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날 밤, 책을 펼치고 앉아 있긴 했지만 오스칼은 도저히 소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레오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그 말을 내뱉고는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뒤돌아 사라져버렸다.
‘설마 레오가 날 좋아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오스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이곳에서 남자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제라드가 에렌이 남색가인 것 같다고 한 것만으로도 오만상을 찌푸리던 그였다. 게다가 레오는 지금껏 에렌에게 묘한 적대감을 드러내 왔다. 어쩌면 생리적으로 남색가를 싫어하는 녀석일지도 몰랐다.
“아니, 근데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냐고.”
오스칼이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괜히 나만 설레고, 나만 잠 못 잘 모양이다.
“무슨 말을 했는데?”
넋 놓고 있던 오스칼의 귓가에 색정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으악!”
무방비 상태에서 귓가에 들린 속삭임에 소스라치게 놀란 오스칼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떨어졌다. 그 바람에 오스칼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순식간에 오스칼의 머릿속에서 레오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몽땅 날아가 버렸다.
“내가 온 게 그 정도로 좋았어?”
오스칼의 격렬한 반응에 클로드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는 내내 같은 페이지인 상태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을 우아한 손짓으로 집어 들었다.
“야! 너 그거 내려놔.”
오스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저건 제라드의 19금 신작이란 말이야.
마침 펼쳐져 있던 페이지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훑던 클로드가 책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공작이 화가의 귓불을 야릇하게 핥았다. 노예 화가의 붉은 입술이 열리자 그곳에서 달뜬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작이….”
“다, 닥쳐!”
“흐음. 허리가 활처럼 휜다는 건…. 대체 어떤 거야?”
“그, 그만 보라니까!”
클로드가 궁금한 듯 턱을 매만졌다. 얼른 그에게 달려들어 손에 든 책을 빼앗아 저 멀리 던져버린 오스칼이 씩씩댔다.
하필 펼쳐져 있던 곳이 그 대목일 게 뭐람!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게 곧잘 변태라고 하더니, 당신은 더 대단한 취미가 있는 거 같은데.”
“그, 그건 사업차 보는 거야.”
“설마 당신, 여기 적힌 대로 하고 싶은 거야? 당신의 판타지, 뭐 그런 건가?”
“즐드 으느그든?”
오스칼의 어금니 사이로 서슬 퍼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클로드가 키득거리며 오스칼의 주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두드려 밀었다.
“인상 풀어. 오늘은 내가 아주 재밌는 정보를 갖고 왔으니까.”
“뭔데? 또 이상한 소리 하기만 해.”
오스칼이 팔짱을 끼며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오스칼을 향해 눈을 접어 웃은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잔느의 위치를 찾았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오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어디 있는데?”
“그게 아주 흥미로워. 사실 어디 외딴곳에 이교도 놈들과 함께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 버젓이 수도에 살고 있더군. 그것도 왕실 근위대장, ‘드레이코 호그’ 명의의 집에서.”
오스칼이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탈옥한 죄인을 잡아들여야 할 근위대장이 그 여자에게 집을 내어주었다고?
“젠장, 그래서 인신매매단 놈들이 치안대에 체포되어 근위대에 넘겨지고도 버젓이 풀려났던 거군! 설마 그 여자가 근위대장까지 세뇌한 걸까?”
“글쎄.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그자가 25년 전 세드릭 칼릭스의 반역을 증언했던 근위대원이었다는 거지. 그 증언이 나왔던 재판은 철저하게 비공개였기 때문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뭐?”
오스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원작 남주의 반역을 위증한 자가, 잔느와 관계가 있는 자였다니.
“설마, 내가 찾는 계약서의 주인이 잔느야?”
클로드는 그 질문에는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맹약의 법칙이 그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해진 오스칼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잔느가 칼릭스 가에 누명을 씌운들 얻을 게 없잖아?’
원작의 흑막을 잔느로 단정하기엔, 잔느에겐 동기가 뚜렷하지 않았다. 루이스터 대공을 도울 이유가 있었을까?
게다가 붙잡혀 있다 탈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죄인이 칼릭스 가를 몰락시킬 만한 대가를 샤무아에 지불할 수 있었다고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현 근위대장인 드레이코 호그가 연인이라 그를 근위대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내 오스칼이 세차게 도리질했다.
원작에서 묘사된 잔느는 감정이 결여된 자로, 사랑 따위를 위해 맹약의 위험을 무릅쓸 여자가 아니었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였는데….
