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50)화 (50/138)

50화



 

“뭐? 내가 성가시다고? 시끄럽고, 귀찮고, 신경 쓰인다고?!”

그 무렵, 오스칼은 씩씩대며 거칠게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었다.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껏 날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레오와 마티스의 대화를 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에게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라고 말하러 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문밖에 선 오스칼의 귀에 제 이름이 들려왔다. 오스칼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런데 들려온 말이, 자신에 대한 레오의 험담이었다.

그동안 함께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마음을 터놓는 꽤 좋은 친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레오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최근 그 녀석이 날 대하는 태도가 수상쩍긴 했지.’

화가 나 쿵쿵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오스칼이 우뚝 멈춰 섰다. 어쩐지 울적해졌다.

“맞아…. 그 녀석은 첫날부터 내게 말했었잖아. 거처를 구하면 나가라고.”

오스칼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알고 있긴 했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오의 곁에서 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저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걸었다.

“물론 내가 그 녀석한테 신세를 많이 지긴 했지. 그건 인정해.”

오스칼이 변명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첫 만남부터 그에게 목숨을 구했으니까.

“어디 보자…. 검은 숲에서 내가 예가네초프에게 돈을 다 건네는 바람에 노숙했고, 야외 훈련 때 절벽에 매달린 걸 구해줬고, 내가 망친 요리도 수습해줬고, 옷도 사주고, 날 뒤에서 덮치던 고일을 해치워주기도 했고, 인신매매단 소탕 작전 중에 사라진 날 찾으러 샤무아에 왔었지. 노이어에서 술 취해 뻗은 걸 옮겨다 주기도….”

손가락으로 지금껏 그에게 신세를 졌던 사정들을 하나씩 꼽아보던 오스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손가락 다섯 개를 다 접고도 모자란 지경에 이르자 오스칼은 결국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가실 만하네.”

오스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무룩하게 그의 말을 곱씹던 오스칼이 왈칵 치밀어 오르는 서운함에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불만이 있었으면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던가! 흥! 나가라면 갈 데가 없을 줄 알고?”

호기롭게 하늘을 향해 외친 오스칼이 다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

“없구나…. 갈 데가….”

오스칼이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렌이 사준다는 집이라도 받아둘 걸 그랬다.

에렌을 찾아가면 분명 자신을 반겨주겠지만, 그의 집이 어딘지도 모르거니와 자신이 여자인 것을 알고 있는 남자에게 찾아가 며칠 신세 좀 지겠다고 하는 것도 어딘가 썩 내키지 않았다.

‘클로드가 날 재워줄 수 있을까?’

문득 클로드를 떠올린 오스칼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자라면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위인이었다.

“미쳤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 남자한테 재워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오스칼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골몰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희뿌옇게 보였다. 어디를 가야 이 한 몸을 누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오스칼의 귓가로 날카로운 소리가 스쳤다.

“사, 살려주세요!”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상념에 잠겨있던 오스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인적이 드문 골목 어귀를 도니 어린아이와 여자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강도가 두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강도의 옷차림은 분명 이교도의 것이었다. 혼자서 강도질을 하는 걸 보니 며칠 전 이 근처 이교도 무리를 소탕했을 때 도망쳐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너 오늘 잘못 걸렸어!’

스릉-

오스칼이 익숙한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싱거운 결투였다. 강도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했다. 오스칼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남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뛰어오른 순간.

미끄덩-

오스칼의 발이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미끄러졌다. 악-소리를 지르며 넘어지는 오스칼에게 강도가 덤벼들었다.

재빠르게 바닥에서 몸을 굴려 날아오는 칼날을 피했지만, 오스칼의 등 뒤로 뾰족한 칼끝이 스쳤다.

“악!”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감각에 오스칼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셔츠가 반으로 갈라지며 가슴을 동여맨 붕대가 잘려나갔다. 다행히 두툼하게 두른 붕대 덕분에 치명상은 피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살갗을 스친 고통이 밀려왔다. 뜨끈한 감각과 함께 오스칼의 하얀 등에 가늘게 핏물이 맺혔다.

“윽!”

바닥을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오스칼이 간신히 남자의 칼을 받아냈다. 쓰라린 감각이 등 뒤에서부터 덮쳐왔다. 아픔을 참으며 검을 다시 휘두르려는데,

깡-

문득 들려오는 강렬한 파열음에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에 무언가가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대치 중이던 남자가 픽 쓰러졌다. 남자의 뒤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삽자루를 손에 쥔 여인이 나타났다.

“괜찮으세요?”

“가, 감사합니다.”

