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64)화 (64/138)

64화



 

며칠 전, 평소와는 다른 붉은 달이 뜬 밤.

클로드는 잔느의 저택 지붕 위에 앉아 그의 완벽한 계획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아는 오스칼이라면 그가 남겨둔 쪽지의 주소가 잔느의 거처란 것을 알아채고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 전에 내가 먼저 잔느를 사로잡아 선물로 주면 날 칭찬해 주겠지?”

아니지, 그냥 이 저택 전체를 송두리째 바쳐야 하나?

클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허공에 양피지와 깃털 펜이 나타나 거칠게 몸을 파닥거리며 그를 만류했다.

클로드가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의욕만 앞서 온 세계의 검을 쓸어와 검 잔치를 벌였을 때 질색하던 오스칼의 반응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맞아. 오스칼은 원하는 것 딱 하나면 돼. 그녀는 욕심쟁이가 아니거든.”

깃털 펜이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자신의 보드라운 털끝을 공중에서 흔들었다.

역시 잔느 하나만을 붙잡기로 마음을 정한 클로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그는 틈만 나면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고작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일이 내게 특별해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구름 사이로 흩어지는 붉은 달빛을 보며 클로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구름 떼가 밤바람에 느리게 움직였다.

이윽고 달이 구름 뒤에 숨자, 저택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림자도 없는 암흑 속에서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카롭게 빛을 뿜은 붉은 눈동자가 곧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

칠흑 같은 저택 내부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클로드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력을 좇았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마력에 클로드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별것 아니군.’

이 정도로 약한 마력이라면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었다.

클로드가 자신의 힘을 개방했다. 그의 몸을 둘러싼 공기에서 강한 마기가 일렁였다. 거대한 마력이 어둠을 뚫고 미력한 마력의 근원을 향해 내달렸다.

쉬이익-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흘려보낸 마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 한번 마력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신의 마력은 어디론가 빨려들어 간 듯 사라져 버렸다.

“이게 대체…?”

콰앙-

클로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마력 폭발과 함께 그의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윽.”

클로드가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신음을 흘렸다. 눅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내 그의 신경 하나하나에 마력이 달라붙어 견디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는 이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주에 갇혀있던 그의 심장에서 느껴지던 고통. 이것은 분명 자신의 마력이었다.

온몸을 덮친 고통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눈앞에 뾰족한 구두코가 보였다. 클로드가 눈을 들어 구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하하하하.”

환희에 찬 여자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찢어지듯 소름 끼치는 음성에 클로드의 몸이 움찔거렸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거랍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은 더 강한 사람으로 제압하라. 당신의 그 강한 마력에 도리어 당신이 당할 줄은 몰랐겠죠?”

요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컴컴한 실내에 불길이 일었다. 그러자 오래된 지하 감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큭.”

클로드가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가 손에 쥔 구슬을 굴렸다.

그가 흘려보낸 마력을 모두 흡수한 검은 구슬이 거대한 마력에 흥분한 듯 붉게 타올랐다. 클로드의 마력을 머금은 구슬이 그 힘으로 클로드를 제압하고 있었다.

“밤새 머리 위에서 그렇게 강한 마력을 뿜어대고 있는데, 제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나요? 이래서 강한 자들은 다루기가 쉽지요. 자신의 힘을 믿고 자만하거든.”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자가 붉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바닥에 쓰러진 클로드가 잔느의 조롱에 침음했다.

잔느가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올수록 클로드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쳤다. 본능적인 위협에 반응하듯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클로드의 몸에서 빠져나온 마력은 나오는 족족 잔느의 손아귀에 들린 구슬로 흡수되었다.

잔느가 천천히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클로드의 은발을 손가락으로 살살 꼬아댔다. 클로드는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손가락에 몸을 흠칫 떨었다.

저항해 보려고 해도, 강한 마력에 붙들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잔느가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클로드의 턱을 움켜쥐고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클로드 드보이스. 드디어 나타났군. 당신이 내 뒤를 캐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 당신이 날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큭, 그게 무슨….”

“흑마법의 원천인 당신의 심장을 갖고 싶었었거든. 이런 하찮은 구슬 따위가 아니라.”

잔느가 손바닥을 열어 붉은빛을 뿜어내는 구슬을 내보였다. 클로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구슬 안에 있는 힘은 틀림없이 그의 마력이었다.

“이건 인간의 어두운 힘을 흡수해 마력으로 바꾸어 주는 마도구야. 하찮은 인간에게선 더러운 욕망이나 열등감을 빨아들이지. 하지만 어두운 힘 그 자체인 당신에게선 마력을 얻을 수 있어.”

잔느가 비릿하게 웃었다. 클로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에게 저주를 건 고대 마녀가 나의 먼 조상이거든.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물려받은 건 마력이 아니라, 마녀의 후손이라는 멸시와 천대뿐이었지.”

“역시, 그 마도구는 고대 마녀에게서 얻은 건가?”

클로드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신음을 흘렸다. 그는 줄곧 잔느가 흑마법을 다룰 수 있는 고급 마도구를 가진 것에 의문을 품었었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보랄까? 내 할머니가 보관하던 걸 내가 훔쳤지.”

잔느가 구슬을 클로드의 눈앞에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게 있으면서도 왜 내 심장을 가지려는 거지?”

“이게 안 통하는 사람도 있거든.”

