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오스칼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신나게 하고 있나.”
“흠흠, 별말 안 했어.”
갑작스러운 레오의 등장에 마티스가 헛기침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둘이 꽤 재밌어 보이던데.”
레오의 목소리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느껴져 마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식, 설마 여태 오스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그냥 저 녀석 하는 짓이 귀여워서 놀려주고 있었어. 가끔 하는 행동이 귀엽잖아, 그렇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마티스가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오스칼의 뒷모습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 말하며 레오의 반응을 은근히 살폈다. 이참에 레오의 마음을 떠볼 심산이었다.
잠깐의 공백이 흐르고, 레오가 입을 열었다.
“글쎄, 그런가.”
레오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레오가 자신의 말에 어떻게든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던 마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로 레오는 오스칼을 두고 아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노이어에선 내가 착각한 건가? 아님 그새 마음을 접은 건가?’
예상했던 것보다 썰렁한 반응에 어쩐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 메마른 놈이 누굴 두고 귀엽다고 생각할 녀석은 아니지? 내가 과민 반응했나 보군.’
마티스가 안심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선 레오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기가 막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레오의 시선이 연무장을 떠나는 오스칼의 뒷모습에 머물러서 도통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지금 자기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마음을 접긴 개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구먼.’
마티스가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 남자야.”
“?”
레오가 당연한 말을 하는 마티스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티스가 재차 확인해 주었다.
“남자라고.”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어휴…!”
마티스가 답답하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이 답답한 녀석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맹추 같은 놈. 그래.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마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져버렸다. 레오는 불쑥 자신을 타박하고 떠나는 마티스의 뒷모습을 황당한 듯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또 무엇이 불만이라 자신에게 이리 짜증을 부리는지.
레오는 자신이 또 무신경하게 마티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했는지 돌아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내 그는 시선을 오스칼에게 옮겼다.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오스칼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청명한 하늘 위로 오후의 햇살이 오스칼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레오는 어쩐지 모든 것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
은은하게 햇살이 드는 고풍스럽고 아늑한 인쇄소의 집무실.
모든 걸 내려놓은 오스칼은 그저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이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는 게 옳다.
그래서 싱싱한 딸기가 잔뜩 올라간 매력적인 타르트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곧 초콜릿 에클레어와 오렌지 마들렌을 연거푸 베어 물고 입안 가득 우물거렸다.
“역시 그대는 달콤한 걸 좋아하는 거지?”
열심히 과자를 집어 먹는 오스칼을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에렌이 쿡쿡대며 웃었다. 지난번엔 사양하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오늘은 빼지도 않고 자신이 준비한 과자들을 냠냠 잘도 먹었다.
접시 위의 과자가 하나씩 오스칼의 입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즐거웠다.
역시, 왕실 납품 전용 베이커리를 인수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아몬드와 호두가 듬뿍 올라간 파이로 손을 가져가던 오스칼이 새초롬한 눈으로 에렌을 흘겨보았다.
그는 오스칼이 다과를 즐기지 않는다고 해놓고, 앞에 놓인 과자를 남김없이 다 먹어 치운 일을 두고 놀리는 것이 분명했다.
“경에겐 꽃다발도, 과자도 싫다 한들 소용없으니 어쩌겠어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꽃다발은 좋아하지만 만날 때 주는 건 부담스러워서 싫다는 거였잖아? 그래서 사람을 시켜 보낸 건데.”
에렌이 커다란 손으로 턱을 괸 채,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아…. 달다 달아.’
그의 눈웃음 때문인지, 호두 파이 때문인지. 눈과 입이 모두 달콤해지는 바람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살짝 한숨을 내쉰 오스칼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스칼이 찻물을 끝까지 삼킨 것을 확인한 에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왕실 근위대 기사가 주인공인 그대의 첫 번째 소설 말이야. 혹시 모티브가 된 사건이라도 있는 건가?”
이 외전의 원작,〈여기사 오스칼〉을 각색한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조심스럽게 소설에 대해 묻는 에렌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왜요?”
“국왕의 이복동생이 반란을 일으키고, 근위대장이 반역자로 몰려 죽는다는 내용 말이야.”
“그런 거야 흔한 소재잖아요?”
