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눈을 뜬 클로드의 모습에 오스칼이 진심으로 안도한 듯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
“클로드! 살아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내가 상상한 재회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를 묶고 있던 사슬을 검으로 끊어내는 오스칼의 모습을 바라보며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느릿하지만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당신을 이 꼴로 만든 게 잔느야?”
오스칼이 상처투성이가 된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클로드를 이 모양으로 만드는 여자의 능력은 대체 어느 정도인 걸까. 아찔한 공포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 여자가 가진 마도구가 내 힘을 흡수했거든. 방심하다 당한 거야.”
“어쨌든 무사하니 됐지.”
오스칼이 그를 묶은 마지막 사슬을 끊어내며 활짝 웃었다. 클로드의 심장이 부드럽게 뛰었다.
심장이 멈추었다 다시 뛰기 시작한 이후, 심장이 내뿜는 마력이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흑마법과 같이 고통스러운 힘이 아니었다.
클로드가 손바닥을 펼치자 밝은 은빛이 피어올랐다.
이게 온전한 나의 힘이구나. 오스칼이 내게 준 소중한 힘. 클로드가 그의 심장을 뛰게 해 준 오스칼을 바라보며 아리땁게 웃었다.
“이제 난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된 것 같아. 내 몸의 중요한 부분이 당신에게만 반응하거든.”
“뭐…뭐라고?”
부적절한 단어들의 조합에 오스칼이 입을 뻐끔거렸다.
“내 심장 말이야.”
“윽! 당신이 옛날 사람이라 일상적인 표현에 서툰 건 알겠지만, 제발 그런 오해할 만한 표현은 자제해줘.”
오스칼이 괜히 역정을 냈다. 클로드는 화를 내는 오스칼의 얼굴도 좋았다.
“당신이 날 구했어.”
엉망이었던 자신의 삶을 구원한 사람이 오스칼이란 게 기뻤다. 오스칼이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도 기뻤다. 클로드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오스칼을 향해 팔을 뻗었다.
채앵-
순식간에 클로드의 목으로 두 개의 칼날이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레오와 에렌이 양쪽에서 검을 들고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쯤 하지, 변태 양반.”
“지난번에 내가 한 번만 더 오스칼에게 허튼짓했다간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했을 텐데.”
두 사람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클로드가 느긋하게 그의 은발을 쓸어올렸다.
“하여간, 나의 오스칼 님은 인기가 많아서 탈이야.”
“누, 누가 네 오스칼이야?”
조금 전까지 사슬에 묶여 있던 헐벗은 남자가 자신을 ‘나의 오스칼 님’이라고 부르자 어쩐지 야릇한 기분이 든 오스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주인님’이란 소리를 들은 것 같달까.
“그럼 내가 당신 것이 되면 될까? 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칠게.”
클로드가 내뱉은 터무니없는 소리에 에렌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는 레오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이 자식이 이런 성가신 놈이라고 왜 말 안 했어?”
“아까 따뜻한 마음 운운하며 저놈을 구하자고 한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레오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에렌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다들 작작 좀 해요! 내가 전부 베어버리기 전에!”
오스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 남자가 한자리에 모이자 아주 환장의 조합이었다. 긴장감 가득한 흑막의 지하 감옥에서 무슨 헛소리들인지!
오스칼의 호통에 세 남자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단테는 눈 앞에 펼쳐진 진풍경 앞에서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른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대공, 왕국 최고의 실력을 갖춘 기사, 흑마법을 쓰는 정보상 수장.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해도 이 세 사람을 향해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해 단번에 입을 다물게 하는 사람은 여기 있는 한 사람뿐일 거다.
“불청객이 온 모양이야.”
지하실의 어색한 적막을 깬 것은 클로드였다.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바깥에서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잔느의 구슬이 흡수했던 자신의 마력이었다. 이곳에 걸어둔 결계가 깨진 것을 눈치채고 잔느가 돌아온 것이다.
클로드의 목소리에 오스칼이 자신의 칼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클로드를 잔뜩 노려보던 남자들도 순식간에 경계를 올렸다.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요란한 발소리를 듣고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바깥에는 꽤 많은 숫자의 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긴장한 오스칼의 모습에 클로드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나와 함께 있는데 당신은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오스칼이 눈을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으악!”
오스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클로드가 오스칼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맨가슴에 안긴 오스칼이 깜짝 놀라 버둥거렸다.
그 모습에 레오와 에렌이 다시 한번 클로드에게 검을 겨누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당장 오스칼을 내려놓지 못해?”
클로드가 두 남자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고 오스칼을 향해 웃었다.
“저 성가신 남자들까지 안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세 남자를 흘겨보며 새침한 목소리를 냈다.
“당신들을 구하긴 싫지만, 오스칼이 원할테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빛 소용돌이가 지하실을 에워쌌다. 어느덧 지하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잡아라!”
요란한 굉음과 함께 이교도들이 지하실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우당탕-
은빛의 연기가 걷히고, 세 남자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남자들이 몸을 일으키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오스칼?”
