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아르투아 대공이 수확제에서 정부의 아들을 후계자로 공표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에렌은 집무실 가운데 놓인 테이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단테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테이블 위 다과 접시에서 막 수확한 햇호두알 두 개를 집어 손으로 이리저리 굴려댔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아들의 이름은 ‘발사자르’라고 하더군요. 라인하트에 들어온 이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단 하나에 손을 대고 있는 듯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단이라고?”
“무얼 취급하는지 정확하지 않은데 자금의 움직임은 확인됩니다. 최근엔 현금이 오가는 흐름이 조금 주춤한 듯합니다.”
“그게 아르투아 대공의 자금줄이었나.”
호두를 굴리는 것을 멈추고 에렌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정부의 신상은 파악이 되었나?”
“그게… 아들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지만, 도무지 정부의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귀족인지, 평민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얼굴을 본 사람도 드물답니다. 저택의 사용인들도 매우 제한적으로 고용했다더군요.”
“저택의 정보는 확보했나.”
“예, 시에나 외곽의 저택인데…. 특이한 것이 그 저택의 명의자가 왕실 근위대장인 ‘드레이코 호그’더군요.”
“젠장. 역시 근위대장은 철저하게 숙부의 사람이었군.”
에렌의 손아귀에서 호두알이 우둑하며 부서졌다. 에렌이 바스러진 호두 껍데기를 바닥에 털어내며 말했다.
“그들의 뒤를 좀 더 캐봐. 여의치 않으면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
“존명.”
에렌의 명을 받은 단테가 빠르게 방에서 사라졌다.
***
시에나의 밤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우와 당신 정말 쓸모 있구나?”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종탑에 걸터앉은 오스칼이 탄성을 질렀다. 통닭을 산 후 클로드가 손을 튕기자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달라졌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광장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종탑이었다.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우아하면서도 단정한 모양의 종루는 시에나의 명소 중 하나였다.
종탑에서 시에나의 야경을 바라보며 닭 다리를 뜯고 있자니, 흡사 전망 좋은 루프톱에서 식사하는 기분이었다.
높은 탑 위로 찬 기운이 도는 바람이 불어오자, 클로드는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겨 온기가 도는 공기막을 만들어냈다.
“내 마력으로 만든 결계야.”
“마법이란 거 되게 편리하네.”
닭고기를 우물거리며 오스칼이 클로드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자 클로드가 자랑스러운 듯 뿌듯하게 웃었다. 오늘은 단연코 검은 숲의 마녀와 거래한 이후 가장 보람 있는 날이었다.
노릇하게 잘 익은 살점을 꿀꺽 삼킨 오스칼이 들뜬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사탕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과 초승달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났다.
오스칼이 아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살던 곳에선 이렇게 많은 별을 보기가 어려웠는데.”
“어디서 살았는데?”
“비밀이야.”
클로드가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오스칼이 그의 휘어진 은빛 눈썹을 보며 웃었다.
“오늘 달은 당신 눈썹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 머리카락도 눈썹도 달빛 같아서 예쁘다는 얘기야.”
오스칼을 바라보는 클로드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요동쳤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빴다. 그러나 결코 괴로운 감각은 아니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부르더라.
그가 눈을 들어 오스칼이 가리키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빛을 담아 하얗게 빛을 내는 광원. 그의 눈가에 달빛이 고였다.
“달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야.”
“그래? 500년간 살면서 한 번도?”
오스칼이 놀란 듯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 같은 건 없었거든.”
“당신 삶도 참 팍팍했네. 달빛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오스칼이 클로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어 보였다. 클로드가 오스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끔찍한 죽음의 색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여태껏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조여들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이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 올랐다.
“지금 당신, 안아도 돼?”
“뭐? 미쳤어? 안돼!”
또 시작이냐는 듯 오스칼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오스칼의 단호한 거절에도 클로드가 눈을 접어 웃었다. 어쩐지 뭔가를 꾸미는 듯한 웃음이었다.
“하늘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아?”
“음…. 뭐 좀 더 잘 보이면 좋겠지?”
뜬금없는 클로드의 물음에 오스칼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클로드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좋아. 그럼.”
“으악!”
순식간에 오스칼을 안아 든 클로드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뭐 하는 거야!”
발아래가 휑해지자 오스칼이 질겁을 하며 클로드의 목덜미에 바짝 매달렸다. 즐거운 듯 오스칼의 몸을 단단히 감아쥐고 더 높이 솟아오른 남자가 속삭였다.
“이렇게 하늘 위로 떠오르면 더 잘 보일 거 아냐.”
“윽. 당신 진짜!”
기어이 자신을 품에 안은 클로드를 향해 눈을 흘긴 오스칼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은빛 물길이 검은 하늘을 가르며 흐르고 있었다.
별 무리에 풍덩 빠져있는 기분을 느끼며 오스칼이 탄성을 내질렀다. 클로드에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하늘을 난다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우와. 저게 은하수인가 봐! 진짜 예쁘다. 그렇지?”
“당신이 예쁘다면, 예쁜 거겠지.”
