습니다. 발사자르라고 합니다.”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레밍턴 후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트리스탄 백작입니다.”
“지그문트 남작입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발사자르와 인사를 한 귀족들이 선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곱슬거리는 흑발에 유혹적인 눈웃음을 가진 발사자르에게서는 악동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가 라인하트 가문의 상징인 금발 벽안이 아니라는 점조차도, 그가 가진 출생의 약점과 함께 하나의 서사가 되어 더욱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이제 곧 대회가 시작되니, 다들 관람석으로 돌아가게.”
내빈실 한쪽에 수북하게 쌓인 선물을 바라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던 아르투아가 축객령을 내렸다.
아르투아는 이름난 귀족들이 너도나도 선물을 싸 들고 찾아와 발사자르를 반기는 것에 몹시 흡족한 기분이었다. 그가 왕국 최고의 실세라는 것이 다시금 실감 났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모두 사라지자, 아르투아가 입을 열었다.
“검투대회는 네가 왕국에 처음 공식적으로 소개되는 행사다. 네가 이 왕국의 차기 후계자로 손색이 없음을 틀림없이 보여야 한다.”
“하아,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몇 번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게 매료되지 않는 자들이 어디 있겠어요?”
잔소리라면 넌더리가 난다는 듯 발사자르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콧날과 매혹적인 입술 위로 가을볕이 흩뿌려졌다. 과연 잔느에게서 물려받은 미색은 사람들을 현혹할 만했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란 걸 모르느냐? 검투대회는 네게 강한 힘이 있다는 걸 보이는 자리야. 귀족과 평민이 모두 지켜보는 왕국 최고의 행사니 널 과시할 최고의 기회지.”
“아버지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근위대장을 제 기사로 주신다고 했잖아요.”
발사자르가 낄낄거렸다. 아르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 아들이 매력적이고 교활한 것은 분명했지만, 그리 똑똑하진 않았다.
누굴 닮아 저렇게 생각이 없는지.
“멍청한 국왕은 제쳐두고, 그 건방진 에르네스트보다 네가 낫다는 걸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번엔 그 자식이 검투대회에 참여한다고 하더구나.”
아버지의 불평에 발사자르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자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요? 머리도 좋고 재력도 빵빵한 데 미남이기까지 하다고. 그런 자는 절 위해 진작 제거하셨어야죠.”
아들의 철없는 소리에 아르투아가 짧게 혀를 찼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느냐? 보통 놈이 아니야. 세뇌된 국왕을 설득해 네 어미의 집을 수색할 왕명까지 받아낸 놈이다. 그 이후에 내가 국왕을 다시 구워삶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아르투아가 습관처럼 제복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잔느의 구슬을 단추로 위장해 국왕을 알현할 때마다 세뇌해왔다.
“약점 같은 건 없어요? 애인이나…. 아! 제가 그자의 애인을 유혹하면 어때요?”
터무니없는 발상에 아르투아가 한심하다는 듯 발사자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은 그를 똑 닮아 호색한인 탓에 시답잖은 계집들과 놀아나기 일쑤였다.
“그놈에게 여자가 있단 소린 못 들었다. 오히려 남색을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긴 하더군.”
“우웩. 그자가 남색가래요?”
“어쨌거나 사교계에서 입지도 대단한 놈이야. 조만간 대공저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널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괜찮은 영애들을 꼬드겨 놓거라. 만나던 계집들은 다 정리하고.”
“그렇지 않아도 귀찮은 여자애들은 다 정리했어요. 그런 면에선 제가 아버지보다 낫죠. 아버지는 그날 에르네스트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지만, 전 확실하게 없애버렸거든요.”
발사자르의 붉은 입술이 야비하게 휘어져 올라갔다.
‘주제도 모르고 내게 매달리던 구질구질한 계집애였지.’
그가 카탈리나에서의 과거를 떠올렸다.
***
지난 25년 동안, 잔느와 발사자르는 아르투아의 도움으로 라인하트 서쪽 국경지대의 작은 공국, 카탈리나에 머물렀다. 라인하트보다 발전이 더디고,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 그들은 인신매매로 세력을 불렸다.
주로 떠돌이, 고아,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표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묘한 의뢰가 들어왔다.
“자르제 백작가의 여식을요?”
“정확히는 백작의 조카딸이지. 15년 전 백작가의 가주가 죽으면서, 어린 딸을 가주의 동생이 입양했어. 그러면서 성년이 되지 않은 딸 대신 가주의 동생이 백작위를 이었지. 하지만 조카가 성년이 되자, 백작위를 조카에게 돌려줘야 할까 봐 겁이 나는 모양이더구나.”
