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레오는 모든 기능이 고장 난 양철 병정처럼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은 채 우뚝 멈춰 섰다. 넋이 나간 레오의 모습을 확인한 오스칼의 얼굴이 터질 것같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레오가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흡사 순진한 작은 토끼를 덮치고 있는 사악한 은색 늑대였다.
그러나 작은 토끼는 곧 포악하게 돌변해, 늑대의 중심부를 향해 있는 힘껏 발을 날렸다.
“이, 이, 미친놈아!”
방문이 열린 순간부터 어쩐지 고소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클로드는 재빨리 몸을 피해 무서운 기세로 덤벼드는 오스칼의 정강이로부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켜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내게 열정적으로 닿고 싶어 할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오스칼로부터 멀찍이 물러선 클로드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 말에 오스칼이 꽥 비명을 질렀다.
“닥쳐! 이 변태야!”
오스칼의 화통 같은 목소리에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레오의 이성이 빠르게 상황을 인지했다. 클로드 드보이스, 지난번에도 제 눈앞에서 오스칼을 데리고 사라졌던 남자였다.
‘이 늑대 같은 놈이?’
순식간에 책상 옆에 놓인 오스칼의 칼을 집어 든 레오가 한밤의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레오의 검이 클로드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이동마법까지 사용해가며 그의 공격을 피했지만, 살기가 가득 담긴 레오의 검은 클로드를 턱 끝까지 쫓아왔다.
심상치 않은 검격에 클로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신이 내게 부탁하긴 했지만, 저쪽이 먼저 날 죽일 기세로 공격하고 있다면 나도 어쩔 수 없잖아?”
정당방위라는 듯 오스칼에게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낸 클로드가 어느새 공격 태세를 취했다.
클로드의 창백한 손바닥 위에 검은 소용돌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본 오스칼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 둘 다 그만!”
오스칼이 황급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러다 이 집이 잿더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둘 다 진정하고, 우리 대화, 대화로 한 번 풀어볼까?”
오스칼의 다급한 목소리에, 오스칼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두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남자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로드였다. 그는 어느새 아무것도 없는 양 손바닥을 허공에 펼쳐 보이며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저자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 난 가만히 있었는데 저 남자가 나한테 먼저 덤벼드는 것 봤지? 저 남자가 나쁜 거야.”
클로드는 고자질이라도 하듯 시선을 오스칼에 둔 채, 레오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클로드의 말에 관자놀이가 불끈 솟아오른 레오가 간신히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네 놈이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거지? 대체 방금까지 두 사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윽.”
레오는 조금 전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복기하는 것조차 끔찍한 듯,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오스칼이 허둥지둥 말을 받았다.
“레, 레오. 네가 무슨 상상을 하든, 완벽하게 오해야. ‘무슨 짓’ 같은 단어가 나올 상황이 아니라고.”
“당신이 본 게 맞아. 오해 아니야.”
“야!”
클로드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오스칼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레오의 눈이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레오는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클로드가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레오를 쏘아보았다.
검은 눈동자와 붉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온 안광이 공중에서 부딪쳐 스파크가 일었다.
마치 사자와 은색 늑대가 영역 다툼을 위해 기 싸움을 벌이는 것만 같았다.
‘젠장, 내가 왜 저 맹수들 사이에서 등이 터져야 하냐고!’
오스칼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레오가 오스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놈이 너한테 무슨 나, 나쁜 짓이라도 하려고 했던 건가?”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오스칼이 다급하게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클로드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거봐, 아니라잖아. 모든 건 합의하에….”
“넌 제발 입 좀 다물어. 합의! 그런 것도 아니야!”
“그럼 저 간악한 놈이 널 강제로…?”
“아니 강제도 아니라고오! 그건 사고야, 사고. 그냥 침대 위로 넘어진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어떻게 하면 침대 위로 넘어질 수 있는 건가?”
“그, 그건….”
레오의 거센 추궁이 날카로웠다. 어쩐지 해명하려 하면 할수록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것보다. 왜 저놈이 네 방에 있는 거지?”
“그…. 깊은 사정이 있는데. 설명하자면 좀 길기도 하고….”
레오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노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오스칼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우물쭈물 고민하던 사이 클로드가 도발하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다른 남자가 오스칼에게 손대는 게 싫었으면, 네가 먼저 가졌어야지.”
“네가 언제 나한테 손을 댔냐아아악!”
오스칼이 절규하듯 소리를 지르며 결국 침대에 놓인 베개를 클로드에게 집어 던졌다.
클로드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받아내는 동안 레오의 칼날이 무서운 속도로 오스칼을 지나쳐, 클로드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오스칼의 베개가 클로드 대신 칼을 맞고 장렬하게 찢어져, 베개 속을 채우던 하얀 깃털들이 공중에 흩어졌다.
“흥. 오늘은 당신을 봐서 그냥 돌아가는 거야.”
클로드는 레오의 검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 오스칼을 한번 흘겨보고는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오스칼은 그가 사라진 곳을 향해 씩씩대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오스칼의 뒷덜미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스칼.”
레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지옥에서 온 것 같은 낮고 음산한 목소리에 오스칼의 등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치 사자 앞의 토끼가 된 심정이었다. 오스칼이 혼나기 직전 아이의 심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으응?”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보실까.”
***
“그래서, 그놈이 인신매매단을 추적하던 중에 25년 전 탈옥한 흑마법을 쓰는 잔느라는 여자를 조사하게 되었고, 그 여자가 지금 근위대장의 집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러 온 거다? 그리고 근위대장의 정체는 25년 전 내 아버지를 밀고했던 근위대원이고.”
