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기사단 본부엔 초조한 기운이 감돌았다.
“형님은 잠깐 어딜 가신 거겠죠? 시에나엔 거처가 없다고 했잖습니까.”
“갈 곳도 없는 녀석이 나갔다는 게 더 걱정이지.”
마티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레오는 질끈 입술만 깨물었다.
“우선 해가 질 때까진 좀 기다려보시죠. 그래도 형님이라면 험한 일을 당하시진 않을 겁니다. 웬만한 사람보다 형님이 더 위험한 사람이니까요.”
드미트리가 그나마 희망적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헉헉, 오스칼 형님이 집을 나가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단장님께 화가 나서 나가셨다면서요?”
오스칼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본부로 달려온 기욤과 제라드였다. 두 사람의 말에 레오의 얼굴에 서린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오스칼이 집을 나갔다는 소식은 기사단 청년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레오를 악인으로 만들기로 작정한 듯 제멋대로 부풀어 왜곡된 채로.
“단장님의 폭언에 오스칼 형님이 기사단을 그만두신 게 사실입니까?”
“단장님이 오스칼 형님을 맨몸으로 내쫓았다던데요?”
“오스칼 형님이 울면서 뛰쳐나가셨다면서요?”
소문을 들은 청년들이 분기탱천해 본부의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며 몰려들었다.
“레오가 그랬을 리가 있나. 오해야.”
마티스는 벌써 몇 번째 레오를 대신해 변명해준 참이었다. 기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형님이 정말 떠나버리신 건 아니겠지요?”
“오스칼 형님이야말로 기사단을 위해 온몸을 던지신 분 아닙니까. 위험한 일에 앞장서고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시기도 하고… 게다가 기사단의 자금줄도 만드셨고요. 그런데… 그런 분이 성가시다는 말을 들었다면….”
제라드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마티스가 청년들을 다독였다.
“지금 제일 걱정 중인 건 레오일 거다. 오스칼이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간 걸 수도 있으니 해가 질 때까지만 기다려보자고.”
***
“이건 전적으로 레오, 네 잘못이야.”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마티스가 냉정한 얼굴로 레오를 비난했다.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오스칼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초조하게 본부 안을 서성였다.
“저도, 조심스럽게 동의합니다.”
드미트리가 말을 보탰다.
“그동안 단장님께서 오스칼 형님께 신경질도 많이 내시지 않았습니까. 소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제가 다 눈치가 보였습니다.”
제라드가 울상을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단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레오를 비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알고 있다.”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던 레오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내내 스스로를 자책하던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 자신의 머저리 같은 발언을 회수하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저희가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라드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방울 소리에 레오가 절망스러운 듯 이마를 찌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오스칼을 찾아 나서겠다. 혹시 그사이에 오스칼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몇 명은 여기 남아서 기다리도록.”
단원들이 너도나도 오스칼을 찾겠다고 나섰다. 결국, 가위바위보에서 진 마티스와 시몬만이 본부에 남았다.
“오스칼!”
레오는 하염없이 오스칼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빗물에 흠뻑 젖은 그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왜 저는 제 마음을 숨기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여 일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오스칼이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녀석의 고향이나 가족에 대해 알지 못하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스칼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레오는 자신이 오스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지랖이 넓고 재잘재잘 말이 많다는 것, 모든 물건을 각을 잡아 정리한다는 것, 아침에 고기반찬이 나오지 않으면 남몰래 눈썹을 늘어뜨린다는 것, 그리고 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것.
고작 그런 것만이 그가 아는 전부였다.
그 녀석이 뤼미에르에 오기 전에는 어디서 살았었는지, 다른 가족이나 친구는 없는지, 검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왜 그는 한 번도 오스칼에게 그런 것들을 묻지 않았을까.
정말 이대로 영영 오스칼을 잃게 되는 걸까?
더럭 겁이 난 레오는 미친 사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에렌에게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에 인쇄소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한데도, 그는 인쇄소로 달려갔다. 혹여나 하는 기대감에 시에나의 여인숙을 돌아다녔지만, 오스칼은 어디에도 없었다.
“젠장.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어디로 간 거야.”
거센 빗줄기 아래, 험한 골목길 어딘가에 쓰러져 있진 않을까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레오의 몸 위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온 골목을 뒤져봤지만, 오스칼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는 본부로 돌아왔다.
“못 찾았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마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부에는 이미 물에 흠뻑 젖은 단원들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주저앉아 있었다.
레오는 다시 한번 좌절했다. 혹시라도 그새 오스칼이 돌아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던 그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레오는 응접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형님… 제발 돌아오세요.”
밤새 빗속을 뛰어다닌 단원들이 오스칼의 이름을 염불처럼 외다 본부의 바닥에 하나둘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레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 앉아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
오스칼이 뤼미에르 가옥에 돌아온 건, 다음 날 아침 무렵이었다. 이사벨 모녀와 즐거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을 향해 씩씩하게 웃어 보인 오스칼은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비가 그쳐 맑게 갠 하늘이 푸르러 제 마음처럼 상쾌했다.