“이제 당신도 한 번씩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살아봐.”
“응. 앞으론 그렇게 살게.”
“그래, 아무래도 당신은 500년간 헛살았던 거 같아.”
오스칼이 장난스럽게 말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클로드가 따라 웃었다.
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이 이렇게 웃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다.
계속 살아서, 웃는 이 사람을 보고 싶다.
살고 싶다는 낯선 감각에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
기사단이 노이어에 다녀온 며칠 새, 어느덧 선선한 바람결에 늦더위가 물러나고, 파란 하늘이 높아지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노이어에서의 활약 덕분인지 우리 기사단의 명성이 꽤 높아져서, 입단 자원자들이 늘었어. 소설 수익금도 순조롭게 들어와서 자금도 넉넉하고.”
연무장에서 단원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마티스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청년들에게 훈련을 지시하고 있던 오스칼이 마티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노이어에 다녀온 이후, 정식으로 기사단의 훈련을 맡게 된 오스칼이었다.
“오늘 인쇄소에 가거든 에렌 경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네.”
멀리서 들린 에렌의 이름에 연무장 한쪽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던 레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남들보다 예민한 레오의 감각은 이런 때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이 기특한 것. 네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마티스가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익살스럽게 오스칼의 양 볼을 꼬집어 쭉쭉 늘려댔다.
“아티스 아포어.”
마티스의 장난에 오스칼이 인상을 찌푸리며 칭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마티스가 빙긋이 웃으며 오스칼을 놓아주었다.
휙-휙-
바람을 가르는 칼날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 소리에 오스칼이 레오를 흘긋 바라보았다.
노이어에서 돌아온 후, 오스칼은 이따금 레오를 볼 때마다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오스칼의 볼이 살짝 핑크빛으로 물들자 마티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근데 넌 어째 점점 예뻐지는 것 같다?”
“뭐어?!”
마티스의 실없는 농담에 오스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운동량과 식사량이 늘어날수록 건강해져 혈색이 도는 얼굴은 생기 있게 빛나고, 젖살이 빠진 이목구비에서는 어느새 소년미가 사라졌다.
말간 피부 덕에 청초한 느낌을 주는 외모에서는 한창 싱그러운 20대 여인에게서 풍기는 어여쁨이 느껴졌다. 투박한 옷차림과 걸걸한 말투만으로는 더 가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 어엿한 사내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요샌 예쁜 남자가 인기라는데.”
마티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우지끈-
타격용 허수아비가 레오의 검에 산산조각이나 부서졌다. 요란한 파열음에 오스칼과 마티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레오는 무심한 태도로 검을 갈무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곧 레오에게서 시선을 거둔 오스칼이 마티스를 향해 도끼눈을 떴다.
“난 예쁜 남자로 불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마!”
이곳은 보수적인 성 역할 관념이 뚜렷한 세계였다. 여자가 요리하는 것 외에 칼을 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인의 몸으로는 기사서임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들과 함께 훈련하는 것조차 황당한 일로 취급되었다.
오스칼이 굳은 표정으로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부터 검에 재능을 보였던 원작의 여자주인공은 별종 취급을 받으며 훈련장에서 쫓겨났다. 오직 은둔 기사였던 그녀의 스승만이 그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받아주었을 뿐이다.
자신의 검을 왕국에 바치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남장을 한 채 기사가 되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지만, 세간의 시선이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세드릭과 레오의 유모 외에는 끝내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물론 오스칼 역시 기사단에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게 어떨지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결국 이해해주지 않을까. 특히 레오는… 자신의 어머니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희미하게 피어오른 기대를 떨치듯 오스칼이 고개를 저었다.
오스칼의 목표는 외전의 남자주인공 레오의 곁에 머물며 그의 해피엔딩을 돕고 소설을 탈출하는 것이다. 오스칼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기사단의 청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모든 걸 밝힐 수는 없었다.
여자와는 기사단에서 함께 훈련을 받을 수 없다며 내쫓기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오스칼은 겁이 났다.
‘남자기사’인 저를 좋아했던 청년들이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아껴줄까? 그들이 느끼게 될 배신감이 두려웠다.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청년들, 거짓말쟁이인 자신에게 실망해 돌아서는 레오.
이미 기사단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정이 담뿍 들어버린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무서웠다.
그 모든 생각의 끝에서 오스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티스는 속도 모른 채 여전히 농담하듯 낄낄댔다.
“사내 녀석이랍시고 예쁘단 소리에 발끈하긴.”
“알았으면 하지 마! 휴, 난 이제 인쇄소에 가봐야 하니까 네가 훈련을 마무리해줘.”
오스칼이 다시 한번 씩씩거리듯 당부했다. 마티스는 우스개로 하는 말이겠지만, 오스칼에겐 심각한 일이었다. 오스칼이 인상을 구긴 채 뒤돌아 저벅저벅 걸었다.
제 놀림에 파르르 반응하는 오스칼이 귀여운 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티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훈련 중이던 레오가 어느새 마티스의 곁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