어딘가 뒤바뀐 것 같은 대사에 오스칼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연한 하늘빛 긴 머리칼을 가진 가냘픈 여인이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더 감사하지요. 기사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험한 꼴을 당했을 테니까요.”

“두 분께선 다친 곳이 없나요?”

오스칼이 모녀를 살폈다. 다행히 겁을 먹은 것 외엔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울먹이던 딸을 어르던 여인이 오스칼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놀란 눈을 했다.

“세, 세상에! 기사님, 여자셨군요!”

아차.

등 뒤가 지나치게 시원하다 했다. 잘려나간 셔츠와 붕대 사이로 오스칼의 여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당황한 오스칼이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여인이 얼른 자신이 두르고 있던 낡은 숄을 오스칼의 등에 둘러주었다. 그리고는 오스칼의 등을 자신의 팔로 단단히 감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요. 멀지 않은 곳에 있답니다.”

***

여인의 집은 변두리에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주방과 거실을 겸하는 공간과 작은 방 하나가 딸린 초라한 집이었지만, 깨끗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남편은 몇 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저와 딸, 단둘이 사는 집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집안에 들어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여인은 오스칼을 화로 옆의 의자로 안내했다. 곧이어 여인은 오스칼의 등에서 조심스럽게 숄을 벗겨냈다.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상처에, 여인이 안타까운 눈을 했다.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 얼른 치료해야겠어요.”

여인이 소독약을 오스칼의 등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으악!”

찡- 하게 울리는 아린 감각에 오스칼이 소리를 지르자 여인이 오스칼을 토닥였다.

“조금만 참으세요. 마리안느, 와서 기사님의 손을 좀 잡아드리렴.”

어머니의 등 뒤에서 수줍은 듯 오스칼을 훔쳐보던 여자아이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오스칼의 손을 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 꼬물거리자 오스칼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마리안느. …윽.”

몇 번의 아찔한 고통이 오스칼의 등을 스쳤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키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새 붕대가 오스칼의 등과 가슴을 둘렀다. 여인이 꼼꼼하게 붕대 끝을 여미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대단한 검술을 가진 기사님이 여자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전 이사벨이라고 해요.”

“전 오스칼입니다. 하지만 이사벨도 제법이시던데요.”

오스칼이 삽자루를 손에 들었던 이사벨의 모습을 떠올리며 싱긋 웃음을 건넸다. 그 웃음에 이사벨이 얼굴을 붉혔다.

“아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너무 무서웠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강도까지 제압하신 데다, 치료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스칼의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사벨이 질문을 건넸다.

“기사님은, 혹시 뤼미에르 기사단의 일원이신가요?”

이사벨의 물음에 오스칼이 놀란 눈을 했다.

“어…. 네…. 맞긴 한데….”

“마리안느! 뤼미에르 기사단의 기사님이시래. 마리안느가 가장 좋아하는 분들이잖니! 이리 와봐.”

여자가 웃으며 딸을 불렀다. 부끄러운 듯 뒤로 물러나 있던 마리안느가 오스칼을 보며 갈색 눈을 반짝였다. 오스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어… 혹시 어떻게 아셨어요?”

“이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분들은 뤼미에르 기사단뿐이니까요. 왕국군은 이런 빈민가에는 얼씬도 하지 않죠.

이곳은 대낮에도 강도가 나타날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어요. 하지만 뤼미에르에서 이곳을 주기적으로 순찰하신 이후엔 상황이 좋아졌답니다. 다들 그분들을 영웅처럼 여겨요.”

오스칼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그저 우연히 지나가던 길일뿐이었는데요….”

“하지만 제 목소리를 듣고 외면하지 않고 달려와 주셨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

마리안느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오스칼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이사벨이 피가 묻어 더러워진 붕대와 셔츠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남장을 하신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겠죠?”

“아….”

오스칼이 난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을 수상쩍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 쾌활하게 대답했다.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시는 게 좋겠어요.”

이사벨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뿌옇던 하늘에선 어느덧 세차게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먹구름으로 캄캄해진 바깥에서 때때로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거리며 빛이 났다.

“제가 너무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요?”

오스칼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럴 리가요. 은인에게 잠자리를 내어드리는 것 정도는 하게 해주셔야죠.”

“감사합니다.”

오스칼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마터면 빗속에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오늘 하루 정도는 어떻게든 해결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선 이 옷을 입어주시면 좋겠어요. 딸과 둘이 사는 집에 청년을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나서 좋을 건 없거든요.”

이사벨이 생긋 웃으며, 소박한 서랍장에서 자신의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