“하지만 그 내용이 25년 전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연상하게 하는 건 사실이거든. 거기다 소설엔 근위대장이 누명을 썼으며 국왕이 충신인 근위대장을 일부러 탄압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설마 국왕이 소설을 읽고 기분이라도 상했대요?”
오스칼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여스칼〉을 각색해 출간한 건 돈을 버는 것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 칼릭스 공작가의 누명을 벗길 때, 왕국민에게 칼릭스 공작 가에 대한 유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역사를 모티브로 한 픽션이랄까. 의외로 미디어의 영향력은 꽤 강한 법이다.
에렌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아직 왕실에서 문제를 삼은 건 아니야. 로맨스 소설에까지 신경을 쓰는 작자들은 아니라서.”
“그런데요?”
에렌이 곤란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25년 전 세드릭 칼릭스가 연루된 사건을 재연한 듯한 소설. 게다가 그 소설의 작가는 세드릭의 아들이 이끄는 기사단의 일원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에렌이 오스칼의 초록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쨌든 자칫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걱정하는 거야. 더군다나 왕국민들이 소설에 열정적으로 반응하고 있기도 하고.”
보기 드물게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러다 소설 판매를 중단하자는 말까지 나올 것 같아 오스칼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 소재야 다른 로맨스 소설에서도 많으니 특별히 저희 소설에만 문제 될 것이 없잖아요!”
오스칼이 제법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더는 이 문제로 논쟁할 마음이 없는 듯한 오스칼의 반응에 에렌은 입을 다물었다. 결국, 말을 삼킨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국왕이 이런 통속소설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만큼 왕국민의 생활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 그는 다른 문제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아르투아가 일을 꾸미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그녀가 더 언급하기를 원치 않는 듯해 이 문제를 옆으로 밀어두기로 했다. 그리고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맞아. 그대에게도 생각한 바가 있겠지. 그대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한가한 게 아니라면 괜한 걱정 말죠?
오스칼이 부러 툴툴거렸다.
“한가하다니?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엄청 바쁜 사람이거든. 이 인쇄소에도 원래 몇 달에 한 번 정도만 들러. 요즘은 누구 덕분에 자주 오게 되었지만.”
에렌이 턱을 손으로 괸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은근히 자신을 꾀는 듯한 모습에 오스칼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럼 그냥 심부름꾼을 시켜서 정산금만 보내 주면 되잖아요. 저도 매번 여기까지 오는 게 번거롭다고요.”
항의하는 듯한 오스칼의 말에 그가 다리를 바꿔 꼬며 상체를 단단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어 깍지를 끼고는 자신의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렸다.
“그건 안 되겠는데. 내가 그대를 자주 보고 싶거든.”
에렌의 노골적인 표현에 오스칼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왜, 왜요?”
“보고 싶은데 이유가 있어야 해?”
“그건… 아니지만….”
오스칼이 말끝을 흐렸다.
“그 칼릭스 가의 남자와는 매일 보는 게 아니었나.”
“여기서 레오 이야기가 왜 나와요? 레오와는 같이 사니까 매일 보는 건데요.”
에렌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웃음기가 자취를 감춘 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야. 그자와 마드모아젤이 같이 사는 거 말이야. 마치 그대가 칼릭스의 여자 같잖아.”
“카, 칼릭스의 여자요?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아요! 레오는 제가 여자라는 것도 모를뿐더러, 전 그저 기사단의 기사로 함께 지내는 것뿐이라고요!”
오스칼이 얼굴을 붉히며 거세게 반박했다. 에렌이 눈을 찡그렸다. 그 자식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 같던데.
“그대의 생각은 그럴지 몰라도….”
에렌은 인쇄소에서 오스칼을 등 뒤에 숨기고는 자신을 경계하던 레오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게 정말 동료를 대하는 기사의 눈빛이라고? 에렌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분명 경쟁자를 보는 수컷의 눈이었다.
에렌이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이 눈치 없는 아가씨에게 그 자식의 생각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그리고는 짧게 말을 정리했다.
“아무튼, 그자를 조심해.”
그러나 오스칼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조심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사실 거기가 아니면 있을 곳도 없다고요.”
에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대었다.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그가 턱을 괴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