“그 녀석도 나와 같이 살면서 불편한 게 많았겠지. 가서 확실하게 물어보고 내가 실수한 게 있으면 깔끔하게 사과하는 거야!”
설마, 내가 드디어 방을 뺀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왔다고 무안 주진 않겠지?
크게 심호흡을 한 오스칼이 본부의 문을 열었다.
“이게… 뭐야?”
응접실에는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빗물에 엉망진창이 되어 바닥 여기저기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단원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레오.
게다가 레오의 모습은 평소 단정한 차림새를 고수하던 그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흐트러진 상태였다.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진 머리, 서너 개쯤 풀어진 단추, 바지에서 흘러나와 있는 셔츠 자락….
“다들, 왜 이런 꼴로 여기서 자고 있어…?”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레오가 눈을 번쩍 떴다.
방금까지 그는 오스칼의 꿈을 꾸고 있었다. 눈 앞을 가린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오스칼의 멍한 표정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진짜 오스칼인지, 꿈을 꾸다 일어나 헛것을 보는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혹시라도 오스칼을 놓칠세라, 와락 오스칼을 끌어안았다.
“내가 다 잘못했다.”
다짜고짜 자기를 끌어안고 잘못을 비는 레오가 당황스러워 오스칼은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네가 성가시다고 한 말은 진심이 아니다. 앞으로 빨래도 네가 원하는 대로 접겠다. 고기 요리도 매일 해줄 수 있다. 그러니까, 제발 계속 내 곁에 있어 줘.”
레오는 밤새 오스칼을 찾아다니며 마음속으로 곱씹었던 말들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오스칼은 레오의 말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들었다.
“어… 매일 고기반찬은 고마운데…. 레오, 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두 사람의 인기척에 다른 청년들이 하나씩 눈을 떴다.
“앗! 형님!”
“으허헝, 형님 돌아오셨군요!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오스칼!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우리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두 사람 곁으로 청년들이 몰려들어 너도나도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청년들이 오스칼을 둘러싸, 거대한 인간 원이 만들어졌다.
오스칼을 부둥켜안고 있던 레오는 그제야 다른 단원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당황한 듯 삐걱거렸다. 얼른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엉겨 붙은 청년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삽시간에 청년들의 품 안에 둘러싸인 오스칼이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자신을 부둥켜안은 청년들의 몸에서 비와 땀이 섞인 냄새가 났다.
자신이 사라진 어젯밤, 다들 이렇게 꼴이 엉망이 될 때까지 자신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오스칼이 입을 열었다.
“다들…. 혹시 밤새 날 찾아다닌 거야?”
“그럼요! 형님이 떠나셨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드미트리가 짐을 싸서 나가는 형님을 봤단 말입니다.”
오스칼에게서 몸을 떼어낸 청년들이 다들 아우성을 쳤다. 오스칼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올라갔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어젠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닙니다. 형님이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너무 다행입니다.”
“이게 다 단장님 때문입니다. 으앙.”
“저희가 더 잘할게요.”
커다란 청년들이 칭얼거리듯 훌쩍이는 모습에 오스칼의 콧잔등도 시큰해졌다.
“다들 정말 고마워.”
“다시는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나지 마라.”
낮게 잠긴 레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알았어. 나 어디 안 갈게.”
그렇게 대답하고 푸스스 웃던 오스칼의 얼굴에서 문득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쩌면 이 사람들에게 또 다른 거짓말을 해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들을 처음 만난 날, 오스칼이 기사단에 가입한 유일한 이유는 외전의 남자주인공 레오의 곁에서 그의 해피엔딩을 돕기 위해서였다. 무사히 주인공의 결말을 보고 이 소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결국, 자신은 완전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 곁에 머물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가슴이 죄이는 듯한 죄책감에 서글프게 웃었다.
***
한바탕 오스칼의 가출 소동이 끝난 어느 날, 응접실에 앉아 우편물을 정리하던 레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로잘린 노이어?”
“앗, 로즈한테 편지 온 거야?”
제라드의 신작을 읽다 말고 후다닥 레오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챈 오스칼이 들뜬 목소리를 했다. 레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영애와 편지도 주고받고 있었던 건가.”
“응, 제라드의 소설을 보내 주기로 했었거든!”
로잘린과 있을 때면 말이 잘 통하는 친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스칼이 들뜬 기분으로 편지를 뜯었다. 소설에 대한 감상이 빼곡히 적힌 두툼한 양피지 뭉치였다.
오스칼, 보내 주신 소설은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더군요….
…(소설에 대한 심오한 찬양이 10페이지쯤 이어진 후)…
오스칼이 보고 싶어요. 몸은 건강한 거죠? 뤼미에르 기사단 덕분에 더는 노이어에 도적 떼가 나타나지 않는답니다.
추신: 투구 닦기가 취미인 남자와 한집에 산다고 하셨지요? 모쪼록 잠들기 전 문단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담아, 로잘린 노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