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인적이 드문 시에나의 모처.
십수 년 전, 지체 높은 귀족이 살다가 떠났다는 빈 고택에 몇 주 전부터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잿빛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2층짜리 저택은 창문마다 덧문을 대어 어딘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오스칼과 레오는 저택 근처 무성한 덤불 뒤에 몸을 숨긴 채, 고풍스러운 저택의 정문을 한 시간 째 지켜보는 중이었다.
저택을 두른 높은 담과 울타리에는 아카시아 넝쿨이 빼곡히 얽혀 있어 내부가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철문 앞에서 덩치 좋은 두 남자가 보초를 섰다. 오스칼은 뭐라도 알아내기 위해 정문의 단단한 쇠창살 너머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얼핏 들여다보이는 문 안쪽에도 무장한 사내들이 서성댔다.
“복식을 보면 이교도가 분명한데. 아무리 큰 저택이라고 해도, 이렇게 인적도 드문데 저렇게까지 경비를 세울 이유가 있나?”
오스칼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곳에 무언가 부적절한 것이 숨겨져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느낌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잔느라는 여자를 지키고 있겠지.”
“몰래 담이라도 넘어 들어가 볼까 했더니, 저렇게 철저히 감시해선 무리겠어.”
“그래, 다른 방법을 알아보….”
“대놓고 난입하는 수밖에.”
“뭐?”
좀이 쑤신다는 표정을 한 오스칼이 터무니없는 말을 꺼냈다. 레오가 황당한 듯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문득 오스칼이 몸을 낮추고 레오를 불렀다.
“잠깐! 저기 좀 봐.”
저택의 대문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검은 마차 한 대가 정문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나왔다. 오스칼과 레오가 빽빽하게 엉킨 수풀 아래로 몸을 납작하게 숙였다.
오스칼이 풀 위로 눈만 빼꼼히 들어 마차의 안을 살피려 애썼다. 정문의 보초들이 빠져나가는 마차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저택에서 높은 사람이 외출하는 게 틀림없어. 분명 잔느겠지? 저 마차를 미행해야 하나?”
마치 추적 임무라도 부여받은 비밀 요원이라도 된 기분에 오스칼의 목소리엔 흥분이 서렸다. 오스칼의 상기된 기분을 눈치챈 레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저 마차를 쫓는 건 무리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말을 타고 마차를 쫓으면 바로 발각당할 거야.”
틀린 게 없는 말에 살짝 시무룩해졌다. 오스칼이 다시 수풀 너머를 슬쩍 넘겨다보았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이 저택을 습격할 적기인 것 같군.”
오스칼이 눈을 빛냈다. 레오가 얼빠진 눈으로 오스칼을 내려다보았다.
“저택에 난입하겠단 말이 진심인가?”
“당연하지! 방금 마차를 배웅하면서 저택 안에서 보초를 서던 남자가 밖으로 나왔어. 그가 정문의 보초들과 잡담 중인 거 보이지? 분명 잔느가 외출해서 경계가 풀어진 거야. 그렇다면 지금이 저택을 기습할 때란 거지.”
오스칼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레오가 굳은 표정으로 저택의 보초들과 오스칼을 번갈아 살폈다.
“신중해야 해. 섣불리 덤볐다간 위험해질 수 있어.”
“저 남자가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이 열릴 때를 노리자. 저택을 뒤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레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오스칼이 칼을 뽑아 들었다. 레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 오스칼의 팔목을 붙들었다.
“이렇게 아무 계획도 없이 들어갈 셈인가?”
“계획이야 있지. 우리의 계획은 ‘공격’이야.”
오스칼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덤불 너머로 무장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보다 체력이 좋으니까 곧장 정문을 돌파해. 난 널 엄호할게.”
“저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나.”
그러자 신뢰가 가득 담긴 초록색 눈이 레오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기껏해야 이교도 놈들이라고! 게다가 너와 함께 있는데 겁날 게 뭐가 있겠어?”
“너란 녀석은….”
레오의 걱정스러운 타박에 오스칼이 헤헤 웃었다. 그 천진한 웃음에 못 당하겠다는 듯 레오가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느새 전투 모드로 경계를 높인 그의 턱이 솟아올랐다.
“지금이야!”
오스칼의 신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잡담하며 시시덕거리던 중에 습격자가 나타나자, 보초들이 당황하여 허둥댔다.
레오는 자신의 검을 단단히 손에 쥐고, 정문을 향해 달렸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그의 압도적인 힘과 기술에 모두 튕겨 나갔다.
“침입자를 막아라!”
문밖의 소란에, 문 안을 지키고 서 있던 보초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레오는 적들이 문을 열고 나오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교도들을 질풍처럼 가르며 열린 문 사이를 돌파했다. 외부의 인원이 수세에 몰리자 저택 내부에 있던 자들까지 쏟아져 나왔다.
레오가 탱크처럼 정문까지 이르는 길을 쓸어낸 덕택에 오스칼은 수월하게 정문을 통과했다.
제게 달려드는 검을 흘려보내며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가볍게 적들을 쓰러뜨린 오스칼이 레오의 뒤를 따라 달렸다.
“역시 검수저 남자주인공 버프, 살아있네!”
