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자네의 몸. 몸으로 갚아.”
에렌의 발언에, 자리에 앉은 세 사람의 얼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평소에 여간해서는 안면근육을 움직이지 않던 레오의 얼굴조차도 이번에는 꽤 망가지고 말았다.
그중 가장 터무니없는 얼굴이 된 사람은 제라드였다. 제라드의 동공이 진도 8 정도의 세기로 흔들렸다.
‘기어이 저 남색가가 취향을 바꿨구나.’
제라드는 에렌이 남색가라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에렌은 오래전부터 오스칼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시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에렌은 오스칼이 아닌 레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에렌의 취향이 그새 예쁜 남자에서 강한 남자로 바뀐 모양이었다.
제라드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레오와 오스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레오 역시 오스칼을 좋아하는 남색가가 분명했다. 제라드가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맞잡았다.
제가 아는 남자 중 가장 잘생긴 두 남자가 모두 남색가라니!
‘신이시여, 제가 저들과 연적이 되지 않을 취향을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제라드가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히 신께 기도를 올리는 동안, 마치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레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렌을 쳐다보았다. 오스칼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는 분위기에 에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난 그저 자네가 수확제의 검투 대회에 나의 기사로 참가해 달라는 뜻이었어.”
일그러졌던 레오의 눈매가 다시 펴지더니, 곧 커졌다.
“수확제의…. 검투 대회 말입니까?”
“그, 그런 거면 말을 좀 똑바로 해요! 다들 오해할 만한 표현을 쓰지 말고!”
야릇한 문장에 충격을 받은 오스칼이 에렌이 대공이란 사실을 잊고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렌이 큭큭대며 웃었다. 오스칼이 그런 에렌을 향해 볼을 부풀렸다.
“흠흠. 자네들은 유머 감각을 좀 키울 필요가 있어.”
싸늘한 시선에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한 에렌이 어느새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는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귀족들이 뛰어난 기사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결투를 벌이는 수확제의 전통. 그대가 이번 수확제에서 내 기사가 되어 줘야겠어.”
“왜 저입니까? 저 같은 평민 기사를 대리인으로 세워 좋을 게 없으실 텐데요. 게다가 반역자의 후손이지 않습니까.”
“난 실리주의자거든. 그대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네. 게다가 이왕 자네와 나 사이가 들통난 마당에, 저쪽에 내가 가진 패를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내가 왕국 최고의 기사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수확제라는 말에 오스칼이 반짝 눈을 빛냈다.
수확제는 〈여스칼〉의 세계관에서 꽤 큰 행사였다.
늦가을, 곡식의 수확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며칠간 열리는 라인하트의 축제. 그중 가장 첫날에 치러지는 검투대회는 귀족들이 은근한 경쟁을 벌이는 자리였다.
검투대회에서 귀족들은 자신의 대리인으로 기사를 내세운다. 여기서 그가 내세우는 기사는 그에게 온전히 충성을 맹세하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임을 뜻했다.
검투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사의 주인은 그만큼 대단한 위세를 가졌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검투대회에 우수한 기사를 앞세워 그들의 세력을 과시했다.
그랬기에, 에렌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검투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혹, 그의 기사가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가 강한 기사를 거느리며 왕위를 노리는 것이라 오해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투아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움직인다면, 더는 그가 참아줄 이유는 없었다.
“대공 전하께선 검투대회에 참가하지 않으시는 거로 압니다만.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이번 검투대회에서 발사자르가 정식으로 아르투아의 후계자로 소개될 예정이거든.”
“발사자르라면 잔느와 아르투아의 아들이요?”
오스칼이 놀라 되물었다.
“후계자를 소개하기에 적절한 행사지. 왕국민들과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니까. 아르투아는 뒤늦게 등장한 후계자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발사자르를 이번 검투대회의 승자로 만들고 싶을 거야. 발사자르의 기사는 당연히 드레이코 호그일 거고.”
최근 몇 년간 검투대회의 우승자는 아르투아가 내세운 기사, 드레이코 호그였다.
“제게 드레이코 호그와 겨뤄서 이기라는 말씀이시군요.”
레오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드레이코는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해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왕국 기사단에서부터 그를 집요하게 괴롭힌 자였다.
레오가 엉망이 된 오스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급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실력으로만 겨루는 검투대회라면, 오스칼을 저렇게 만든 자식을 박살 내버릴 수 있다. 레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난 한다면 최고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처음 보는 사촌 동생이 수확제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겠다는데, 형이 된 도리로 자리를 빛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꼭 자네가 우승을 해주었으면 좋겠군.”
