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칼릭스’라는 성에 아르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잔느가 짜증스러운 눈으로 아르투아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그 가문의 씨를 말렸어야 했습니다.”
“선왕이 본보기를 보이자며 끝내 그놈을 살려두자는 걸 어찌하나. 내심 찜찜해 선왕이 죽은 후엔 그놈을 제거하려고 수도 없이 자객을 보냈었는데….”
레오가 속한 왕국의 하급기사단을 사지로 내몰고, 기사단을 해산한 후에는 자객을 풀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잔느가 한심하다는 듯 아르투아를 응시했다.
강한 자를 다루는 법을 그토록 알려주었건만.
“대공께선 제대로 하시는 일이 없군요. 칼릭스도 제가 처리하지요. 전하는 발사자르의 일이나 잘 마무리하세요.”
아르투아가 언짢은 듯 턱을 매만졌다. 언젠가부터 주도권을 쥐고 명령하는 쪽은 그가 아니라 잔느였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든 계책은 잔느의 혀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짜 맞춘 것처럼 언제나 맞아떨어졌다. 잔느의 손을 잡기로 한 이상,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발사자르가 곧 후계자로 공표될 거야. 하지만 아주 곤욕이었어. 그 과정에서 대공비와 사르데나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거든. 그나마 사르데나의 왕이 카탈리나와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때라 다행이었지.”
아르투아가 투덜거렸다.
“왕좌를 얻으면 사르데나부터 멸망시켜야겠군요. 대공비도 없애버리고.”
잔느의 잔인한 목소리에 아르투아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괜히 헛기침을 한번 했다.
“크흠. 그래서 저택은 어쩔 건가. 당신의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는데.”
“저택을 파괴해 수색자들을 몰살하고 증거를 없앨 겁니다.”
아르투아가 탄식을 내뱉었다.
“오, 세상에. 그 저택을 마련하는 데 쓴 돈이 얼마인 줄 아는가?”
“제가 대공께 안겨드린 재산이 얼마인데, 고작 그깟 저택 하나로 생색을 내시는 건가요.”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이 서늘했다. 아르투아 대공이 흠칫 몸을 떨었다.
엄밀히 말하면 잔느 덕분에 반역자로부터 국왕을 구한 영웅이 되어 칼릭스 공작가와 루이스터 대공가의 재산을 모두 갖게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 누가 생색을 냈다고 그러나! 알겠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당분간 몸을 숨겨야지요. 대공께서는 국왕에게 해명이나 잘 해두세요. 일을 그르치게 하는 쥐새끼들은 모두 죽여버릴 겁니다.”
잔느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
잔느의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스칼과 레오는 에렌이 이끄는 군대에 막 합류한 참이었다.
“좋아, 그대가 온 것은 좋은데. 대체 저 변태 자식은 왜 데려온 거야?”
못마땅한 표정을 한 에렌이 긴 손가락을 뻗어 클로드를 가리켰다. 클로드는 태연한 얼굴로 오스칼 뒤에 당당히 서 있었다. 오스칼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제가 데려온 거 아니거든요?”
“맞아. 난 나의 오스칼을 지키기 위해 따라온 거야.”
“넌 제발 그 ‘나의 오스칼’이란 소리 좀 집어치워!”
오스칼이 뒤돌아 클로드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레오와 에렌의 손이 검자루 위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당장 검을 뽑아 저 변태 자식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내 몸이 당신의 몸을 갈망하고….”
“닥쳐!”
“윽.”
오스칼은 결국 자신을 향해 헛소리를 늘어놓는 클로드의 발을 콱 밟아버렸다.
이 변태 노인네가 많은 사람 앞에서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저게 그 클로드 드보이스야?”
“맞아, 잔악하고 가차 없다…는 샤무아의 수장.”
“저런 덜떨어진 자가 재앙의 상징… 맞는 거지?”
클로드의 등장에 잔뜩 경계 태세를 취했던 에렌의 사병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힐끔거리며 쑥덕댔다.
“어쨌든 마법을 쓰는 자이니, 수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오스칼의 말에 에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왕명에 따른 공식 수색이야. 심지어 흑마법을 쓰는 마녀를 체포하기 위한 일이지. 이런 일에 왕국 최악의 명성을 가진 흑마법사가 참여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그리고, 잔느는 반역 혐의도 받고 있지요.”