눈 앞에 펼쳐진 세계관 최강자의 검격에 싱긋 웃은 오스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느새 레오는 저택 내부로 통하는 안채의 문을 코앞에 두고 그를 향해 쇄도하는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마치 그의 발자국처럼 보초들이 쓰러져있었다.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레오를 따라잡은 오스칼이 그의 곁에 합류했다.
살아남은 보초들이 두 사람의 곁으로 몰려들어 그들을 둥글게 포위했다.
“날 위해 일부러 이놈들을 좀 남겨둔 거야?”
“허튼소리.”
등을 맞댄 두 사람 사이에 옅은 웃음이 담긴 짧은 대화가 오갔다.
휙- 휘릭-
두 개의 검이 나란히 섬광을 만들며 허공을 갈랐다. 두 사람의 몸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마치 잘 짜인 듀엣 춤을 추는 것처럼 합을 이뤘다.
“끅.”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두 사람에게 덤벼들던 남자들이 모두 쓰러졌다. 열기로 양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오스칼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헉헉, 이제 더는 없는 거겠지?”
“그래, 다친 곳은 없나.”
그가 오스칼의 턱에 묻은 이교도의 핏방울을 손으로 훔쳐 주었다.
“응, 멀쩡해!”
“하지만 앞으로 둘이서 스무 명을 상대하는 건 사양하도록 하지.”
레오가 바닥에 낙엽처럼 뒹구는 적들을 눈으로 훑으며 투덜거렸다. 그 역시 격렬한 전투가 힘겨웠던 듯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레오의 투정에 오스칼이 입을 벌려 소리 내 웃었다.
“난 너와 함께라면 서른 명도 거뜬할 것 같은데.”
오스칼의 말에 레오의 귀에 열이 올랐다. 그는 괜히 멋쩍은 듯 저택 내부로 통하는 입구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저택 안으로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누군가 오기 전에 빨리 들어가지.”
***
저택 안은 여느 귀족 저택과 다를 것 없이 평범했다. 저택 안을 지키던 자들은 이미 모두 밖으로 나와 두 사람에게 최후를 맞이했던 모양인지, 내부는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흑마법을 쓰는 여자가 사는 곳이라는 말에, 동화책에서 보던 마녀의 집 같은 기괴한 분위기를 상상했었는데.
오스칼이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별거 없잖아? 난 마법 냄비나 저주 걸린 흑마법서, 도마뱀 꼬리가 전시된 진열장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
엉뚱한 오스칼의 말에 레오가 피식 웃었다.
“혹시 숨겨진 마법 빗자루라도 있는지 샅샅이 뒤져봐.”
“분명히 말해두지만, 빗자루가 있다면 그건 내거니까 탐내지 마.”
오스칼이 킬킬거렸다. 두 사람은 잔느가 저지른 악행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저택 1층을 지나 2층의 마지막 방까지 뒤졌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잔느가 이용한다는 마도구나, 인신매매단과 관련한 서류라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괜히 저택을 들쑤셔 얻은 것도 없이 위험만 무릅쓴 꼴이 되고 말았다.
오스칼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애써 들어왔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역시 클로드란 놈,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정보가 잘못된 거 아닌가.”
레오가 틈을 놓치지 않고 은근히 클로드를 책망했다.
부스럭-
그 순간 아래층에서 들린 인기척에 레오와 오스칼이 동시에 검을 몸 앞으로 바짝 당겼다. 순식간에 경계 태세로 돌변해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발소리를 죽인 채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층계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로브를 두른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로브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날카롭게 벼린 검을 들고 있었다. 오스칼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로브를 쓴 사람 중 덩치가 조금 더 큰 한 명이 움직였다. 조금 전 레오와 오스칼이 저택 안쪽으로 밀어놓은 남자의 시체를 확인하더니 다른 자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저자를 맡을 테니, 넌 다른 쪽을 맡아라.”
레오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 모양으로 오스칼에게 말했다. 오스칼이 알겠다는 듯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다.”
로브를 쓴 두 사람의 시선이 현관의 시체에 팔린 틈을 타, 레오와 오스칼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홱-
두 사람뿐이니 수월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로브를 쓴 자들은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인기척에 기민하게 몸을 움직인 그들은 재빨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채앵-
로브를 쓴 남자가 오스칼의 검을 단숨에 막아냈다. 두 개의 검이 요란하게 맞부딪치고, 오스칼의 눈앞에 금빛이 번쩍거렸다. 맞댄 검날 너머, 익숙한 푸른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비로소 로브 안의 얼굴을 확인한 오스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스칼의 얼굴을 확인한 상대의 검에서도 힘이 스르르 빠졌다.
“에, 에렌 경?”
“오스칼?”
오스칼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멍한 표정의 에렌이 머리에 뒤집어쓴 로브를 내리자 그의 눈부신 금발이 드러났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 곁에서 몇 번의 합을 나누고 있던 두 남자의 검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에렌이 손을 뻗어 로브를 쓴 남자를 저지했다. 에렌의 명령에 남자가 로브를 벗고 눈을 움직였다. 회색 눈동자가 어지럽게 에렌과 레오, 그리고 오스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경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검을 내린 오스칼이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를 내며 에렌을 바라보았다.
에렌이 눈을 깜빡였다. 오스칼이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스칼의 눈은 여전히 반짝이며 그를 바라봐 주었다.
며칠간 그를 괴롭히던 두통과 가슴 통증이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에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오스칼, 정말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