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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51)화 (51/138)

51화



 

이사벨이 꺼내 든 것은 평민들이 입을 법한, 단순한 푸른색 드레스였다. 화려한 레이스나 장식이 달리지 않은 바삭거리는 질감의 드레스는 오스칼의 몸에 꼭 맞았다.

이사벨과 마리안느는 오스칼에게 드레스를 입힌 후, 마치 인형 놀이라도 하듯이 즐거워했다.

“엄마, 이것도 해주세요.”

마리안느가 자신의 서랍에서 소중히 아껴둔 푸른 리본을 꺼내왔다. 이사벨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오스칼의 머리에 앙증맞게 리본을 묶었다.

목선까지 내려온 머리칼에 리본이 달리니, 청년이 아니라 제법 아가씨 같은 느낌이 났다.

“이사벨… 지금 재밌어하는 거죠?”

두 모녀에게 순순히 놀잇감이 되어 주던 오스칼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투덜거렸다. 마리안느는 오스칼의 가슴께에 직접 만든 조악한 꽃 브로치를 달아주고 있었다.

“머리가 좀 짧긴 하지만, 피부가 희고 깨끗해서 뭐든 잘 어울리는데요?”

오스칼의 입술에 붉은 물을 들이고 있던 이사벨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오스칼, 예쁘다!”

마리안느가 팔을 벌려 한껏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사벨이 다 끝났다는 듯 오스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오스칼은 그제야 두 모녀에게서 풀려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좀 봐요.”

이사벨의 손에 이끌려 거울 앞에 선 오스칼은 생경한 자신의 모습에 살짝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는 어여쁜 아가씨가 서 있었다.

빙의 첫날 살롱에서의 모습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때보다 생기가 도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보니, 제가 처음에 오스칼을 남자라고 생각했었다는 게 믿기질 않아요. 기사단의 다른 분들은 오스칼이 여자란 사실을 아나요?”

“아뇨….”

오스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나라면 오스칼에게 반해버릴 것 같은데.”

이사벨의 호들갑에 오스칼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사벨의 말에 레오를 떠올리고 말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 반대예요. 오히려 절 싫어할걸요.”

“설마요.”

“같이 사는 녀석이 하는 말을 직접 들었는걸요. 제가 귀찮고 성가시다고… 하는 말이요. 사실 그래서 홧김에 집을 나와 버렸어요.”

“집을 나와요?”

이사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오스칼과 대화를 하면서도 능숙하게 손을 움직여 가벼운 차를 끓여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참이었다. 오스칼이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을 응시했다.

이사벨이 손짓으로 오스칼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오스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동안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만의 착각이었나 봐요.”

이사벨이 오스칼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흠. 그래요? 그 친구가 뭐라고 했는데요?”

“제가 성가시고 신경 쓰이게 한다고요.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제가 그 녀석에게 제법 귀찮게 굴긴 했거든요.”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고 차가워진 손끝으로 뜨거운 찻잔을 매만졌다. 괜히 코끝이 시큰거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눈에서 무언가 나올 것 같은 기분에 거실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실 한가운데에서는 어른들의 진지한 대화에 흥미를 잃은 마리안느가 온갖 잡동사니를 어질러 놓은 채 혼자 놀고 있었다. 오스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사벨이 입을 열었다.

“참 성가시죠? 틈만 나면 저렇게 거실을 엉망으로 만들어요. 게다가 여기저기 말도 없이 쏘다닐 때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요. 얼마나 신경 쓰인다고요.”

“아….”

오스칼이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안느가 싫으냐면요, 결코 아니죠.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거든요. 항상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죠. 그게 성가시고 신경이 쓰이는 거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요?”

오스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싫어한다면 뭘 하든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마리안느는 이사벨의 딸이고. 전… 그 녀석의… 아무것도 아닌걸요.”

