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44)화 (44/138)

44화



 

“칼릭스 가의 인장을 위조해서 가짜 증거를 만들게 한 사람, 그게 누구야?”

오스칼의 질문에 클로드가 새침한 표정이 되었다.

“궁금한 게 그거였어? 난 말할 수 없다니까.”

“그럼 당신이 가서 증인이라도 서주면 안 돼? ‘내가 누군가의 사주로 25년 전에 꾸민 짓입니다, 칼릭스 가문은 죄가 없습니다’하고.”

“당신,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인 거 알아?”

젠장, 이 방법은 안 통하네. 오스칼이 침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원작에서 칼릭스 가를 모함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간 자신이 추리한 가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선대 국왕인 라인하트 9세가 칼릭스 가를 숙청하기 위해 의뢰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스칼이 불쑥 클로드를 향해 물었다.

“피의 맹약은 계약자의 피로만 풀 수 있어? 계약자가 죽고 없을 수도 있잖아.”

“맹약의 계약서는 직계후손의 피에도 반응해.”

“와. 선대 국왕이 범인이라면, 정말 국왕의 목을 따는 게 답이었잖아?”

뜻밖의 정보에 오스칼이 입을 딱 벌렸다. 오스칼의 말에 클로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당신 목표가 국왕이었어? 그럼 내게 국왕의 목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 돼.”

“뭐? 정말 그런 것도 가능해?”

오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이대로 엔딩까지 가는 고속도로잖아?

“난 언제든지 국왕의 목을 당신의 손에 쥐여 줄 수 있어.”

클로드가 나른하고 위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차가운 손가락을 오스칼의 손에 얽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뜨거운 갈망이 일렁였다.

“당신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 내게 준다고 하면.”

“그럼 그렇지. 안 사요, 안 사.”

오스칼이 클로드의 손을 뿌리쳤다.

자신이 이 고생을 하는 이유가 제 영혼을 이 소설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인데, 영혼을 달라고? 황당한 제안에 헛웃음만 나왔다.

“근데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왕을 없앨 수도 있으면서, 왜 뒷골목에서 나쁜 짓이나 하며 사는 거야?”

오스칼의 말에 클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뒷골목이라니. 마치 내가 마을 불량배라도 된 것 같은 말이군.”

“어찌 됐든,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 하는 일보다 더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거 아냐?”

“다른 자들이 원하는 건 고작 왕좌 따위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

“그럼 뭔데?”

그가 오스칼의 눈을 응시하며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지.”

클로드의 말에 오스칼은 또 한 번 영혼이 탈곡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 자식이, 알고 보면 매번 이런 식으로 계약자들의 영혼을 받아 간 거 아냐? 플러팅으로 영혼을 빼놓는 방법으로.

“혹시 너 흑마법에 뇌까지 지배되어 버린 건 아니지?”

“지배라니. 굳이 지배당했다고 한다면…. 난 당신에게 지배당한 것뿐이야.”

“그만!”

오스칼이 손을 들어 클로드의 입을 막았다. 모쏠로 살며 플러팅과는 평생 담을 쌓고 살았던 오스칼에게, 오늘 낮부터 혈중 플러팅 농도는 치사량 수준이었다.

더 듣다가는 오늘 중으로 내가 오글거려 죽든, 저놈이 내 칼에 맞아 죽든, 두 사람 중 하나는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당신도 내게 지배당해 주면 안 될까.”

색정적인 음성이 목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그의 붉은 입술이 오스칼의 흰 목덜미를 스쳤다. 그 야릇한 감각에 오스칼의 등이 오싹해졌다.

차가운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오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아득해지는 감각 속에서 오스칼이 그의 어깨를 쳐냈다.

“작작 좀 해! 난 너한테 관심 없거든?”

“하지만 당신 몸은 비교적 내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클로드가 빨개진 오스칼의 귓불과 소름이 잔뜩 돋아있는 팔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오스칼이 소리를 꽥 질러버렸다.

“이건 내 의지와 관계없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라고!”

“아, 그렇다면 당신 몸이 자연스럽게 날 받아들일 모양인가 보군, 여기 봐 내 몸도 당신에게….”

자신의 손을 부적절한 곳으로 옮기려는 클로드의 몸짓에 기겁한 오스칼이 결국 칼을 뽑아 들었다.

“이 변태 놈이!”

“이크.”

번뜩이는 칼날이 클로드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자, 그가 얼른 몸을 물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날이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칼자루만 덩그러니 쥐게 된 오스칼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이, 이게 뭐야. 너 지금 대체 내 검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정당, 정당방위였어.”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충격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오스칼의 모습에 클로드도 당황한 듯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천천히 검날이 사라진 칼자루를 들여다보던 오스칼의 눈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흐어엉. 이 나쁜 놈아. 이거 새로 산 검인데!”

오스칼이 바닥에 주저앉아 방금까지 자신의 검이었던 잿더미를 부여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여태껏 주워온 장식용 검을 쓰다가 이제야 가진 제 검인데. 드디어 손에 익어 휘두를 만하다 했더니 망할 흑마법사 놈의 손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클로드는 오스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손을 허공에서 휘저었다.

“그…. 그 눈에서 흐르는 물을 당장 멈춰.”

“뭐? 너 내 칼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클로드가 안절부절못하고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으리라 생각했지 이렇게 울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는 초조한 듯 붉은 눈을 좌우로 굴렸다. 오스칼이 퉁퉁 부은 눈으로 클로드를 원망스럽게 응시했다.