에렌이 기대된다는 듯 입꼬리를 설핏 올렸다.
***
두 사람에게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제라드는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때 그 인신매매단의 배후가 아르투아 대공과 그의 정부인 잔느라니!
게다가 이 모든 것이 25년 전 칼릭스 공작가의 숙청과, 루이스터 대공의 반역에서부터 이어진 어마어마한 음모의 일부라는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일단, 기사단에는 알리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위험한 상대인 데다, 내 개인적인 문제도 얽혀 있으니….”
“하지만 단장님 일이라면 다들 돕고 싶어 할 겁니다! 모두 단장님을 존경하고 있으니까요.”
“아르투아가 이교도 군대를 이용해 반역을 꾀한다면 기사단이 나서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공작가의 누명을 벗기는 일은 다른 문제다.”
단호한 레오의 태도에 제라드는 속이 쓰려오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헤집었다.
“검투대회는 괜찮으시겠습니까. 단장님은 그런 일에 나서는 걸 꺼리시지 않았습니까.”
레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가문을 몰락시킨 왕실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에게 지킬 것이 있었다.
“필요한 일이다.”
“단원들에겐…. 함구할까요.”
“어차피 내가 검투대회에 나선다면 모를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굳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
제라드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와 오스칼이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
“며, 면목이 없습니다.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근위대장 드레이코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잔느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그는 이번에도 레오폴드 칼릭스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드레이코가 준비한 변명을 염불처럼 외며, 두려움에 이를 딱딱 부딪쳤다.
“그래서, 레오폴드 칼릭스를 잡으러 간 인쇄소에 에르네스트 대공이 나타나 그를 감싸고 돌았단 말인가요?”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줄 알았건만 잔느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드레이코의 변명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잔느는 인쇄소에서의 일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곧 징벌을 당할 것이라는 긴장감에 고개를 조아리던 드레이코가 퍼뜩 대답했다.
“마, 맞습니다. 그가 인쇄소의 실소유주라고 하더군요.”
“아주 마음에 드는 소재군요. 국왕의 이복동생과 반역자의 후손이 한배를 타고 있다니. 국왕을 흔들기에 이만한 게 없군요.”
잔느가 만족스러운 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레이코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예예, 그랬습니다. 게다가 제가 왕궁에 드나든 이후 에르네스트 대공이 그렇게 섬뜩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잔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례적인 일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던 거지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달려와서는 애송이의 칼을 손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을 체포하려던 근위대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더군요. 하마터면 제 목이 날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애송이라 함은…?”
“그때 말씀하신 레오폴드 칼릭스의 동료, 오스칼이라는 자입니다.”
잔느의 입꼬리가 잔뜩 말려 올라가 잔혹한 미소를 띠었다.
귀찮은 쥐새끼라고만 생각했는데, 뜻밖에 오스칼이란 자가 어마어마한 무기가 될 것 같았다. 클로드 드보이스의 저주를 푼, 에렌의 약점이 될 사람.
“아주 좋군요. 이번에 경께서 에르네스트를 꾀어낼 아주 완벽한 미끼를 잡으셨습니다.”
드레이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얼음장 같은 여자가 임무에 실패했는데도 칭찬을 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 어떤 말씀이신지……?”
“눈엣가시 같은 에르네스트 대공을 흔들 패가 필요했는데, 덕분에 수월해지겠군요.”
잔느가 입가를 비틀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냉철한 에르네스트 대공은 오늘 같은 상황에서 결코 전면에 나설 자가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은밀하고 치밀하게 움직이는 자였다.
그런데 차명으로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정체까지 드러내며 위험을 무릅쓰고 왕실 근위대에 맞섰다? 그것도 평민 기사단을 위해?
잔느는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에렌이 남색가라는 소문을 떠올렸다. 그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다. 사람에게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약점이 된다.
약점이 있는 자를 다루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잔느의 눈이 승리감으로 번뜩였다.
“이제부터 경은 검투대회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세요. 필시 우승을 해, 발사자르가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분명 혼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칭찬을 받게 된 의외의 전개에 드레이코가 들뜬 표정이 되었다.
비록 칼릭스를 제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검투대회만큼은 달랐다. 그는 벌써 7년째 검투대회의 우승자였다.
드레이코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분명 그는 다음 임무도 완벽하게 수행해 잔느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