잔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운 힘에만 반응하는 마도구인 탓에, 25년 전 그 힘이 통하지 않는 올곧은 근위대원 따위에게 붙잡히지 않았던가!

“무한한 힘을 가진 네 심장만 있으면 당장 이 왕국을 내 발아래에 둘 수 있어. 얼마나 황홀해? 가장 비천했던 여자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서다니!”

잔느가 입을 벌려 웃었다. 어느새 구슬이 뿜어내는 마력이 클로드의 사지를 단단히 옭아매었다. 클로드가 완전히 결박된 것을 확인한 잔느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큭.”

잔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클로드가 있는 힘을 다해 마력을 개방했다.

지이잉-

잔느의 구슬이 강하게 공명했다.

“좋아, 더 해봐. 당신이 힘을 꺼내 보일수록, 난 더 강해질 테니까.”

잔느가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마치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끔찍한 소리였다.

한참을 웃던 잔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린 클로드의 몸을 구둣발로 밀었다. 잔느의 발길질에 클로드의 몸이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웠다.

온몸이 마비된 클로드가 경멸하는 눈으로 잔느를 노려보았다. 잔뜩 힘을 준 그의 눈가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볼 것 없어. 당신도 이런 짓, 딴 놈들 상대로 꽤 많이 했잖아? 악당이란 원래 이런 거라고.”

한쪽 입꼬리를 올린 잔느가 날카로운 단도로 클로드의 셔츠를 찢어냈다. 잔느의 눈앞에 그의 탄탄한 상체가 하얀 맨살을 드러냈다.

클로드가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의 가슴 근육이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잔느가 그의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윽!”

뱀의 혓바닥 같은 손길에 클로드가 불쾌한 듯 신음했다. 잔느의 손길을 거부하듯 클로드의 심장이 강하게 펄떡거렸다. 강한 심장의 고동에 잔느의 눈이 번뜩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클로드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가슴을 찢기고 심장을 빼앗기는 비참한 최후뿐이었다.

“솔직히, 멍청한 놈들을 허수아비처럼 앞세우는 것도 이제 질렸어. 네 심장만 얻으면 이 힘만으로도 세계를 내 발아래에 두겠지.”

잔느가 손에 쥔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클로드의 왼쪽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죽음이 두려워졌다.

‘이제야 살고 싶어졌는데. 살아서 그 사람을 계속 보고 싶었어.’

클로드는 마지막으로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암전이었다.

***

쿠콰아앙-

단도의 끝이 클로드의 가슴에 닿기 직전, 폭발음과 함께 잔느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아악! 젠장, 뭐야?”

잔느가 엉망이 된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며 욕을 내뱉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 들고 살기 어린 눈으로 쓰러져 있는 남자를 향해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남자의 가슴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드러난 그의 피부가 창백하게 빛났다.

잔느가 그의 가슴을 향해 다시 한번 단도를 힘껏 휘둘렀다.

꽝-

“아악!”

칼날이 클로드의 가슴에 닿기를 거부하듯 튕겨 나갔다. 이번에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날아가 지하실 벽에 부딪힌 잔느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그녀가 거칠게 클로드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의 심장이 더는 뛰고 있지 않았다. 잔느에게 자신을 넘기지 않겠다는 듯, 심장은 침묵했다.

“젠장, 젠장, 젠장!”

잔느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다 잡은 물고기를!

“마, 마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저택의 하녀가 지하실에서 울려 퍼지는 소란에 허둥지둥 달려와 잔느의 안위를 살폈다.

“당장 꺼져!”

신경이 날카로워진 잔느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마치 잔느의 분노에 공명하듯 구슬에서 마력이 폭발해 강력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그 충격에 지하실을 살피던 하녀의 몸이 단숨에 날아가 괴이한 자세로 뒤집혀 쓰러졌다.

잔느가 클로드의 얼굴을 거칠게 돌려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이 괴물 자식!”

다시 한번 욕을 내뱉은 잔느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그를 걷어찼다.

드디어 가장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줄 알았는데!

잔느는 클로드의 몸뚱이를 지하 감옥 안의 쇠사슬에 묶어 매달았다. 그의 몸은 죽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찰싹- 찰싹-

마치 잠든 듯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오른 잔느가 클로드의 얼굴을 포악스럽게 때렸다. 하지만 피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도 의식은 돌아오지 않는 듯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잔느가 분노에 찬 얼굴로 감옥을 나섰다. 그리고 남아 있는 구슬의 마력으로 결계를 만들어냈다. 붉은빛이 지하 감옥을 감쌌다.

“망할!”

잔느가 욕을 중얼거렸다. 잔느의 눈짓에 충직한 이교도 부하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잔느가 입구에 나동그라져 있던 하녀의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쓸모없는 것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두 없애. 지하실에 있는 걸 지켜야 해. 병사를 모아 저택 전체에 보초를 세워.”

“명 받들겠습니다.”

〈불멸의 저주를 끝낸 자, 심장의 주인이 되리라.〉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던 잔느가 검은 숲의 텅 빈 나무 구멍에 새겨져 있던 저주를 떠올렸다. 클로드의 심장을 조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심장의 주인이 따로 있다.’

잔느가 뭔가 떠오른 듯 이교도 수하를 향해 명령했다.

“샤르트르로 가. 검은 숲의 저주를 깬 자가 누군지 조사해.”

“예.”

명을 받은 이교도인들이 샤르트르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