단테가 레오를 흘긋 바라보며 말을 보탰다.
“아….”
오스칼이 클로드와 레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악명높은 흑마법사와 반역의 아이콘. 확실히 이쪽이 더 수상한 조합이긴 하네.
“사병들도 두려워하는 것 같고… 그래서 저자만이라도 돌려보냈으면 하는데….”
에렌이 클로드를 슬쩍 바라보았다. 에렌의 못마땅한 눈빛에 클로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주인이 없는 상단에 들이닥쳐 무력으로 난장판을 만든 자를 살려두는 건, 오스칼이 이젠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인데….”
클로드의 날카로운 시선에 에렌이 움찔, 단테를 바라보았다.
“예? 경이 샤무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요? 그게 무슨… 그러고 보니 경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사병까지 거느린 데다 왕명까지 받아 오는 건가요?”
오스칼이 문득 에렌을 향해 의문을 제기했다. 레오 역시 에렌에게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클로드가 보랏빛 눈을 가늘게 떠 에렌을 바라보았다.
신분을 숨기고 접근했다, 이거지?
클로드가 빈정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숨기는 것도 많은 고귀한 분께 내가 내 위치를 망각하고 실언을 했군.”
“크흠. 뭐… 여기저기 인맥을 좀 동원했을 뿐이야. 그, 그럼 클로드 당신도 일단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함께 가지.”
뼈가 담긴 클로드의 말에 에렌이 헛기침하며 황급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저택의 수색을 지휘하기 위해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잔느의 저택은 여전히 비밀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저택 앞에 당도한 병사들이 저택 주위를 삽시간에 에워쌌다.
에렌의 지시와 함께 병사들이 무시무시한 기구로 굳건히 잠긴 두꺼운 철제문을 억지로 열었다. 어제와 달리, 저택을 지키는 보초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해. 마치 우리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레오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저택 안쪽에는 어제 그들이 해치운 이교도의 시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오스칼이 불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미 에렌과 에렌의 부하들은 빠른 속도로 저택 안으로 진입 중이었다.
그때 문득 클로드의 눈썹이 구겨졌다.
“저택 내부에서 마력이 느껴져. 잔느가 흡수한 내 마력이야.”
“뭐?”
“젠장, 마력 폭발인 것 같은데.”
웅웅웅-
저택 안에서 불길한 공명음이 울렸다.
“에렌! 함정이에요! 지금 당장 피해야 해요!”
저택 발치에서 안쪽을 지켜보던 오스칼이 소리를 질렀다.
저택 안채에 진입했던 병사들이 이상함을 느끼고는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저택 내부에서 불길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위험을 감지한 에렌의 부하들이 필사적으로 달렸다.
“저택 내부에서 수상한 빛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모두 바깥으로 피해!”
에렌이 다급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오스칼이 간절한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 저택 안의 사람들을 보호해야 해!”
“하지만 난 당신을 지켜야….”
“시간이 없어!”
잠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갈등하던 클로드가 오스칼의 애원에 입술을 깨물고는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쾅-
불과 몇 초 후,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저택 내부에서 거대한 마력 폭발이 일어났다.
강력한 소용돌이와 함께 저택이 산산조각이 나 무너져 내렸다. 폭발의 반동으로 저택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충격 속에서 간신히 오스칼을 붙잡은 레오가 오스칼의 몸을 감싸 안았다.
파직-파직-
붉은 소용돌이 사이로 은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은빛 보호막이 폭발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의 몸을 감쌌다.
“크윽.”
그러나, 혼자서 모두를 보호하기가 쉽지 않은 듯 클로드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털썩-
클로드가 보호막 안의 사람들을 저택 근처의 이끼가 낀 푹신한 바닥으로 날려 보냈다. 에렌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으으으.”
병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폭발의 파편 때문에 이마가 깨지고 코피를 흘리는 자도 있었지만,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어 보였다.
도리어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저택 외부에서 폭발의 충격을 간접적으로 받은 자들이었다. 폭발의 반동으로 튕겨 나가 돌바닥 위로 추락한 자들이 여기저기서 곡 소리를 냈다.
“윽.”
오스칼이 신음을 흘리며 부스스 눈을 떴다. 분명 폭발 때문에 공중에 떠올랐다 떨어졌는데 아픈 곳이 없었다.
