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서민의 생활감이 묻어나는 소박한 골목, 그 공간과 너무나 이질적인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빳빳한 흑색 슈트를 차려입은 아름다운 은발의 남자.
차갑지만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운 골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연신 골목 안쪽을 살폈다.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인영을 발견한 그의 입꼬리가 휘었다. 석양을 머금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따뜻한 빛을 띠었다.
“일찍 나와 있네?”
“당신을 기다리는 게 좋아서.”
별 시답잖은 소릴 듣는다는 듯 오스칼이 질색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평소엔 사람으로 북적이던 골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어쩐지 낯선 분위기에 오스칼이 고개를 기울였다. 클로드가 왜 그러냐는 듯 오스칼을 응시했다.
아…. 설마.
“당신,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글쎄, 몇 시간쯤 됐으려나.”
“하아…. 당신이 시내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얼마나 무섭겠어? 대낮부터 괜히 공포감을 조성할까 봐 저녁때쯤 보자고 한 건데, 몇 시간 전부터 나와 있으면 어떡해?”
악명 높은 샤무아의 수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리의 사람을 쫓아버린 모양이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가 억울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이마를 한번 짚은 오스칼이 얼른 그를 잡아끌어 무기점으로 들어갔다.
텅 빈 가게를 초조한 낯빛으로 지키던 무기점 주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두 사람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 어서 오십시오.”
무기점 주인 마르코는 몇 시간 전부터 딱 죽을 맛이었다.
제 눈앞의 남자는 시에나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재앙의 상징’이었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무기점 앞에 버티고 서서 몇 시간째 떠나질 않으니, 가게에 손님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가 빨리 자리를 떠나주기만을 기다렸건만, 떠나긴커녕 도리어 제 가게에 방문했다.
클로드가 차가운 눈빛으로 마르코를 내려다보았다.
“검을 좀 사려고 하는데.”
“예예…. 이리로….”
마르코는 손수건으로 연신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 역시 꽤 건장한 사내였으나, 클로드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꼴을 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남자는 ‘클로드 드보이스’였으니까.
클로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마르코의 모습에, 검을 구경하고 있던 오스칼이 클로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표정 좀 풀어. 다들 무서워하잖아.”
오스칼의 타박에 그가 마르코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한쪽 입가에만 설핏 걸린 그 냉랭한 미소는 도리어 마르코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말았다.
“전, 이 칼이 좋은 것 같은데, 얼마죠?”
잔뜩 걸려있는 검들을 하나씩 휘둘러 보던 오스칼이 마르코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잔뜩 겁을 먹은 마르코를 위해 상냥한 미소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코를 향한 오스칼의 친절한 태도에, 클로드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셨다. 시샘이 난다는 듯 서늘하게 흘겨보는 붉은 눈에 마르코가 납작 엎드렸다.
“뭐, 뭐든 값은 치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갖고 가십시오.”
마르코가 고개를 숙여 연신 절을 해댔다. 오스칼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네? 그럴 순 없어요.”
“고작 이거 하나면 되는 건가? 여기 있는 걸 다 사도 상관없어.”
오스칼이 딱 한 자루의 검만 집어 든 것이 불만인 듯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마르코는 클로드의 말을 제 가게에 있는 물건 전부를 강탈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이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여기 있는 걸 다 사라니, 나더러 혼자 군대라도 만들란 거야?”
클로드의 터무니없는 씀씀이에, 오스칼이 펄쩍 뛰었다. 옷 가게도 아니고 온갖 흉기가 가득한 살벌한 무기점에서 굳이 K-재벌 클리셰를 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클로드는 오스칼의 검소함에 조금 실망한 모양이었다. 시무룩하게 알았다는 듯 오스칼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고는 값을 치르기 위해 싸늘한 눈빛으로 마르코를 바라보았다.
“저 검, 얼마인가?”
“사, 사백 골드….”
마치 제 목숨값이라도 물어보는 듯한 눈빛에 마르코가 와들와들 떨었다.
헉. 마르코의 대답을 들은 오스칼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난번 마티스가 사준 검보다 정확히 2배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놀라지도 않고 계산대에 한 움큼의 금화를 내려놓았다.
“얼른 나가자.”
계산이 끝나자마자, 오스칼이 클로드의 등을 떠밀었다. 금화를 제대로 세지도 못하고 손을 떠는 마르코를 보고 있자니, 이러다 그가 신경과민으로 쓰러지겠다 싶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진 골목엔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정도로 만족한 건가?”
“응. 아주 좋아. 하나면 충분해.”
오스칼이 허리춤에 찬 검집을 톡톡 두들겼다. 새 검이 기분 좋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클로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꼬르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귓가에 들린 생경한 소리에 클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오스칼이 민망한 듯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라고 제 위장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어…. 내 배에서 나는 소린데….”
