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오스칼의 칼날을 움켜쥔 에렌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깜짝 놀라 칼을 물린 오스칼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미안함과 서러움, 또 한편으로는 엉망이 된 몰골을 에렌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맞아 터져 피가 흐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엉망이 된 오스칼의 얼굴에 에렌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저놈들은 마드모아젤에 대한 법도라고는 모르는 작자들인가 보군.”
에렌이 작게 속삭였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숨을 내쉬었다.
“에,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
근위대장이 당황해 에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근위대장의 모습에 근위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큰소리로 복창했다.
“에르네스트 대공 전하!”
이 상황에서 당황한 것은 드레이코만이 아니었다. 레오와 제라드의 시선이 일제히 에렌을 향했다.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으나, 에르네스트 대공이라면 그들도 아는 이름이었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이자, 현 국왕의 동생.
오직 오스칼만이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에렌이 품 안에서 왕가의 자수가 새겨진 실크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손을 감쌌다. 에렌의 상처를 본 오스칼의 얼굴에 자책이 피어올랐다. 에렌은 괜찮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곧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에렌이 근위대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드레이코가 급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드레이코 호그 경, 이런 곳에서 그대를 마주치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는데.”
드레이코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에 비해, 에렌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고압적이었다. 오스칼이 입을 벌리고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원작 소설에 에르네스트 대공이라는 등장인물이 있었던가? 아니, 그보다 에렌이 대공이라니?’
에렌이 고개를 숙인 드레이코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왕실 근위대가 이런 누추한 인쇄소에는 어쩐 일인가?”
그 목소리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드레이코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것이…. 이 인쇄소에서 불온도서를 제작한다는 고발이 들어와 조사 중이었습니다.”
“아하, 고작 이런 인쇄소 하나를 드잡이하려고 왕실 근위대장까지 행차하셨단 말인가? 누가 보면 여기서 전쟁이라도 난 줄 알겠군.”
에렌은 인쇄소에 늘어선 병력을 차가운 눈으로 훑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 힐난하는 투였다.
“그, 그게, 왕실 모독혐의가 적용될 사안이라… 엄중하게 처리하기 위해….”
에렌은 국정에 관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그는 드레이코의 상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에렌은 왕국에서 국왕 다음으로 신분이 높은 자였다.
게다가 드레이코는 에렌이 어떤 자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적에게는 가차 없고 냉정한 자. 심지어 에렌이 가진 재산이나 병력도 대단했다.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천한 신분이었던 에렌의 생모를 조롱하는 글을 게재했던 신문사가 2주 만에 파산하고, 편집자 일가가 사교계에서 퇴출당한 일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런 에렌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다그치자 저절로 기가 죽었다.
대체 왜 에르네스트 대공이 이곳에 나타나 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걸까.
“이 인쇄소에서 ‘왕실 모독’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저자들이 이 인쇄소와 짜고 중죄를 저지르고 있기에 단속을 나왔는데, 보시다시피 협조를 거부하는 통에…… 저자들을 왕실 모독과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체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근위대원들은 더욱 단단하게 레오를 붙들었다. 드레이코의 눈짓을 받은 근위대원이, 우두커니 선 오스칼에게 재빠르게 다가가 팔을 잡아채려 했다.
“멈춰.”
에렌이 오스칼에게 다가간 근위대원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근위대가 일동 멈추었다. 에렌은 섬뜩하리만치 감정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근위대장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예?”
드레이코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냐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인쇄소는 내 소유야.”
“그, 그게 무슨.”
드레이코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분명 사전 조사를 했을 때, 이 인쇄소의 소유주는 별 볼 일 없는 평민이었다. 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니까, 자네의 주장에 따르면 왕실의 일원인 내가 저자들과 짜고 스스로를 모독하고 비방하는 글을 발행했다는 것인가?”
“아, 아니. 그것이…”
드레이코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근위대원들 중에 생채기라도 난 자는 한 명도 없어 보이는데, 저자들이 공무 집행 방해를 했다고? 오히려 근위대가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과잉 대응을 한 건 아닌가?”
상처 난 오스칼의 얼굴을 바라본 에렌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부, 분명 저자들이 근위대를 협박….”
“게다가 인쇄소 안이 자네들로 인해서 아주 엉망이 된 것 같은데! 왕족의 재산에 심각한 위해를 가한 것 같군.”
에렌의 푸른 눈에 살얼음 같은 냉기가 서렸다. 경멸과 분노를 담은 그의 눈빛이 드레이코를 향했다. 드레이코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섰다.
“자네야말로 왕족 재물 손괴를 포함해, 왕족이 승인한 도서에 대해 왕실 모독이라는 음해의 말을 지껄여 나를 모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순식간에 에렌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드레이코의 목에 칼끝을 가져다 대었다.
그 살기 어린 모습에 드레이코는 오금이 저렸다. 이대로 대공이 그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내가 네 목을 이 인쇄소의 장식품으로 만들기 전에, 네 놈 부하들을 데리고 당장 여기서 꺼져.”
“예…. 예!”
