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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57)화 (57/138)

57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걸 다 가진 남자.

에렌에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말들이자, 진실이었다. 왕궁 학자 테스는 에렌이 열세 살이 되던 해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왕자님처럼 뛰어난 두뇌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자는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이 나라 학자라면 누구든 제자로 모시고자 탐을 낼 것입니다.”

왕국 최고의 학자가 인정할 만큼, 에렌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행동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가 풀지 못하는 문제도, 그가 갖지 못한 것도 없었다. 오스칼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여인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강렬한 열망이 가슴속에서부터 솟아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견고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오스칼의 얼굴이 에렌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의 오뚝한 콧날이 오스칼의 코끝에 닿았다.

달콤한 바닐라 향이 젖은 비 냄새에 섞여 코끝을 마비시키자, 에렌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오스칼의 머리카락을 감아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이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금세 열기가 머리끝까지 올라, 그의 눈동자에 열감이 서렸다. 뜨거운 숨이 맞닿았다.

그리고 오스칼과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에렌의 이성이 가까스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고작 이따위가 왕국 최고의 냉철한 이성이라고?’

그가 자조했다. 오스칼의 눈빛에 서린 두려움, 놀란 듯 굳은 표정.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신이 든 그가, 입술이 맞닿기 전 겨우 자신의 입술을 오스칼의 귓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잘생기고 돈도 많은 사람이지.”

“자, 자꾸 날 놀리지 좀 말아요.”

잠시 멍해져 있던 오스칼이 그에게서 홱, 몸을 물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오스칼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댔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아찔했다.

그가 정말 제게 키스하려 했던 걸까. 잔뜩 긴장한 오스칼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하하, 마드모아젤을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거든.”

에렌이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크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기 가득한 그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은 휘어져 있지 않았다. 에렌이 가라앉은 눈을 감추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그쳤나 좀 확인해야겠어. 마드모아젤과 여기서 같이 밤을 보낼 순 없잖아?”

“당연하죠.”

오스칼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까스로 평온을 가장했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스칼이 무릎을 세워 몸을 웅크렸다.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에렌이 입을 꾹 다물고는 창문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을 응시했다. 어색한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비가 그칠 때까진 여기서 조금 더 기다려야겠어.”

에렌은 벽난로 앞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대로 오스칼을 등지고는 창문과 마주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에렌이 그의 얼굴을 손으로 한번 쓸었다. 그대로 멈춰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받아들이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욕망을 앞세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대로 그녀에게 입 맞췄다면 내게서 도망치는 수준이 아니라, 어쩌면 내 존재 자체를 마음속에서 아예 지워버렸겠지.’

그는 오스칼을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상체를 길게 내밀며 앉아, 깍지를 낀 손에 턱을 괴었다. 여전히 질척거리는 바지가 못 견디게 불쾌했다.

“하….”

에렌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오스칼에게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것은 다 주고 말았는데, 정작 오스칼은 그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에 목이 탔다.

그가 목 안쪽이 답답해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스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

갑작스레 쏟아진 가을 소나기 덕에 엉망이 된 것은, 비단 에렌이 준비한 데이트만은 아니었다. 레오는 팔짱을 낀 채 빗물에 푹 젖어 버린 빨랫감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래를 망친 걸 보면, 그 녀석이 내게 또 잔소리할 텐데.”

오스칼이 에렌을 만나러 자리를 비우게 되자, 이번엔 투구 대신 검을 날카롭게 갈아보겠다고 나선 레오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갈려 나가는 것은 검날이 아닌 그의 멘탈이었다.

검을 손질하고 있자니, 에렌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을 오스칼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상상 속 두 사람은 어딘가 다정하고, 묘하게 끈적해 보였다. 그러다 보면 레오는 어느새 허공에 분노의 칼질을 하고 있었다.

결국, 비가 쏟아지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의 상상력과 사투를 벌이던 그에게 남은 것은 빗물에 엉망이 되어버린 빨랫감뿐이었다.

가뜩이나 빨래에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오스칼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재잘재잘 잔소리를 할 것이 뻔했다.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으니 제라드 녀석을 불러서 함께 빨래를 하자고 하는 게 좋겠군.”

