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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41)화 (41/138)

41화



 

레오는 연회장과 연결된 어두운 복도를 지나, 달빛이 비치는 복도를 향해 걸었다. 그는 달빛에 드러난 오스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주정뱅이 같으니.”

술에 취해 잠들었으니 이번에는 제가 ‘공주님 안기’를 했다고 투덜대진 않을 것이었다.

문득 몸 바깥으로 떨어져 허공에 달랑거리고 있는 오스칼의 불그스름한 팔목에 시선이 닿았다. 오늘따라 가느다란 팔목 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이런 팔목으로 검은 어떻게 휘두르는 건지.”

매일 같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 치우는 녀석을 안아 든 것 치고는, 양팔이 가벼웠다. 그가 의문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도적 떼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도적 떼의 수장 바론은 레오에게도 힘겨운 상대였다. 도끼와 장검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휘두르는 그의 압도적인 근력은 레오마저도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바론의 검을 받아내는 순간 그의 귀에 들린 오스칼의 비명이었다.

비명소리에 이어, 오스칼이 낙마하는 모습을 본 이후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힘으로 제 눈앞의 바론을 단숨에 베어버린 후,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엉망이 된 자신이 오스칼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녀석과 있으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기분이군.”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스칼의 방에 들어서자 각을 잡아 정리한 침대가 보였다. 그의 눈가에 웃음이 서렸다.

이 녀석은 빨래든 침대든 각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지.

함께 살고 있다고는 하나, 그는 오스칼의 방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오스칼은 잠을 잘 때나 옷을 갈아입을 때나 자신의 방문을 꽁꽁 걸어 잠갔다.

씻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을 마치고 사내 녀석들끼리 물이라도 끼얹게 되면, 시커먼 놈들과 함께 하는 건 사양이라며 한사코 꽁무니를 뺐다.

“젠장, 별생각을 다 하는군.”

그의 생각이 ‘오스칼의 침대’에서부터 ‘오스칼과의 샤워’까지 이어지자 레오는 어쩐지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생각을 떨치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쾅!

그때, 열려 있던 방문이 복도에서 불어온 바람에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소리에 레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는 그에게 새삼, 이 닫힌 공간 안에 자신과 오스칼 단둘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차가운 밤바람에 저도 모르게 온기를 찾는 것인지, 오스칼이 레오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오스칼이 제 가슴으로 내뿜는 숨결이 술기운으로 뜨거웠다. 드러난 오스칼의 목덜미가 묘하게 보드라워 보였다.

쿵 쿵 쿵 쿵

레오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뿌리치듯 오스칼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가 오스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밋빛으로 붉게 물든 뺨 위로, 길게 내려앉은 밤갈색의 속눈썹이 이따금 떨리고 있었다.

문득 오스칼이 잠꼬대를 하듯 입을 오물거렸다. 통통한 볼이 귀여워 살짝 웃어버린 그는, 어쩐지 머쓱해져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괜히 헛기침을 한번 했다.

“흠흠.”

“레오…. 로즈랑 행복….”

오스칼이 잠꼬대인지 술주정인지 모를 말을 했다. 레오가 미간을 좁혔다.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자꾸 로잘린 영애와 엮으려는 건지.”

침대 맡에서 팔짱을 낀 채 오스칼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오가 낮게 혀를 찼다. 자신도 로잘린 영애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건 피차 로잘린 영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오히려…….”

레오가 불쑥 무슨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베갯잇 위로 흐트러진 오스칼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지자, 레오는 이대로 더욱 상체를 숙여 오스칼에게 닿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때 오스칼이 눈을 부스스 떴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오스칼이 레오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레오는 숨을 참았다.

“헤헤, 레오 행복해야 해.”

오스칼이 말갛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잠꼬대 같은 그 말을 끝으로 오스칼은 완전히 잠들어 버렸다. 창문 너머의 달빛이 잠든 오스칼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뒤늦은 취기가 오르는 것일까. 오스칼의 뺨과 입술에 달빛이 닿자 레오의 맥박이 빨라졌다. 열에 달뜬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타는 듯한 갈증이 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침대 맡을 짚고 선 그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숙어졌다. 모든 게 다 취기 때문이리라.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남자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

얼큰한 해장국이 간절한 아침이었다. 숙취로 퀭한 얼굴을 한 오스칼이 딱딱한 호밀 빵을 꾸역꾸역 씹었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성을 간다.”

“형님은 성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옆에 앉은 제라드가 해맑게 지껄였다.

“내가 성이 없는 평민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내가 성이 없지, 힘이 없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오스칼이 제라드의 멱살을 잡으려다, 머리가 찡- 울려 그만두었다. 연회장에서 실컷 술을 퍼마신 이후, 눈을 떠보니 제 방 침대였다.

제라드는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오스칼에게, 그를 방으로 옮겨 준 것은 단장님이라 알려주었다.

“제라드, 나 어제 술 먹고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니지?”

생각해 보니 숨기는 것도 많은 주제에,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나 싶었다. 오스칼이 자책하듯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전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근데 왜 마티스는 아침부터 내 얼굴을 보자마자 거나하게 한숨을 쉬고, 레오는 날 슬금슬금 피해 다니는 거야?”

