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네에?”
오스칼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오스칼을 바라보는 에렌의 눈꼬리가 한껏 휘었다.
“그 녀석과도 함께 사는데, 나랑은 못살게 뭐야?”
“다, 다르죠! 경은 제가 여자인 걸 알고…!”
“아아 요컨대, 나를 남자로는 본단 소리군?”
에렌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놀리듯 웃었다. 그 웃음에 오스칼이 빽 새된 소리를 냈다.
“아니, 왜 결론이 그렇게 나요?”
“나랑 같이 사는 게 싫다면…. 내가 그대가 살 집을 하나 사주면 어때?”
“지, 집이요?”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이 칼칼해 찻물을 들이키던 오스칼이 입을 딱 벌렸다. 입안에 머금었던 찻물이 주르륵 손에 든 컵으로 흘러내렸다.
살다 살다 이런 플렉스는 처음이었다. 그는 집을 사주겠다는 말을 마치 가볍게 밥 한 끼 사준다는 것처럼 했다. 마치 부루X블에서 건물이라도 짓듯이.
“농담 같지만 진심이야. 그자는 그대가 여자인 걸 모른다며. 같이 살면서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 제안, 진지하게 생각해봐.”
“경은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건데요?”
“그야, 그대가 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지.”
“그건 이미 인쇄소 계약으로 갚으셨잖아요.”
어딘가 편치 않은 기분에 오스칼이 고개를 숙이고 찻물에 띄워진 말린 레몬 조각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정말 제라드의 말처럼 이 남자가 나한테 반한 걸까.
에렌이 뻣뻣해진 오스칼의 모습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자신의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그는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다. 에렌은 여기서 더 다가가면 그녀가 도망치리라 직감했다. 오스칼 앞엔 거대한 철벽이 있다.
그 철벽을 억지로 열려 한다면 분명 더 굳게 닫힐 뿐이다. 천천히 기름칠해가며, 문을 열어야 한다.
‘천하의 에르네스트 대공이 이게 무슨 꼴이람.’
에렌이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왔던 그였다.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그가 가만히 있어도 다가오는 건 여인들 쪽이었다.
그러나 오스칼만큼은 달랐다. 그의 가벼운 말과 행동에 귀여울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그의 진심만은 외면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선을 그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서 안달 난 사람은 에렌이었다.
그가 천연덕스러운 말로 한발 물러났다. 그녀가 제게서 완전히 도망가지 않도록.
“그대랑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되거든. 음…. 마치 광대를 둔 기분이랄까?”
“과, 광대요?”
“응. 설마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건 아니지?”
“그, 그, 그럴 리가요!”
이게 무슨 도끼병이야. 창피해 죽겠네!
오스칼은 찔리는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화끈거려 테이블에 놓여 있던 냉수를 단번에 들이켰다.
먼저 마신 김칫국이 입에 썼다. 김칫국을 마실 게 아니라 냉수 먹고 속을 차릴 일이었다.
에렌이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괜히 오해해서 선을 긋고 그러지 말라는 얘기야.”
“오해 안 해요! 그리고 선 그은 적 없거든요? 괜히 자주 보고 싶다는 둥, 집을 사준다는 둥 이상한 소릴 하니까 그랬죠!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절대, 착각 안 해요!”
괜히 마음에 찔려, 그 말을 몇 번이고 강조한 오스칼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에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내게서 도망갈 생각은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안심하는 건 싫으니까.’
그가 천천히 오스칼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오스칼의 입가에 닿았다. 이내 그의 손가락이 오스칼의 입가에 묻은 비스킷 부스러기를 문질러 털어냈다.
“아….”
갑작스러운 손길에 당황한 오스칼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에렌은 입가를 닦아내는 행동을 마무리하듯 엄지손가락으로 오스칼의 푹신한 입술을 쓸어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놓진 말고.”
그가 자신의 푸른 눈을 오스칼의 눈동자에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
“아아,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갈 수 없는 금단의 사랑! 단장님, 그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됩니까.”
오스칼이 에렌을 만나러 간 오후, 훈련을 마친 제라드는 기사단의 응접실에 앉아 몽롱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마치 음유 시인이라도 된 듯한 목소리였다.
이제 익숙하다는 듯 제라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레오는 얌전히 앉아 빨래를 마저 정리했다. 자신이 대충 던져놓은 빨래를 본 오스칼이 아침부터 골을 냈기 때문이다.
“또 헛소리를 늘어놓을 거면 연무장이나 더 돌다 와.”
레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아이, 참. 단장님! 제가 새로 집필 중인 소설이 남색가인 귀족과 노예 화가 사이에 펼쳐지는 금단의 사랑에 관한 내용인데, 영감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그럽니다.”