레오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슬슬 그 녀석을 굴릴 때가 되긴 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오스칼과 둘이 붙어 앉아 시시덕거리며 절륜한 공작이 어쩌고저쨌다는 해괴망측한 소리나 해댔으니까.

레오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때,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젖은 빨래보다 더 엉망진창인 몰골의 오스칼이 돌아왔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했고,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오의 눈이 커졌다. 그가 온종일 떠올린 행복한 모습의 오스칼과는 정반대의 상태였다.

그건 그거대로, 이건 이거대로 화가 났다.

“그 작자는 비가 오는데 우산도 빌려주지 않던가?”

부아가 치민 레오가 에렌의 험담을 해댔다. 피곤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레오를 바라본 오스칼이 힘없이 대답했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어쩔 수 없었어.”

“귀족이면 시종들도 있었을 거 아닌가? 넌 이 꼴을 하고도 그자 편을 드는 건….”

마치 에렌의 편을 드는 것 같은 대답에 울컥해 레오가 뭐라고 말을 이으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지친 듯 파리한 안색을 한 오스칼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이내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오스칼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은 건가. 낯빛이 좋지 않은데.”

“난 괜찮아. 좀 피곤해서 그래.”

그렇게 말하는 오스칼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버티느라 가뜩이나 온몸이 어디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는데, 그 몸으로 쏟아지는 비까지 맞자 몸살이라도 난 듯 아팠다.

거기다 그 뒤에 이어진 에렌과의 묘한 긴장감이 오스칼을 지치게 했다.

“난 먼저 방으로 올라갈게.”

오스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레오와 짧게 눈을 맞춘 후 비척대며 걸음을 옮겼다. 오스칼은 너절하게 널려있는 빨래 더미를 지나쳐 가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레오의 시선이 휘청거리는 오스칼의 뒷모습을 따라 불안하게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방에 돌아온 오스칼이 젖은 옷가지를 힘겹게 벗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손끝으로 마른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꿰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단추가 손에서 자꾸 헛돌았다. 숙어진 고개를 따라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여전히 머리카락에서 에렌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부드럽지만 진한 아이리스 향.

머리가 울리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적으로 분위기에 휩쓸릴 뻔했다. 분명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칼이 있었고, 완력으로 에렌을 충분히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온몸이 얼어붙었다.

에렌은 비가 잦아들자 자신을 마차에 태워 보냈다. 그는 어딘가 괴로운 듯 내내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묘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어느새 머리로 열이 확 몰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벼락같은 현기증과 함께 오스칼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쿠당탕-

팔짱을 낀 채 초조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서성대던 레오가 불길한 소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레오가 족히 스무 개는 될 법한 층계를 두세 걸음에 뛰어올랐다.

쿵쿵쿵

"오스칼, 무슨 일인가?”

방문을 두드리며 물어도 방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레오가 다급하게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철컹, 철컹

그러나 여느 때처럼 방문은 단단히 잠겨있었다.

쾅쾅쾅

“오스칼! 괜찮은 건가?”

레오가 주먹으로 거세게 방문을 두드리며 초조하게 오스칼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는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단단히 잠긴 문고리를 거세게 당겼다.

철컥, 철컥

요란한 쇳소리만 고요한 공간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조금 전 오스칼의 낯빛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길.”

이를 뿌드득 갈며 욕지거리를 내뱉은 레오가 결심한 듯 문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는 어깨로 문을 강하게 들이받았다.

콰앙-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콰앙- 콰앙-

레오가 문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그의 단단한 어깨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다. 충격 때문에 바스러진 문틈의 나뭇조각들이 가루가 되어 그의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큭."

그가 다시 한번 몸을 물린 뒤 체중을 전부 싣고는, 힘껏 문을 향해 돌진했다.

콰아앙-

나무문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쇠로 만든 손잡이가 부서져 달랑거리며 제 자리를 잃었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바닥에 쓰러진 오스칼의 모습이 보였다.

“오스칼!”

레오가 오스칼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히 달려들었다. 축 늘어진 오스칼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고열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가 허겁지겁 오스칼을 안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평생 한 번도 크게 앓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딱히 환자를 간호해 본 적도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그는, 마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입안의 여린 살을 거세게 씹었다.

‘일단 열부터 내려야 한다.’

생존을 위해 체온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오스칼을 침대에 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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