“아, 그래서 그 딸을 납치해 타국에 노예로 팔아달라?”
“그래. 백작 부부가 은밀하게 상단으로 찾아왔더구나. 그 아이를 우리가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으니까, 없애기만 하면 따로 돈을 더 주겠다고. 백작가의 하녀가 협력하기로 했다.”
잔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럴 땐, 인간들이 마녀보다 나을 게 없어 보였다.
“오, 우리야 이득 아닙니까. 귀족 영애면 노예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릴 텐데.”
발사자르가 눈을 번들거리며 웃었다.
일은 간단했다. 백작가의 늙은 하녀가 늦은 밤 야경을 감상하자는 핑계로 아가씨를 데리고 외출하면, 두 사람을 납치해 하녀는 외국으로 탈출시키고 영애는 노예로 팔아넘긴다.
세간에는 가련한 영애와 하녀가 밤 외출을 나왔다가 실종되었다고 알려질 것이다. 카탈리나의 밤은 언제나 범죄가 들끓었으니까.
발사자르는 상대가 귀족 영애라는 말에 흥미가 일었다. 그래서 여간해선 직접 나서는 법이 없던 그가 납치에 동행했다.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영애는 붙잡히는 순간에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널 노예로 팔아버리라고 한 게 자르제 백작 부부라는 건 알아?”
여자를 가둔 발사자르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대개 붙들려 온 자들은 살려달라며 발버둥 치게 마련인데, 영애는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몸이 묶인 채 낡은 창고에 주저앉은 여인의 녹색 눈동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공허하게 비어있었다.
“놀랍진 않아요. 그분들은 언제나 제가 사라지길 바라시니까요. 오히려 파트리샤가 제게 야경을 보러 가자고 한 게 더 놀라운 일이었죠. 그 집에서 제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없거든요. 이제 보니 그것도 다 계획의 일부였던 것 같지만.”
옷 위로 드러난 영애의 몸 곳곳에 학대의 흔적이 보였다. 영애가 눈을 내리깔았다. 부서진 창고 틈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엷은 갈색의 속눈썹 위로 내려앉았다. 그늘진 인상이지만 어여쁜 이목구비였다.
발사자르가 목덜미를 쓸었다.
‘이대로 노예로 팔기엔 좀 아까운 것 같기도 하고.’
눈앞의 여인은 어딘가 흥미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발사자르는 자르제 가의 가여운 여식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네가 날 돕는다면 널 살려줄 수도 있고. 꽤 쓸모 있어 보이니까.”
어둡게 가라앉은 녹색의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납치한 자를 바라보는 처연한 눈동자에 서린 것은, 터무니없게도 ‘희망’이었다.
***
그녀는 자르제 가에서 ‘쓸모없는 밥버러지’로 불려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발사자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교활한 발사자르는 그 점을 귀신같이 이용했다.
달콤한 말과 호된 질책으로 영애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제게 의존하게 했다. 결국, 그녀는 발사자르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평생 애정을 갈구해 왔고, ‘쓸모’에 집착하는 여자는 그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발사자르, 당신을 위해 뭐든지 할게요.”
“발사자르, 사랑해요.”
“발사자르, 날 두고 어딜 갔다 온 거예요?”
발사자르는 점점 시시해졌다. 너무도 쉽게 자신에게 지배당한 여자. 영애가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하자 그는 귀찮아졌다. 아름답다 여겼던 외모는 생기 없는 인형 같아 진절머리가 났다.
‘흥미도 다 떨어진 여자를 더 곁에 둘 이유가 없는데…. 쓸모없는 계집애.’
하지만, 제 곁에서 보고 들은 게 많아 다시 노예로 팔아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잔느가 카탈리나의 일을 모두 정리하라고 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우린 라인하트로 돌아갈 거다. 왕국이 곧 우리 발아래에 무릎을 꿇겠지.”
그의 어머니 잔느가 라인하트에서 꾸미고 있는 계획을 듣자마자 발사자르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발사자르는 여자를 라인하트로 데려왔다. 그리고 데이트를 하자는 핑계로 인형처럼 예쁘게 입혀 살롱으로 불러냈다.
여자는 제 운명도 모른 채, 들뜬 기분으로 살롱에서 몇 시간이나 그를 기다렸다.
쾅-
발사자르는 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폭발음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주제에 제게 사랑을 구걸하던 여자와는 이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