“금단의 사랑이든, 그냥 사랑이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단장님도 사랑이라는 걸 해보신 적이 있을 거 아닙니까.”
“없다.”
“예?”
레오의 말에 제라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장님처럼 완벽한 남자가 지금껏 한 번도 연애를 안 해보셨다고요?”
“크흠.”
레오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이야, 검술 실력과 연애 실력은 반비례하는 걸까요. 오스칼 형님도 연애 경험이 없으시다더니 말입니다.”
제라드의 말에 레오의 입가가 위를 향해 살짝 움찔거렸다. 그가 간신히 표정을 간수하고, 덤덤한 듯 대꾸했다.
“흠흠. 오스칼도 연애 경험이 없다고? 그럼 제라드 넌, 연애 경험이 많은 건가.”
“당연하지요. 단장님, 제가 지금 왕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로맨스 소설가 아닙니까. 다, 경험에서 나오는 거지요. 으하하하.”
“그래서, 연애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레오의 목소리에 은근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제라드가 불쑥 치고 들어오는 레오의 황당한 질문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연애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일을 일컫는 말 아닙니까.”
레오가 골똘하게 뭔가를 생각하더니 제라드를 향해 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음, 그럼 사랑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거지?”
‘아니 이 사람, 왜 갑자기 이 대화에 진심이 되는 건데?’
그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질문을 던지자 제라드가 입을 떡 벌렸다. 아무래도 제 단장은 심각한 연애 초보라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가르쳐야 하는 모양이었다.
“사랑이라…. 혹시 누군가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제라드는 어린아이에게 처음 글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기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귀엽게 보였던 기분이라. 그에게 그런 기분을 느꼈을 때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의구심을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오! 그게 바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귀엽다는 건 전혀 달라요. 귀여워 보이면 끝입니다. 그건 정말로 애정에서 비롯된 감정이거든요.”
제라드의 설명에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고작 그 정도로? 정말 귀여운 걸 수도 있잖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닮았다든가….”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랑을 진단하는 방법은 더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행복해지기도 하지요.”
“그 사람의 행동이 정말 웃긴 걸 수도 있잖나.”
레오는 제라드의 진단법에 마치 돌팔이 의사를 보듯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제라드가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연거푸 말을 이었다.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걸 보면 이유도 없이 불쑥 화가 나기도 합니다. 세상은 그걸 질투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꼭 그게 사랑인가? 전우애라든지, 우정이라든지….”
레오의 목소리는 어쩐지 재촉하는 것 같이 들렸다. 그는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휴, 이런 말씀까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좋습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알려드리죠.”
제라드가 짐짓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준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엄숙한 선언을 하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레오가 심각한 표정으로 제라드의 말에 집중했다.
“내가 날 통제할 수 없는 기분입니다. 마음도, 몸도 말입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고, 그 사람에게 닿고 싶은 기분이 들지요. 사랑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거든요. 결코, 전우애나 우정에서는 생기지 않는 기분입죠. 그게 바로 ‘사랑의 열병’이라는 겁니다.”
레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의 머릿속에 그를 향해 밝게 웃는 오스칼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식을 볼에 가득 물고서 행복해하는 오스칼, 마티스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오스칼, 술에 취해 잠든 오스칼….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귓가가 왱왱거리며 울렸다.
“그럴 리가….”
레오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떠올린 모든 생각의 끝에는 오스칼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는 요즘 모든 순간마다 습관처럼 오스칼을 떠올리고 있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레오의 얼굴에 제라드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들어 대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레오가 제게 연무장 돌기나 팔굽혀 펴기 따위를 시키곤 했으니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으앗, 그러고 보니 제가 이럴 때가 아니었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단장님.”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제라드가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제라드가 떠난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레오는 그동안 애써 외면해 온 자신의 감정을 마주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고 외면해 보아도, 결국 결론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얼빠진 놈이 뭘 안다고.”
레오가 중얼거렸다.
그의 냉정한 이성은 제라드의 말을 들을 필요 없다고, 그런 건 연애소설에나 나오는 허구일 뿐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그런 이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널을 뛰기 시작했다.
마치 제라드가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진단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 레오의 마음속에서 형체 없이 부유하던 어떤 것들이, 뚜렷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형상은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용암처럼 흘러 레오의 온몸을 뜨겁게 구석구석 휩쓸고 점령했다.
쏟아지는 감정에 점령당한 손끝이 찌릿했다. 마치 그의 온몸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여기저기가 쿵쿵거리며 뛰었다.
“사랑…. 사랑이라고…?”
레오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게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가 첫사랑을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