사실을 내뱉은 것뿐인데, 어쩐지 눈두덩이가 뻐근해졌다. 오스칼은 괜히 손등으로 눈가를 북북 쓸었다.

“하지만 결국 오스칼이 귀찮게 굴었다는 일들을 모두 기꺼이 받아준 친구 아닌가요? 아마 오스칼이 필요할 땐 언제든 와주었을 테죠. 그 친구는 오스칼을 항상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출정 전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내가 낙마해 위험에 처했을 때도, 홀로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외로웠을 때도. 언제나 그 녀석은 먼저 내게 와주었다.

먹먹한 기분으로 레오를 떠올린 오스칼이 입을 열었다.

“이사벨 말이 맞아요. 전 참 바보 같네요. 고작 성가시다는 말이 뭐라고!”

살짝 젖은 오스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사벨이 오스칼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리고는 오스칼을 향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오스칼이 바보라서가 아니에요. 원래 항상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자신이 없어지는 법이거든요. 오스칼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거죠?”

“예…예?”

오스칼이 멍청한 얼굴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아닌가요?”

“조, 좋아하죠! 무, 물론 친구로! 인품도 훌륭하고, 잘생기고, 검술도 뛰어나고! 그런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아름다운 우정이요!”

오스칼이 허둥지둥 말을 덧붙여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이사벨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요, 아름다운 우정이겠죠.”

이사벨은 얼굴을 붉히고 손을 휘젓는 오스칼을 달래듯 나긋한 목소리로 얼렀다. 오스칼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긋 웃어 보인 이사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서 간단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붉은 낯빛의 오스칼이 이사벨의 말을 곱씹으며 손을 꼼질거렸다.

-똑똑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수프 냄새에 슬슬 배가 고파질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스칼! 문 좀 열어주실래요? 아마 옆집 파트리샤 할머니일 거예요.”

이사벨의 부탁에 재빠르게 문을 여니 얼굴 주름이 가득한 작은 체구의 노파가 나타났다.

“이사벨, 양동이를 좀 빌리러 왔네. 지붕에서 물이 새지 뭔가. 에이, 망할 집구석 같으니!”

문을 열자마자 대뜸 본인 할 말만 쏟아낸 노파가, 눈앞의 여인이 이사벨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표정의 노인을 본 오스칼은 목을 가다듬고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잠깐 이사벨의 집에 놀러 온….”

“아, 아가씨?”

“네?”

오스칼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자신을 향해 아가씨라고 부른 노파가 충격받은 얼굴로 움찔 물러났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아, 아가씨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려던 게 아니에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주인님이 시키셔서 어쩔 수 없이.”

빗물에 흠뻑 젖어버린 노인은 오스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연신 손을 비벼대며 간청했다.

“저, 저기 왜 그러세요? 혹시…. 절 아세요? 이, 이사벨. 잠깐 이리 와줘요!”

오스칼이 노파와 이사벨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머! 파트리샤 할머니, 또 이러시네.”

문간에서 들리는 파트리샤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이사벨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앞치마에 젖은 손을 훔친 이사벨이 파트리샤를 토닥이며, 눈에 띄게 당황한 낯빛의 오스칼에게 안심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카탈리나에서 전쟁을 피해 오신 분인데, 가끔 이렇게 발작을 일으키세요. 전쟁 때문에 신경증이 생기셨나 봐요.”

파트리샤가 하얗게 질린 손으로 이사벨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마님, 그, 그러시면 안 돼요. 천벌을 받는 겁니다.”

오스칼은 이사벨을 붙잡고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는 파트리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저…. 할머니, 진정하세요.”

“아,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절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제가, 제가 죽을죄를….”

파트리샤는 오스칼의 손길에 눈물을 흘리며 손을 떨었다. 노파의 동공은 반쯤 풀린 채 허공을 향해 있었다.

“할머니! 여기 양동이요.”