오스칼이 오늘 아침 어딘가 이상했던 두 사람의 태도를 떠올렸다.

“취해서 완전히 곯아떨어지셨는데 무슨 실수를 하셨답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형님, 오늘 밤에 있을 무도회에 함께 갈 파트너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한 일입니다!”

“아, 맞다 무도회.”

‘오스칼, 오스칼이 제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싱그럽게 웃으며 그에게 제안해오던 로잘린의 웃는 얼굴이 오스칼의 머리를 스쳤다.

“망했다….”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 오스칼이 숙취에 푸석한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

로잘린 영애의 야심 찬 승부수는 노이어 남작의 한마디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남작은 환송 연회에서 로잘린의 파트너는 반드시 기사단장인 레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사단을 위한 자리인 만큼, 성의 안주인 역할을 하는 로잘린이 기사단의 대표와 가장 먼저 춤을 추는 것이 예의라는 이유였다.

눈썹이 팔자가 되어 울상을 짓는 로잘린을 뒤로하고, 오스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마터면 남주와 여주 사이에 끼어들 뻔했네.’

이제야 삐걱거리던 전개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환송 연회는 소박하지만 유쾌했다. 귀족들의 우아한 무도회라기보다 오히려 영지의 작은 축제에 가까웠다. 성 안팎의 남녀노소가 자유롭게 참석한 연회는 다 함께 어울려 즐기는 느슨한 분위기였다.

멋지게 차려입은 기사단의 젊은 청년들은 노이어 영지의 젊은 아가씨들과 어울릴 생각에 들떠 있었다.

제라드가 실실 웃으며, 연회장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오스칼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형님은 어떤 아가씨가 마음에 드십니까? 저는 음악이 시작되면 저기 보이는 빨간 머리 아가씨께 춤을 신청할 겁니다.”

“그래, 부디 퇴짜 맞지 않길 바란다.”

오스칼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씩 웃어 보였다. 제라드가 그가 쓴 소설의 대사만큼만 입을 털 수 있다면 백전백승일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 대사를 소화하는 얼굴이 문제긴 하지만.

“형님은 아가씨들께 안 가십니까? 형님도 꽤 인기가 많으실 것 같은데.”

제라드가 슈트 차림의 오스칼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엄지를 세웠다. 에렌이 보내 준 번쩍거리는 슈트가 제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제법 길어 자연스럽게 곱슬거리는 단발머리에 하얀 피부, 오목조목 예쁘게 자리잡힌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남자답다고 할 순 없지만, 미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나? 그럴 리가. 전혀 인기 없었어. 태어나서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도 없거든.”

“예에? 정말요?”

제라드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요란스러운 반응에 오스칼이 눈을 흘겼다.

“창피하니까 큰 소리로 말하지 마.”

“형님, 그럴수록 시도가 중요한 법입니다. 오늘을 인생 첫 번째 기회로 삼으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른 녀석들한테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얼른 저 아가씨께 춤이나 신청해.”

엄포를 놓는 듯한 오스칼의 말에 제라드는 냉큼 저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다시 혼자가 된 오스칼은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벽에 기대어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레오는 연회가 시작된 순간부터 노이어 남작에게 붙들려 진땀을 빼고 있었다.

남작은 레오와 로잘린을 나란히 세워두고는 노이어 영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계획을 신나게 늘어놓고 있었다.

레오와 로잘린은 다시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이 소설의 해피엔딩이 코앞까지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꼭 왕을 몰아내고 작위를 찾아야 해피엔딩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게 해피엔딩일 수도 있는 거지.”

오스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왈츠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왈츠곡의 리듬이 경쾌했다. 오스칼이 리듬에 맞추어 발끝을 까딱거렸다.

음악이 시작되자 관례에 따라 레오와 로잘린이 가장 먼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교계와는 담을 쌓은 레오였지만,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것인지 춤을 추는 동작이 제법 능숙했다.

“저 녀석, 관심 없는 척하더니 은근히 할 땐 확실히 하잖아?”

어쩐지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오스칼은 오늘 아침에 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들고 있던 술잔의 술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어차피 바꿀 성도 없는데, 뭐.

기사단 청년들이 이곳저곳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아가씨들과 춤을 추고 있었다. 용맹한 녀석들이 바보 같은 표정으로 삐걱대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녀석들을 보며 웃고 있으니 어느덧 음악은 클라이맥스였다. 고조되는 음악에 맞추어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레오와 로잘린 역시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름다운 두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샴페인 한잔에 취기가 오를 리가 없건만.

“아, 덥다.”

오스칼이 연회장의 뜨거운 공기를 탓하며,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테라스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후아.”

테라스로 나온 오스칼이 시원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어 유리문 너머의 연회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곳이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미끄러지듯 빠지게 된 소설 속의 세계.

닫힌 테라스의 문 너머로 음악 소리가 웅웅거렸다.

여전히 저 이야기의 밖에 있는 나는 그저 이 소설의 애독자일 뿐.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내 몫이 아니다.

오스칼이 연회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테라스에 몸을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달이 밝아 눈이 부셨다. 오스칼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차가운 밤공기에서 달큰한 향이 실려 와 코끝을 스쳤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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