몸 아래에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레오가 오스칼의 머리와 허리를 손으로 감싸 안은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레오! 괜찮아?”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오스칼이 당황해 다급하게 레오를 불렀다.
“머리가 좀 울리긴 하지만 괜찮… 윽.”
레오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 말고 얼굴을 구겼다. 오른팔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된 에렌이 오스칼을 향해 달려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레오를 살피는 오스칼의 모습에 에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오스칼, 다친 덴 없어?”
“전 괜찮아요. 그보다…. 방금 마력 폭발은 잔느의 짓이죠? 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젠장! 왕명이 떨어진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어. 게다가 내 사람들로만 은밀하게 움직였는데, 대체 아르투아가 왕궁의 어디까지 장악하고 있는 거지.”
에렌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공허한 눈으로 조금 전까지 저택이었던 폐허를 응시했다.
“아르투아를 잡을 증거가 눈앞에서 사라졌군.”
그의 목소리가 착잡했다.
“아뇨. 사실 증거라면….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에렌이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챈 레오가 몸을 일으켜 앉아 눈을 찡그렸다.
“물론, 누군가의 피를 좀 봐야 하는 일이지만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오스칼이, 창백한 낯빛으로 제게 다가오는 은발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어어얼대 안돼!”
레오와 에렌이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이래, 처음으로 한 목소리를 냈다. 보기 드문 광경에 오스칼이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
“그대가 아직 칼릭스 공작가의 누명을 밝힐 증거를 공개할 수 없다는 게 이런 이유였어? 절대 반대야!”
에렌은 오스칼이 클로드와 피의 맹약을 하고 칼릭스 공작가의 누명을 벗길 증거가 될 계약서를 얻었다는 것에 사뭇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계약서의 마법을 풀어낼 피를 건네는 대가로 클로드가 요구한 조건을 듣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난 찬성인데.”
클로드는 한꺼번에 거대한 마력을 소모한 탓에 지친 기색이었다. 그러나 입가엔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야말로 내 몸을 대가로 당신과 거래하겠다고 한 적 없거든?”
오스칼이 발끈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클로드를 향해 항의의 눈빛을 쏘아댔다. 클로드는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정보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대가는 내게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하니까.”
“언제는 내 것이 되겠다며? 나 덕분에 살았다며? 순 거짓말이었어….”
오스칼이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칼릭스 공작가의 반역을 조작한 계약서는 칼릭스 가문의 누명을 벗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꾸민 흑막의 목을 죌 수도 있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마침 클로드가 흑마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도 했으니, 그 기념으로 계약자의 피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오스칼의 몸과 마음을 대가로 계약해야 한다는 앵무새 같은 대답이었다.
이럴 거면 도대체 저주가 풀리기 전과 달라진 게 뭐란 말인지.
“내가 더는 흑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완성된 맹약을 되돌릴 순 없어. 내게 맹약의 법칙을 깨고 계약자의 피를 넘겨줄 만큼 소중한 건 당신뿐인 걸 어떡해?”
클로드가 눈을 접어 웃으며 애교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아연실색한 에렌이 칼을 뽑아 들었다. 레오 역시 형형한 눈으로 검을 들었다.
“이 쓸모도 없는 변태 같은 놈은 그냥 그 지하실에 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오스칼에게 그 교활한 마법을 썼다간, 네 놈은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내가 없었다면 당신들은 이미 마력 폭발로 다 죽었을걸? 역시 그곳에 내버려 둘 걸 그랬어. 그랬으면 오스칼은 나만의 것일 텐데.”
클로드가 검을 든 두 남자를 향해 오만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게 제가 이자를 구하지 말자고 했잖습니까?”
“자네야 말로, 가문의 누명을 벗기겠다고 오스칼에게 저런 황당한 계약을 시켜?”
“황당한 계약이라? 오스칼을 상대로 황당한 연극을 하고 있는 고귀한 나리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냥 이 자리에서 결판을…!”
세 남자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동시에 으르렁거렸다. 전운이 감도는 세 사람 사이에서 무시무시한 불꽃이 타오르려던 그때,
“셋 다 내가 죽여버리기 전에, 닥쳐요!”
검을 빼 든 오스칼이 환장의 조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