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레오는 오스칼을 침대에 눕힌 뒤, 허둥지둥 주방으로 달려가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기욤이 관리하는 구급상자를 뒤져 물약 몇 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수건까지 집어 든 그는 다시 오스칼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오스칼의 얼굴은 손이 델 듯이 뜨겁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땀과 물기에 젖은 머리칼이 파리한 볼에 붙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오스칼의 몸이 연신 떨렸다.
레오가 초조한 얼굴로 수건에 물을 적셔 오스칼의 이마에 올렸다.
철퍽-
미처 꼼꼼하게 짜내지 못한 수건에서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오스칼의 목 아래를 적셨다. 의식이 없는 중에도 질척해진 셔츠 깃의 감촉이 불쾌한지 오스칼이 코를 찡그렸다.
“젠장.”
그 모습을 본 레오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듯, 허겁지겁 수건을 다시 거둬들였다.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레오는 이런 상황에서 도통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을 책망하며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거친 손마디로 젖은 수건을 힘껏 비틀어 짰다.
그의 손아귀에서 물기를 잃은 수건이 얌전한 자태로 오스칼의 이마에 올라갔다. 이마를 식히는 찬 수건에 오스칼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으…. 흐으….”
그러나 이마의 열기에 물수건이 금방 뜨거워지고, 오스칼은 다시 달뜬 신음을 냈다. 오스칼이 하얗게 질린 손가락으로 이불 끝을 움켜쥐었다. 고통을 참아내는 중인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곱아들며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제길. 내가 대신 아픈 게 낫겠군.”
레오가 괴로운 듯 눈을 찌푸렸다. 얼른 다시 이마의 수건을 갈아주고 나자, 미처 단추가 다 잠기지 않은 셔츠 사이로 물방울이 맺힌 창백한 살결이 보였다.
“크흠.”
젖은 목덜미에 괜히 마른기침이 났다.
레오는 오스칼의 목덜미에 흘러내린 물을 조심스럽게 마른 수건으로 닦아냈다. 불현듯 그의 시선이 흐트러진 오스칼의 옷매무새 아래로 보이는 붕대 자락에 닿았다. 오스칼의 가슴께를 동여매고 있는 흰 천이 생경했다.
“이건….”
그가 자신도 모르게 붕대 자락의 끝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문득 오스칼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앗, 따가워.”
“갑자기 왜 그러나?”
“아, 사실 내가 얼마 전 강도를 잡다가 등을 좀 다쳤거든. 움직이면 따끔거려.”
“그 상처에 감아둔 건가. 붕대가 젖으면 상처의 예후가 좋지 못할 텐데.”
젖은 붕대를 갈아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같은 사내끼리라고는 하나, 이대로 오스칼의 옷을 전부 벗기자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으…으….”
오스칼이 괴로운 듯 앓는 소리를 흘렸다. 시간이 지나며 상태가 나빠지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아래층에서 챙겨온 약을 떠올린 그가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들었다. 레오가 물약이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의 주둥이를 오스칼의 입술에 가져갔다.
“으…. 콜록.”
그러나 의식이 없는 오스칼의 입은 달뜬 숨만 몰아쉴 뿐, 그 약을 목으로 넘기지 못했다. 오스칼이 삼키지 못한 갈색의 액체는 오스칼의 입술을 따라 그대로 목까지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젠장.”
레오가 약병을 꽉 움켜쥐었다. 약병을 쥔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어떻게든 약을 먹여야 하는데. 그가 기사들의 필독서 〈생존의 기술〉 ‘챕터 3. 의식을 잃은 동료를 돌보는 방법’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 기술을 실전에서 적용하는 건 처음인데.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흐으…. 레오….”
그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파랗게 질린 오스칼의 입술이 갈라졌다.
마침내 레오가 결심한 듯 약병을 서서히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병에 담긴 물약을 모두 입에 털어 넣은 그가, 입안 가득 갈색의 액체를 머금었다. 그의 혀끝에서 쓴맛이 감돌았다.
그가 잠시 숨을 참고 오스칼을 내려다보았다. 열에 달뜬 오스칼의 눈가가 붉었다.
‘이건 그냥, 생존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뿐이야.’
레오는 그 말을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오스칼에게 다가갔다.
살짝 열린 오스칼의 입술 앞에서 그가 멈칫, 짧게 멈추었다. 그가 주문처럼 외우던 문장이 그의 머릿속에서 새하얀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그의 입술과 오스칼의 입술이 맞닿았다. 오스칼이 뱉어내는 뜨거운 숨결이 레오의 입술에 와 닿았다. 어느새 두 사람의 열기 어린 숨이 뒤섞였다.
연갈색의 액체가 메마른 오스칼의 입술을 따라, 천천히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도 혀끝에서 느껴지는 쓴맛에 오스칼이 살짝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입술의 감각에 레오가 자신도 모르게 침대 끝을 움켜쥐었다.
레오는 한 방울의 약도 쏟아버리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그의 입에서 오스칼의 입으로 약을 흘려보냈다.