드레이코는 풀려버린 다리를 질질 끌며, 허둥지둥 부하들을 데리고 인쇄소를 떠났다.
근위대가 떠난 인쇄소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오스칼의 얼빠진 눈을 마주한 에렌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연극이…. 끝났군.”
***
근위대가 물러간 인쇄소 안은 어수선했다. 인쇄소의 사용인들은 분주하게 근위대가 망쳐 놓고 간 자리를 정리했다. 그 사이에 인쇄소 2층, 에렌의 방으로 안내된 기사단 일행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공… 전하.”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오였다. 에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나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건 사과하지. 내 신분이 알려져 봤자, 특별히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자리에 앉아 안절부절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던 제라드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도의 예법을 갖추었다.
“대, 대공 전하, 그간 미처 알아뵙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에렌은 어깨를 한번 으쓱 올렸다 내렸다. 이제 와서 제게 그렇게까지 예를 갖출 필요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굳은 표정의 레오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전하께서는 왜 정체를 숨기고 저희를 도와주신 겁니까.”
“특별히 자네들을 도운 게 아니야. 난 정치가라기보다 사업가거든. 자네들의 소설이 사업적으로 유망한데 왜 마다하겠어? 물론 오스칼에게 따로 신세를 진 일도 있고.”
에렌이 오스칼을 바라보며 싱긋 웃자 레오의 턱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정작 에렌의 시선을 받은 오스칼은 차가운 수건을 멍이 든 한쪽 볼에 댄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렌 경이 국왕의 동생, 그러니까 와…. 왕자였다고? 왕자병이 아니라 진짜 왕자?!’
생각해보니 ‘백마 탄 왕자’ 같다는 그에 대한 첫인상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어째 처음 보았을 때부터 행동이나 말투가 심상치 않다 했지만, 그가 왕족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스칼〉 원작에서 라인하트 9세의 아들은 지금 국왕인 샤를 하나뿐이었다. 선왕이 언제 둘째를 낳았대…?
〈내가 구한 엑스트라가 왕자님이래요〉라는 제목의 웹소설 한편이 뚝딱 나올 상황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왕자님의 집착 상대가 되는 건가…?
그러나, 오스칼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에렌에게 저질렀던 온갖 불경한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멱살 잡기, 옷 찢기, 빈정거리기, 죽인다고 협박하기…. 일단 몇 개는 확실히 왕실 모독죄에 해당할 것 같았다.
오스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살려주세요, 대공님〉으로 소설 제목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황급히 에렌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고맙습니다. 오늘 저희를 도와주신 것이요. 대, 대공 전하.”
“하하, 그대 입으로 대공 전하라는 호칭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한데?”
오스칼은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자못 심각한 상황에서도 에렌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레오는 굳은 표정이었다.
“전하는 왕족이시면서 반역자의 후손과 거래를 하신 겁니까.”
“자네가 반역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나. 그리고 혈연 따윈 얄팍한 거야. 날 죽이려는 자는 무려 내 숙부라고. 게다가 이제 보니 칼릭스 공작가의 혐의는 모두 누명인 것 같고….”
“아르투아가 대공 전하를 암살하려고 했던 이유는 왕위 계승권 때문이었군요.”
비로소 상황을 이해한 오스칼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왕족이 평범한 사업가를 암살하려 할 리가 없지.
“맞아. 그래서 날 위협하는 자를 쫓았고, 잔느의 저택에서 그대들을 만나게 된 것뿐이야. 덕분에 아르투아와 잔느가 함께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거고.”
투명인간처럼 입을 다물고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라드가 순식간에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정보들에 놀라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우리 기사단과 관련이 있다는 게 드러난 이상, 저들이 무슨 일을 꾸밀지 모릅니다.”
레오의 말에 에렌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국왕은 날 더 경계하게 되겠지.”
에렌의 눈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사실 무모한 일이었다. 오늘 근위대로부터 칼릭스의 기사단을 감싼 일은 틀림없이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에렌의 생각을 읽은 레오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왜…. 저희를 위해 굳이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사실 굳이 따지자면, 자네를 감싸려던 건 아니었어.”
에렌의 눈이 오스칼을 향해 휘어졌다. 그의 시선과 마주친 오스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죄, 죄송해요. 제가 또 사고를….”
곧 레오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딱딱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 빚은 꼭 갚겠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닌데, 왜 자네가 빚을 갚는다는 건가?”
레오를 향한 에렌의 목소리는 어딘가 도발적이었다.
“전하께서 뤼미에르 기사단의 ‘제 사람’을 위해 해주신 일이니, 응당 제가 갚을 일입니다.”
레오가 에렌을 똑바로 응시했다. 주먹을 쥔 레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의 사람이기 때문에, 자네가 대신 빚을 갚는 다라….”
“예.”
에렌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레오를 마주 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좋아. 자네가 빚을 갚고 싶다면, 그 빚을 어떻게 갚을지 정도는 내가 정해도 되겠지.”
에렌의 묘한 눈빛에 레오가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겼다. 그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의 몸. 몸으로 갚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