오스칼이 없는 것을 알아챈 레오가 다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오스칼을 찾았다.
“이, 변태 자식! 대체 어딨는 거야? 사람을 이런 식으로 바닥에 패대기를 쳐?”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에렌이 씩씩거렸다. 온몸이 마른 잔디로 뒤덮인 단테가 급히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그들이 클로드의 마법으로 내동댕이쳐진 곳은 뤼미에르 가옥의 정원이었다. 레오가 재빨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꼴이 볼만하군.”
클로드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쿡쿡대며 웃었다.
“야, 지금 남의 집 지붕에서 뭐 하는 거야.”
오스칼이 부루퉁한 목소리를 냈다. 오스칼은 뤼미에르 가옥의 지붕 위에서 반쯤 벗은 클로드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번 죽었다 깨어난 탓에 몸이 성치 않아 마법이 제대로 안 들었어.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순간이동 시키려면 마력 소모가 얼마나 큰지 알아?”
클로드가 실수였다는 듯 살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 내려놓고 얘기해. 몸도 성치 않다면서.”
“당신을 안고 있는 건 하나도 안 힘들어.”
“수작 부리지 말고 얼른 내려놔.”
클로드는 아쉽다는 표정을 한번 짓고는 조심스럽게 오스칼을 지붕 위에 내려놓았다. 아래에서는 에렌과 단테가 오스칼을 정신없이 찾고 있었다.
오스칼이 지붕 위에 있음을 알리려고 그들을 부르려던 찰나, 클로드가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그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으악.”
갑작스럽게 클로드의 맨가슴을 만지게 된 오스칼이 깜짝 놀라 지붕에서 발을 헛디뎠다. 클로드가 얼른 오스칼의 허리를 잡아 그에게로 끌어당겼다.
“흡!”
순식간에 클로드에게 한 손을 잡힌 채, 그의 몸쪽으로 바짝 안긴 자세가 된 오스칼이 당황한 듯 숨을 들이켰다.
클로드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해쓱해진 그의 얼굴이 어쩐지 더욱 야릇하게 느껴졌다.
분명 자신에게 묶고 가두는 취향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스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클로드가 오스칼을 가만히 응시했다. 문득, 오스칼이 그의 변화를 알아챘다.
“당신,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했어!”
“흑마법의 저주는 눈을 붉게 만들어. 하지만 이제 내게 걸린 모든 저주가 풀렸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말하자면 길지만… 이제 난 흑마법을 쓰지 않아.”
“그럼 방금 마법은 뭐야?”
난데없는 소리에 오스칼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직 나만의 마법이야. 모두 당신 덕분이지. 더는 흑마법이 날 고통스럽게 하진 않을 거야.”
“뭔진 모르겠지만 꽤 좋은 것처럼 들리네.”
“이제 흑마법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의 피와 영혼을 가질 필요도 없어.”
“잘됐다! 늘 생각했던 건데, 피와 영혼으로 운영되는 흥신소 같은 정보상은 너무 구식 악당 같았어.”
“구식… 악당이라고…?”
클로드가 조용히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당신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어 다행이야.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오스칼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원작의 그는 500년간 심장을 속박한 저주로 괴로워하며 불행했으니까.
“당신은 정말 다정하구나.”
“언제는 냉혹하다며?”
오스칼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오스칼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본 클로드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은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오스칼을 방에 내려둔 그가 속삭였다.
“고마워. 날 구해줘서.”
방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고 클로드는 곧 은빛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
“오스칼?”
오스칼의 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레오가 달려왔다. 손에 검을 든 채였다. 에렌과 단테가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 변태 놈이 그대에게 허튼짓을 한 건 아니지?”
에렌이 이를 뿌드득 갈며 말했다.
“그…. 그 사람이 옛날 사람이라 사회성이나 언어 구사에 문제가 있긴 한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거예요.”
“그 남자가 500년 동안 해친 사람이 족히 1,000명은 더 될 텐데요.”
단테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착해질…. 나쁜 사람이네요. 하하….”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 오스칼이 어색한 듯 웃음을 지었다. 이내 오스칼에게서 시선을 거둔 단테가 에렌을 바라보았다.
“아르투아 대공이 잔느와 근위대장을 이용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확실하니 당장이라도 그들을 치시지요.”
단테의 제안에 레오가 얼굴을 굳히며 반박했다.
“상대는 왕국 최고의 권력자와 흑마법을 손에 넣은 여자입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도리어 당하는 건 이쪽일 겁니다.”
“결국, 그 저택에서 성가신 변태밖에 찾아내지 못했군.”
에렌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흑막이 누구인지, 그들이 뭘 꾸미려는지 알아냈으니 수확은 있었어요. 게다가 우리가 같은 적을 두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협력할 수도 있죠. 다 같이 한배를 탄 셈이잖아요?”
오스칼이 싱긋 웃었다. 에렌과 레오는 어딘가 불쾌한 표정을 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흑막보다 더 높은 자를 찾아갈 수밖에. 명분과 증거, 모두 필요해.”
에렌이 낮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