오스칼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말이 없자,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당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잔느와 근위대장 드레이코, 그리고 칼릭스 가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생각.”
그러자 클로드의 눈동자가 검붉은 빛을 내며 짙게 타올랐다.
“당신은 왜 상관도 없는 칼릭스 가의 일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그들은 누명을 썼잖아. 난 레오가 잃어버린 걸 되찾아 주고 싶어.”
오스칼의 말에 클로드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생각은 하지 마.”
“내가 언제 다른 남자 생각을 했다고 그래?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오스칼이 눈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클로드의 입매가 묘하게 뒤틀렸다.
“난 당신이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거든.”
“지금 칼릭스 공작가 일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하니까, 제발 당신이라도 이상한 소리는 그만해줄래?”
저 지긋지긋한 플러팅. 오스칼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오스칼의 타박에 능글맞게 웃으며 응수할 남자가, 오늘은 그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야 칼릭스에게 하듯 당신이 내게도 집착해주는 걸까? 나쁜 짓을 해서라도 당신의 머릿속을 나로 가득 채우고 싶어.”
그 말에 오스칼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노,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농담 아니야. 당신이 자꾸 내 앞에서 그놈 생각을 하면, 내가 그놈을 죽여버리고 싶어질 거 같거든.”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은 상처받은 맹수 같았다. 처음 그를 마주한 날의 모습과 같은, 냉혹한 남자의 얼굴. 오스칼이 몸을 떨었다.
이 남자, 진심이구나.
오스칼이 본능적으로 옆에 놓인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느새 오스칼의 눈빛도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려면 날 먼저 죽여야 할 거야. 아니면 네가 내 손에 죽거나.”
“그 남자가 당신한테 대체 뭐지?”
“내 생명줄. 레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오스칼 역시 진심이었다. 레오는 오스칼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 탈출하기 위한 동아줄, 바로 남자주인공이니까.
클로드는 고요하게 오스칼을 응시했다. 방에 내려앉은 어둠 탓에, 그의 표정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당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사실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당신에게 상처입힐 수 있을 리 없다는 거. 정말 잔인한 구석이 있어.”
클로드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당신, 절대 레오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오스칼이 다짐을 받듯 그를 채근했다. 클로드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 앞에서 자꾸 다른 남자 이름을 입에 담지 마.”
“그렇게 자꾸 ‘다른 남자’라고 특별하게 말하지 말라니까. 나와 레오 사이에는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깊은 사정이….”
오스칼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클로드는 단숨에 오스칼을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언젠가의 밤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팔 안에 오스칼을 가두었다.
“그만하는 게 좋아. 난 지금도 많이 참고 있으니까.”
클로드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오스칼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껏 제게 보여주었던 나사 빠진 모습과 전혀 다른 그의 거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신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그는 오스칼의 저항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클로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 오스칼의 귓불을 간지럽혔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윽!”
오스칼이 소리를 지르며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의 완력이 오스칼의 팔목을 단단히 감싸 쥐고 있었다.
-쿵쿵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오스칼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오스칼. 혹시 자는 건가? 아까 오후에 있었던 일을 해명하고 싶어서.”
방문 밖으로 레오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오후에 자신이 내뱉은 말이 마음에 걸려, 몇 시간이나 고뇌한 참이었다.
레오는 오스칼의 방문 앞에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오스칼이 돌아온 것에 마음이 벅차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또 도망가버리면 어떻게 하지. 오스칼이 그를 이상하게 여길까 두려워, 이제라도 별 뜻 없는 말이었다고 둘러댈 작정이었다.
“클로드, 빨리 비켜.”
오스칼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제 몸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방문은 잠겨있고, 클로드의 마법으로 방 안의 소리는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었지만 마치 들켜선 안 될 일을 하는 것 같아 초조해졌다.
“빨리! 밖에 레오가 있다고!”
안절부절못하고 다시 한번 다그치는 오스칼의 목소리에, 클로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지고, 방 안에 검은 바람이 불었다.
‘나만 상처받는 건 억울하니까.’
달칵-
끼익-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리에, 오스칼의 눈동자가 동요하며 소리가 나는 곳을 향했다.
스스로 열린 문밖으로 레오가 얼이 빠진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레오와 오스칼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혔다.
여전히 오스칼의 몸 위에 올라탄 클로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레오를 바라보았다.
“아, 이런. 들켜버렸네?”
클로드가 살풋 웃으며 문밖의 그를 비웃듯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