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아아아악!”
저택 안에서 찢어지는 고성이 울렸다. 잔느의 눈이 분노로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넝마 조각처럼 너절해진 노파가 몸을 웅크렸다.
검은 숲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자를 잡았다는 부하들의 전언에 저택을 비운 사이, 쥐새끼들이 저택을 헤집어 놓았다.
스무 명이 넘는 부하들을 잃은 것도 화가 치미는데, 쥐새끼들은 겨우 잡아둔 클로드 드보이스까지 빼돌렸다.
쨍그랑-
분을 못 이겨 화병을 집어 던진 잔느가 씩씩거렸다. 깨어진 화병 조각을 맞은 노파가 울먹였다. 노파의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 고대 마녀의 저주를 깨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예가네초프.”
잔느의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에 예가네초프가 벌벌 떨었다.
“나, 난 몰라. 모른다고.”
퍼억-
잔느가 예가네초프를 향해 발길질했다. 예가네초프의 늙은 몸이 속절없이 바닥을 굴렀다. 잔느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이 씩씩거렸다.
“검은 숲의 저주는 500년간 누구도 풀지 못한 가장 강력한 저주였어. 그런데 누군가 그 저주를 깨트렸지. 방금 또 어떤 자가 그 저주와 동일한 마력으로 만든 결계까지 깨트렸어.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야. 아마 한사람이겠지.”
잔느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예가네초프를 쏘아보았다.
“네가 저주를 깬 자를 안내했다면서? 그자들이 누구야? 지금이라도 털어놓으면 특별히 널 보내줄게. 우린 먼 친척이잖아, 고대 마녀의 후손. 안 그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예가네초프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청년 두 명이 날 찾아왔는데…. 그중 한 청년이 칼로 결계를 내리쳤더니 저주가 깨졌어. 분명 펴, 평범한 청년이었는데… 펴, 평범하지 않았어.”
“허튼소리 작작 해.”
“나도 그, 그런 건 처음 봤어. 평범해 보였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어….”
잔느가 붉은 눈을 표독스럽게 뜨며 예가네초프를 향해 윽박질렀다.
“그래서, 그자들의 정체를 전혀 모른다고?”
“서, 서로를 오스칼과 레오라고 불렀어.”
예가네초프는 두려운 듯 쉰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잔느가 더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예가네초프가 건네는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지갑으로 사용하는 돈주머니였다. 주머니 겉에 자수로 새겨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레오폴드 칼릭스]
잔느가 주머니를 와락 움켜쥐며 몸을 부들거렸다.
“하! 칼릭스와 오스칼이라고! 그 지긋지긋한 이름들이 또!”
신경질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잔느의 모습에 예가네초프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고개를 옹송그렸다.
“사, 사실대로 다 말했으니 날 보내줘.”
애원하는 듯한 노파의 목소리에 잔느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보내줄게.”
잔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잔느 곁에 섰던 부하가 예가네초프에게 칼을 휘둘렀다.
“커억.”
예가네초프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잔느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보내준다고 했지, 살려준다고는 안 했잖아?”
잔느가 예가네초프의 시체에서 몸을 돌렸다. 이내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칼릭스, 그리고 오스칼.”
잔느가 천천히 혀끝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25년 전 자신의 계획을 방해했던 칼릭스와 오스칼은 분명 사라졌다. 그런데 그 계획을 다시 시행하려는 이때, 또다시 제 앞에 그 이름이 나타났다.
으득, 잔느가 이를 갈았다.
***
호화로운 마차 안으로 아침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눈썹 위로 떨어지는 황금색 빛줄기에 에렌이 눈을 찡그렸다.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아르투아가 에렌을 암살하려던 이유가 명백해졌다.
에렌을 먼저 제거한 뒤, 국왕을 없앤다. 이미 국왕을 세뇌해 손아귀에 쥐었다면 국왕의 죽음을 조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에렌과 국왕이 사라지면 아르투아는 합법적인 왕위계승자가 된다. 그리고 이에 협조한 대가로, 잔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것이겠지.
마차에서 내려 왕궁을 급히 가로지른 에렌이 국왕의 침실 앞에서 숨을 헐떡였다.
“아뢰어 주시게.”
“대공 전하. 송구하지만, 아직 국왕 폐하께서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급한 일이네. 내가 아침부터 폐하의 침실까지 달려온 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에렌의 재촉에 시종장이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국왕은 간밤의 질펀한 술자리 덕분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렌의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국왕의 침실에 들어갔다.
고성이 오가고,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시라 하십니다.”
혹이 난 이마를 문지르며 시종장이 밖으로 나왔다. 에렌이 시종장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내가 네놈을 아침 댓바람부터 봐야겠느냐?”
“긴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국왕의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에렌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국왕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어젯밤의 과음으로 머리가 울렸다.
“감히 내 아침잠을 방해하다니. 반역이라도 고변하러 온 것이 아니면 경을 칠 줄 알거라.”