묘해진 분위기를 깬 것은 뒤엉켜 있는 세 사람에게 불쑥 양동이를 내민 마리안느의 낭랑한 목소리였다. 양동이의 등장에 몽롱했던 파트리샤의 눈이 번뜩 빛을 찾았다.

“오, 양동이. 고맙네. 엥? 처자는 뉘시기에 날 끌어안고 있수?”

“예…?”

오스칼은 순식간에 낯빛을 바꾼 파트리샤의 모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파트리샤는 오스칼의 손길을 탁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벨이 오스칼을 향해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찡긋 윙크해 보였다.

“이사벨, 그럼 난 이만 감세.”

순식간에 집을 떠나는 파트리샤를 보며 오스칼이 황당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아이, 오스칼! 머리가 다 망가지잖아요! 그렇게 선머슴처럼 행동하지 말아요.”

곱게 빗어놓은 머리를 도로 헝클어뜨리는 오스칼에게 이사벨이 눈을 흘겼다. 멋쩍은 표정을 지은 오스칼이 뒷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엄마! 우유가 없어요!”

불현듯 마리안느가 울상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사실 아까 장을 보러 가던 길이었는데. 강도를 만나서 아무것도 못 사고 돌아왔네요.”

“빗줄기도 좀 잦아들었으니 제가 우유를 사 올게요! 하룻밤 신세를 지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오스칼이 드디어 뭔가 할 일을 찾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엄마! 그럼 나 오스칼과 함께 다녀올래요!”

“집에 온 손님께 죄송해서 어쩌죠? 그럼 좀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마리안느의 손을 잡은 오스칼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상점가의 골목으로 향했다. 비가 쏟아지는 골목엔 인적이 드물었다.

“오스칼! 이쪽이에요!”

“잠깐! 천천히 가, 마리안느!”

마리안느가 오스칼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손을 잡아끌었다. 비가 오건 말건, 오스칼과 쇼핑을 나와 그저 신이 난 모습이었다.

물을 찰박찰박 튀기며 우산 밖으로 달려나가려는 마리안느의 머리 위로 오스칼이 허둥지둥 우산을 받쳐 들었다.

***

“오스칼! 이쪽이에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음울하게 가라앉는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불쾌한 이름. 로브를 뒤집어쓴 잘생긴 청년이 의문스럽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거슬리는 이름이 들린 것 같아서.”

섬뜩하리만치 창백한 피부에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흐릿한 시야 너머, 소녀와 여인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거슬리는 이름이라니요?”

“내게 수치심을 준 자의 이름.”

“어머니께 감히 그런 짓을 하는 자가 있습니까?”

여자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자신의 힘조차 통하지 않던 단단한 사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올곧은 녹색의 눈동자에는 욕망이나 열등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지. 날 튈르리에 잡아 가뒀었거든. 결국, 내가 꾸민 일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조소 어린 여자의 목소리에 청년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여자가 응시하던 인영으로 시선을 옮겼다.

팔을 뻗어 소녀에게 우산을 씌우는 가느다란 팔목, 아이에게 넘어간 우산 너머로 드러나 보이는 앳된 여인의 얼굴. 빗줄기 너머 흐릿한 시야에 청년이 눈을 찌푸렸다.

“!”

무심코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청년의 눈이 커졌다.

“얼른 가자. 운반책이 전부 죽어버리는 바람에 약속한 물건을 납품하지 못하게 됐으니…. 거래처의 정신이라도 흔들어 놔야지.”

“예…. 예, 어머니.”

냉정한 목소리로 아들을 채근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청년이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고개는 연신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여인의 얼굴을 향했다. 두 사람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빗소리 너머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그럴 리가 없지. 걘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설령 살아 있더라도 저런 모습으로 있을 사람은 아니야.’

방금 그 여인에게서 아는 얼굴이 비쳐 보인 것 같은 착각은, 골목을 가득 채운 비안개 때문이리라. 잡념을 떨쳐버리듯 로브 안에서 고개를 내저은 청년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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