아득한 시간이 흐르고, 비로소 입안을 모두 비워낸 레오가 오스칼에게서 입술을 떼어내며 참았던 숨을 탁 토해냈다.
“으음.”
레오의 입술이 떨어지자 오스칼이 몸을 뒤척이며 소리를 냈다. 레오의 목덜미가 조금 달아올랐다. 그가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열을 이겨내려는 듯 꽉 말아 쥔 오스칼의 손마디가 힘겹게 떨리고 있었다. 고통을 참아내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안타까워 레오가 오스칼의 동그란 손가락을 살짝 감쌌다.
불덩이 같던 이마와 달리 오스칼의 손은 얼음장 같았다. 따뜻한 레오의 체온이 닿자 오스칼이 온기에 매달리듯 그의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그가 자신의 체온을 나눠 주듯 오스칼의 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을 얽었다.
그는 한쪽 손을 여전히 오스칼에게 맡긴 채 약간은 불편한 자세로 침대 옆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자신의 불편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는 오직 걱정스러운 눈으로 오스칼만 살폈다. 그가 나머지 한 손으로 오스칼의 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그는 하염없이 오스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이 어스름 속에 밝아질 무렵 약 기운이 도는 것인지, 쌕쌕거리던 오스칼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낮아졌다. 밤새 창백하던 오스칼의 손끝에도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밤새 오스칼의 곁을 지킨 레오가 오스칼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는 적당히 미지근해진 오스칼의 체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오스칼과 한쪽 손을 맞잡은 채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앞으로도 계속, 내가 널 지킬 수 있게 해줘.”
그리고는 천천히, 그가 오스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에르네스트 대공저의 지하실, 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 고통에 찬 신음으로 가득 찼다.
“이놈들에 대한 정보는 이게 전부인가?”
에렌이 손에 든 서류 뭉치를 구기며 싸늘한 목소리로 알랭을 응시했다. 농장의 사용인들이 에렌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예, 주인님.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알랭이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훔쳤다. 그가 준비한 일정 중에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소식은 그에게 있어 큰 충격이었다. 모든 것이 그의 책임인 것 같아 알랭은 연신 자책했다.
검은 말은 낭떠러지 아래의 계곡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말의 혈액과 먹이통에서 정확한 성분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약물이 검출되었다고 했다. 마구간에서 모종의 일이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왜 대공 전하를 해칠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에렌에게 말을 데려간 마구간지기가 온몸을 벌벌 떨며 애원했다. 어두운 지하실에 길게 세워둔 횃불에 비친 에렌의 얼굴이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네 놈이 분명 그 말을 관리하는 자가 아닌가.”
“하, 하지만 말의 먹이를 관리하는 건 외부에서 방문하는 잡역부들이 하고 있습니다.”
에렌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 중요한 일을 외부인들에게 맡겼다고? 대체 자네는 지금까지 농장의 마구간을 어떻게 관리해 온 건가?”
마구간지기의 변명에 더욱 화가 치민 에렌이 언성을 높였다.
“그, 그것이….”
“외부에서 드나드는 잡역부에게까지 내 일정을 노출할 정도로 관리가 엉망진창이었던 건가?”
“대, 대공 전하께서 방문하실 테니 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일러두었습니….”
“하! 네 놈들에게 이 왕국에서 최고 대우를 해주며 내 농장의 관리를 시키는 것이 대체 무엇 때문인데, 출신도 불분명한 외부인에게 네 놈들 업무를 떠넘겼다? 내가 언제 외부인을 내 농장에 들이라고 허락했지?”
“죄, 죄송합니다.”
에렌의 눈을 피해 농장을 방만하게 경영해 오던 사용인들이 바짝 얼어붙어 고개를 조아렸다.
“설령 네 놈들이 범인이 아니라 해도, 농장의 관리를 소홀히 하고 왕족을 위험하게 한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 네 놈들이 제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이놈들을 모두 가둬!”
“저, 전하. 다행히 다친 자가 없고 전하께서 그 말을 타지 않으셨으니 부디 서, 선처를….”
농장 총책임자의 터무니없는 읍소에 알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고. 저 눈치 없는 양반 같으니.’
에렌의 눈이 형형해졌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이 흉포했다.
“네 놈에게 가장 큰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을 모르느냐? 네 묵인이 없었다면 마구간지기가 감히 저런 짓을 했을 리 없겠지.”
“저, 전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무섭게 질책하는 에렌의 목소리에 당황한 농장책임자가 납작 엎드렸다.
“내가 아니라 다른 자가 말을 타서 다행이라고?”
에렌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번뜩이는 칼날에 사용인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검을 든 에렌의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였다.
“저, 전하. 살려주십시오!”
“만약 나 대신 그 사람이 잘못됐다면 네 놈들을 가두는 데서 끝나지 않았을 거다. 지금 이렇게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에렌의 목소리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경멸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사용인들을 응시했다.
끼익-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손발이 묶인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복면을 쓴 남자의 손에 거칠게 끌려 들어왔다. 회색 눈동자의 남자가 에렌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대공 전하, 말 먹이를 관리하던 잡역부를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