“자, 잠깐.”

그 눈빛에 흠칫 몸을 떤 클로드가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

방에 혼자 남은 오스칼은 고운 가루가 되어버린 자신의 검을 한참 동안 멍하니 응시했다. 쓸쓸한 표정으로 잿가루를 손으로 쓸며 검과의 추억을 떠올리자니 다시 한번 눈물이 차오르던 그때,

“푸에취!”

오스칼이 요란하게 재채기를 했다.

“콜록콜록. 제엔장! 하필 또 검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건 뭐람. 치우기 힘들게. 하여간 번거로운 노인네 같으니.”

오스칼이 욕설이 섞인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이걸 다 치울 생각을 하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체념한 듯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내 탓이다. 최애작을 잘못 고른 내 탓이라고.”

자조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곱게 쌓인 가루를 치우기 위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휘잉-

방안에 검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꺄아악!

오스칼이 양 뺨에 손을 올리고 경악한 표정을 했다. 불어온 바람과 함께 가루가 사방팔방 흩날렸다. 순식간에 가루를 뒤집어쓴 오스칼이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당신! 정말 끝까지 이러기야?”

“헉헉, 여기 당신을 위해, 검을 갖고 왔어.”

몇 시간 만에 다시 나타난 클로드가 숨을 헐떡이며 방 한쪽을 가리켰다. 클로드의 창백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오스칼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대체 이게 다 뭐야?”

검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당신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세계 최고라는 검을 전부 구해왔어. 물론 저기 있는 걸 모두 가져도 돼.”

클로드가 그제야 한숨 돌렸다는 듯 은사로 수놓아진 물빛 손수건을 꺼내 우아하게 이마를 훔쳤다. 한여름에도 땀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서늘한 얼굴에 맺힌 땀이 이질적이었다.

“다, 당신… 대체 뭘 갖고 온 거야.”

오스칼의 눈동자가 커졌다.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검들은 언뜻 보아도 예사롭지 않았다.

오스칼이 벌벌 떨리는 손을 뻗어 거대한 검산의 가장 꼭대기에 박혀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사실 검을 집어 들었다기보다 모셔 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이, 이거 혹시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 아니야?”

“그런 이름의 검인가? 아무튼, 왕이 될 자만이 뽑아 들 수 있다는 검이라더군. 일단 서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검이라기에 갖고 왔어.”

오스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곧 푸른 용이 새겨진 무시무시한 무기에 닿았다.

“잠깐. 이건 뭐야?”

오스칼이 족히 20kg은 나가 보이는 초승달 모양의 대검을 양손으로 힘겹게 들어 올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검. 오스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건 동대륙에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자가 쓰던 검인데….”

“이거 설마 청룡언월도야?”

저 미친놈이 관우가 쓰던 검을 들고 와…? 오스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제일 구하기 힘들었던 건 이거야.”

클로드가 뿌듯한 표정으로 붉은빛을 뿜어내는 검을 집어 들었다. 검은 마치 마력이라도 깃든 듯 스스로 빛을 내며 공명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드래곤 소드란 건데, 이 검을 가진 자는 전설의 마물 드래곤을 무찌를 수 있는 용사가 될….”

오스칼이 입을 딱 벌렸다.〈여기사 오스칼〉세계관에 드래곤이란 건 있지도 않아!

“이 자식아! 지금 날 주려고 엑스칼리버, 청룡언월도, 드래곤 소드를 갖고 온 거야?”

오스칼의 외침에 클로드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분명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검을 갖고 왔….”

“당장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놔! 저기 쌓여 있는 다른 검들도 마찬가지야. 당신 지금 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셈이야?”

세계 속에서 전설로 이름난 검들을 K-웹소설 중에서도 망한 소설인 〈여스칼〉 세계관에 가져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원래 쟤들이 있던 세계관은 어쩔 거냐고!

클로드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그리고는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난 그저 당신이 검을 잃었다고 슬퍼하길래….”

“그냥 전투용 검이면 된다고! 나더러 지금 전설의 검을 들고 세계를 구할 용사라도 되란 거야?”

오스칼이 앙알거렸다. 이 남자, 오래 살아서 언어 구사에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더니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클로드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방에 쌓여 있던 검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그럼 난 어떡해? 이대로 당신한테 미움받아야 하는 거야?”

제가 준비한 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오스칼이 야속한 듯 클로드가 눈을 내리떴다. 그의 은빛 속눈썹 위로 처량하게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오스칼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저녁에 시에나 무기점 앞으로 나와. 내가 검을 고를 테니 당신이 하나 사줘.”

“정말인가?”

클로드의 붉은 눈이 반짝, 생기를 되찾고 오스칼을 향해 깜빡거렸다. 오스칼이 그를 먼저 만나자고 하다니!

“그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당신 부자잖아.”

“당신이 원한다면 무기점도 사줄 수 있어.”

순식간에 밝아진 그의 표정에 오스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오스칼은 언제 웃었냐는 듯 단호하게 떠나려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먼저, 떠나기 전에 당신이 날려버린 이 가루는 다 치워놓고 가…. 에취!”

가루를 뒤집어쓴 덕에 코가 가려워 연신 훌쩍이던 오스칼이 결국 재채기를 내뱉고 말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오스칼의 얼굴이 꽤 사나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