“당신,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클로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층 더 민망해진 기분에 오스칼이 뒤통수를 긁었다.
“아니…. 배가 고파서 나는 소리야.”
클로드의 얼굴에 당황함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배가 고프다는 기분을 잊고 살았던 그였기에 상상도 못 했던 소리였다. 눈썹을 들어 올린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요리사를 하나 잡아 올까? 분명히 이 근처 식당의 요리사 중에 나와 계약을 했던 자가 하나 있었….”
“제발 그런 무서운 소리 좀 그만해. 이 골목 상권을 죄다 망하게 만들 셈이야?”
“당신이 배고프다니까.”
“그렇다고 요리사를 잡아 와?”
또다시 정도를 모르고 눈을 번뜩이는 클로드였다. 그런 그를 가볍게 타박한 오스칼이 눈을 굴렸다. 기왕 번화가까지 나온 김에 외식을 하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음…. 무기점 주인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래선 당신과 식당에 들어갈 순 없을 거고. 오, 저걸 사서 바깥에서 먹으면 어때?”
오스칼이 따뜻한 주홍빛을 뿜어내는 정육점의 진열장을 가리켰다. 노릇노릇 잘 익은 통통한 닭구이가 꼬챙이에 꿰어진 채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닭고기를 바라보는 오스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
같은 시각, 뤼미에르의 응접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투구를 닦던 레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몇 시간 째 나아진 것 없이 지저분한 투구를 손에 든 채, 그는 응접실 구석에 놓여 있는 장미 다발을 노려보았다.
좁은 제 방에 두기엔 지나치게 크다는 핑계로 에렌의 꽃다발을 응접실에 가져다 둔 오스칼이었다.
꽃을 볼 때마다 제 생각을 하라는 것이 에렌의 의도였다면,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물론 에렌을 떠올리는 사람이 오스칼이 아니라 레오라는 게 문제였지만.
“지긋지긋한 장미 같으니라고.”
레오가 불쾌한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제 레오는 장미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왜 다들 그 녀석에게 장미를 주지 못해 안달인지.
“그런데 단장님. 에렌 경 말입니다. 남색가가 틀림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있던 제라드가, 장미를 쏘아보고 있는 레오를 향해 불쑥 말을 걸었다.
“제라드. 넌 왜 네 집을 놔두고 여기 와서 글을 쓰고 있나?”
“오스칼 형님께 글을 보여드리러 왔는데, 갑자기 시에나로 외출하시는 바람에…. 오실 때까지 글을 쓰며 기다리려고…요.”
레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제라드가 얼른 눈을 내리깔고 부리나케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오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다시 투구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쩐지 제라드의 말이 신경 쓰여 투구 손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레오가 넌지시 제라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자가 남색가라고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레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라드는 기다렸다는 듯 쫑알쫑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아무리 사업파트너라 해도 남자가 남자에게 장미 꽃다발을 준다는 것부터 수상하지요. 게다가 그때 그 슈트! 남자가 옷을 선물한다는 건, 보통 의미가 아닙니다.”
“그게… 어, 어떤 의미인가?”
레오는 자신이 오스칼에게 사준 여러 벌의 옷을 떠올렸다. 대체 그게 어떤 의미였던 거지? 제라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뜸을 들였다. 레오가 답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마음을 졸였다.
“바로, 그 옷을 벗기고 싶다는 의미라고요!”
“으헉. 쿨럭쿨럭.”
순식간에 말문이 막힌 레오가 기침해댔다. 옷을 선물하는 것이, 뭐 어떻다고?
“게다가 형님에게 닿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 태도. 은근히 드러내는 독점욕. 형님만 특별대우를 하는 모습! 분명 형님을 꼬시고 있는 겁니다.”
제라드의 말에 다시 한번 레오의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 꼭 그렇다고 해서 남색가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단장님, 에렌 경은 남색가가 확실합니다. 분명 오스칼 형님에게 첫눈에 반한 거라고요. 사실, 형님이 좀 예쁘장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제라드가 비밀이야기라도 하듯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말에 레오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제라드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색가라는 둥, 첫눈에 반했다는 둥 하는 불쾌한 표현들.
그러나 그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이 자식 역시 오스칼을 두고 지금까지 예쁘고 귀엽다고 생각해 왔다는 점이었다.
저놈이 그간 오스칼을 그런 음흉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단 말인가!
“제라드 자카, 아무래도 요즘 글 쓰느라 훈련에 소홀한 것 같은데.”
레오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응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에 제라드는 신나게 떠들던 입을 얼른 다물었다.
제라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제라드는 또다시 연무장을 구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눈썹을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