“아르투아 대공이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잠이 확 달아난 국왕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반역이라니, 그것도 숙부님이?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아르투아 대공, 그리고 왕실 근위대장이 야합해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25년 전 루이스터 대공의 반역도 어쩌면 그들이 꾸민 짓일지도 모릅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국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공과 근위대장은 국방을 책임지고 있어 가까운 사이인 것이 당연하다. 네 놈이 예전부터 숙부님을 음해하려 드는구나!”
“최근 숙부님이 사생아를 정식 후계자로 들이려 한다는 소문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에렌이 의도적으로 아르투아 대공을 숙부라 지칭했다. 그의 아들이라면 자신들의 사촌이 되고, 훗날 왕실의 정식 계승권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국왕이 흠칫 놀란 표정을 했다.
“그래. 숙부님이 최근에 그 문제를 내게 와서 상의했다. 숙부님과 나 사이에 비밀 따윈 없어. 너같이 음흉한 놈과는 다르니까. 돌아오는 수확제에 그 아이를 정식으로 공표할 생각이다.”
국왕은 자신과 아르투아 대공 사이가 건재하고, 두 사람 사이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을 과시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형님. 숙부님은 이미 자식이 둘이나 있습니다. 정체 모를 정부의 소생을 정식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아들에게 영지와 작위를 물려주기 위해서겠지. 너는 지금 내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 그리고 내가 언제 네게 날 형님이라 부르도록 허락했지?”
국왕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국왕도 아르투아 대공의 행동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은 내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의심을 외면해왔다.
“아르투아 대공의 정부는 25년 전 튈르리를 탈옥한 마녀, 잔느라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근위대장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근위대장이 과거 세드릭 칼릭스의 반역을 증언한 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에렌이 25년 전 비공개로 진행된 세드릭 칼릭스의 재판 기록과 잔느의 범죄기록, 근위대장 명의의 집문서를 국왕 앞에 들이밀었다.
“아르투아 대공이 튈르리 감옥의 경비체계를 바꾸라 지시하자 튈르리 감옥이 습격당했고, 제가 죽을 뻔했습니다.
얼마 전에도 제 농장에서 저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지요. 그리고 이젠 숨겨두었던 숙부의 아들까지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에렌이 내민 서류들을 응시하는 국왕의 푸른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르투아 대공이 그 일에 관여했다는 증좌라도 있는 것이냐?”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대공의 정부를 먼저 잡아들여야 합니다. 왕명으로 저택을 수색하고 탈옥한 범죄자 잔느를 체포하십시오. 그러면 아르투아 대공저를 수색할 만한 증거가 나올 겁니다.”
에렌이 저택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흑마법의 흔적을 떠올리며 말했다. 에렌의 단호한 태도에 국왕이 당황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 그럼 근위대에게 왕명을….”
“왕실 근위대는 이미 아르투아 대공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왕궁의 다른 기사단을 보내야 합니다.”
“근위대 외의 왕국 기사단은…. 이미 해산된 지 오래다.”
젠장. 그랬지.
‘버림받은 기사단’을 떠올린 에렌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가 애써 정치를 외면해 오는 동안, 궁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있었다.
“그것도 분명 아르투아 대공이 주도한 것이겠지요.”
“대공이 왕실 근위대가 있는데, 굳이 돈을 들여 왕국의 하급 기사단을 유지할 필요가 있냐고….”
에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르투아 대공은 대체 어디까지 준비해 둔 것일까.
“그럼 제 사병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왕명을 내려주십시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초조한 표정의 국왕이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던 국왕이 종을 울려 서기관을 불렀다. 서기관이 빠른 속도로 왕명을 써 내려갔다.
***
아르투아 대공저의 집무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표정엔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뭔가를 눈치채고 움직이는 것 같다는군. 암살의 배후가 나라고 의심하는 모양이야.”
아르투아가 손안에서 밀서를 구겼다. 국왕의 서기관은 그에게 매수된 지 오래였다.
“에르네스트를 그날 살롱에서 확실히 제거했어야 합니다.”
잔느는 아르투아를 책망하는 목소리를 냈다. 에르네스트 대공은 다루기가 가장 까다로운 자였다.
그런 자일수록 빨리 제거하는 게 옳았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고, 왕좌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사이가 각별한 가족도, 연인도 없었다.
욕망도 약점도 없어 협박이 통하지 않았으며 구슬리기도 어려운 자. 잔느의 힘이 통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클로드 드보이스의 힘이 필요했는데!
잔느의 질책에 아르투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놈이 귀신같이 살아남는 걸 어쩌나? 살롱에서도 농장에서도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영락없이 살아 나왔어.”
“일단 무리하게 그를 제거하는 것은 그만두지요. 만만치 않은 자이니, 꼬리가 길면 도리어 저희 쪽에서 약점을 잡히게 될 겁니다. 차차 그를 처리할 방법을 궁리하겠습니다.”
아르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 숨어들어 계획을 방해한 쥐새끼들은 누군가?”
“세드릭 칼릭스의 아들인 것 같더군요. 레오폴드 칼릭스, 그리고 그와 함께 다니는 오스칼이란 이름의 사내.”
두 사람의 이름을 읊조리며 잔느가 눈을 붉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