“맞아.”
“그런 내용을 알아내느라 나 몰래, 내 집에서, 그놈을, 밤마다, 만나왔던 건가.”
“그, 그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긴 한데….”
오스칼은 자신이 왜 이렇게 쩔쩔매며 레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서운 기운을 뿜어내는 레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을 해댔다.
집주인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을 밤늦게 집에 들인 건 잘못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클로드를 초대한 것도 아니거니와, 어쨌거나 다 레오 녀석을 위해서 한 일인데.
오스칼이 치밀어오르는 억울함을 간신히 삼켰다.
“근데 왜 그놈이 네게 그런 정보를 알려주며 협조하는 거지?”
“내가 저주에서 풀어준 게 고마웠나 보지!”
“그럼 조금 전에 널 두고 한 말들은 뭔가.”
레오의 눈이 성난 사자처럼 흉포했다.
“그건 그 남자가 저주에 걸린 채로 500년간 살아오느라,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그래. 옛날 사람이라 언어 구사에도 좀 문제가 있다고!”
“그 자식, 너한테 분명 추근거리고 있었는데.”
“추, 추근…?”
레오의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오스칼이 입을 떡 벌렸다.
“그놈이 한 번만 더 네 방에 찾아오면, 그땐 기필코 그놈을 베어버릴 거다.”
레오의 살벌한 목소리에, 오스칼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서로 못 죽여 안달이었다. 이 자식들아, 살인 예고 좀 작작 하라고!
“알았으니까, 제발 그 미간 좀 펴.”
오스칼이 천불이 나는 속을 가라앉히며 간신히 대답했다. 레오의 표정은 오늘 밤 내내 줄곧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오스칼의 달래는 듯한 말투에 레오의 미간이 살짝 풀어졌다.
“레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왕실 근위대장이 네 아버지를 음해한 자라잖아. 그리고 그놈은 25년 전 탈옥한 사악한 범죄자를 숨겨주고 있고.
어쩌면 루이스터의 반역, 칼릭스 가를 몰락시킨 흑막, 그리고 인신매매단이 모두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아?”
오스칼의 말에 레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가 얕게 숨을 들이마시자 오스칼의 방에서 알싸한 시가 향과 머스크 향이 뒤섞인 체향이 느껴졌다.
“그래. 네 방에서 그놈 냄새가 나는 거 같아.”
레오의 뚱딴지같은 대꾸에 오스칼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의식의 흐름이 거기로 흐르는 건데? 아무 냄새도 안 나는구먼. 이 자식, 개 코인가. 사자는 고양이과 아니었어?
“그래…. 지금 창문 열게.”
오스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집주인이 싫다는 손님을 들인 자신이 죄인이었다. 역시 에렌이 사주겠다던 집을 받았어야 했을까.
오스칼은 심각하게 고민하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팔랑-
창문 틈 사이에서 양피지 조각이 떨어졌다. 양피지 조각을 주워들자 기울어진 정갈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가 사라지기 전 남기고 간 쪽지인 모양이었다.
“이거, 주소 같은데.”
양피지에 쓰여있는 짤막한 문장을 단숨에 읽은 오스칼이 중얼거렸다.
“아!”
비로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오스칼이 양피지 조각을 손에 꽉 쥐었다. 아무래도 클로드, 이 녀석은 미친놈이지만 의리는 챙길 줄 아는 놈인 모양이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붉은 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
에르네스트 대공저의 집요정, 아니 집사 알랭 도비에는 최근 품속의 사직서를 꽉 움켜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최근에 그가 겪은 일을 떠올려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인쇄소를 방문하겠다며 마음대로 일정을 취소한 상사 덕에, 밤을 새워 상사의 빼곡한 일정을 다시 조정했을 때, 남루한 재킷의 판매처를 찾기 위해 시에나의 옷 가게를 모두 뒤졌을 때, 장미 꽃다발을 든 채로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한 메시지를 읽었을 때.
그때마다 그는 덜덜 손을 떨며 사직서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일 중에서도 사직서가 찢어질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던 순간은, 인쇄소의 사용인들을 크게 꾸짖어야 했을 때였다.
인쇄소의 사용인들이 에렌이 몇 시간씩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 예쁘장한 청년이, 그의 은밀한 남자 애인이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전과 달리 인쇄소에 자주 오시는데, 하필 그 청년이 인쇄소를 방문하는 날에만 꼭 들르신다고요!
게다가 그때마다 평소엔 입에도 안 대시는 화려한 간식을 준비시키시는 거예요! 그것도 왕실 납품 전용 베이커리에서요!”
사용인들의 변명을 들은 알랭은 품 안의 사직서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비틀어 구긴 후, 허튼소리를 한다며 그들을 꾸짖고 단단히 입단속을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도 그들이 하는 말이 과연 허튼소리일 뿐인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가 사직서를 움켜쥔 모든 순간에는 문제의 청년, 오스칼이 있었다.
알랭은 그 모든 순간을 대대로 품격있는 집사를 배출해 온 도비에 가문의 자긍심과 평생 말썽 한번 부리지 않고 늠름하게 자라준 제 주인에 대한 애정으로 버텼다.
그리고 바로 오늘, 그의 주인은 다시 한번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알랭, 아무래도 실내에서는 내 매력을 어필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오스칼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야외 이벤트를 좀 준비해 줘야겠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미친 소리를 하는 에렌의 얼굴에 차마 욕을 할 수는 없었던 알랭은, 결국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 주인은 점점 미친놈이 되어가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