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오늘 저녁은 노이어 영주의 배려로, 기사단 만의 만찬이 준비되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티타임이 우당탕 실패로 끝나 풀이 죽어있던 오스칼도, 기사단만의 오붓한 저녁 식사는 설레는 기분으로 기다렸다.
노이어 성에 온 이후, 식사시간에는 줄곧 노이어 남작을 상대하느라 기사단원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레오 역시, 오늘 저녁은 편한 복장을 하고 식탁에 앉았다.
기사단원들이 모두 함께 둘러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크고 길쭉한 테이블은 어제 로잘린이 꺾은 것이 분명한 핑크빛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로잘린이 이번 만찬에 특별히 신경을 썼는지, 커다란 칠면조 요리를 포함해 구운 채소들과 온갖 종류의 과일이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였고, 일곱 종류의 위스키가 준비되었다.
가장 상석에 레오가 앉자, 다른 청년들이 순서대로 테이블에 나란히 마주 앉았다.
어쩐지 레오의 근처에 앉게 되면, 지난 환영 연회 때처럼 소화가 잘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오스칼은 테이블의 가장 끄트머리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어린 기사들이 펄쩍 뛰었다.
“형님,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기사단은 무조건 실력순이라니까요!”
“형님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단장님 옆입니다.”
오스칼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누가 어디에 앉든 무슨 상관이야. 난 이 자리가 좋아!”
오스칼이 고집스럽게 말석에서 떠나지 않자, 멀리서 레오가 채근하는 투로 일갈했다.
“오스칼, 그만 소란피우고 얼른 여기 와서 앉도록.”
레오가 자신의 옆자리에 놓인 의자를 밖으로 빼내 주며 재촉했다. 오스칼은 하는 수 없이 레오가 빼둔 의자에 비척비척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검술 실력으로만 따지면 나도 부단장 자리를 내놔야 할 판이야.”
오스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티스가 껄껄 웃었다.
“앞으로 어딜 가든 네 자리는 여기니까, 괜히 다른 단원들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다음부턴 바로 와서 앉아.”
“쳇.”
준엄한 레오의 목소리에 오스칼이 나지막하게 불평을 했다. 기사단이 모두 자리에 앉자, 레오가 술잔을 높이 들었다.
“이번 출정도 큰 부상자 없이 무사히 잘 끝난 건 모두 너희들 덕분이다. 이틀 뒤면 다시 본부로 돌아가야 하니 오늘 밤은 마음껏 즐기도록.”
“자, 다들 건배!”
레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티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청년들이 일제히 마티스의 말을 따라 외치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냈다. 오스칼 역시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빈 술잔을 든 오스칼이 눈을 부릅떴다. 술이 달았다. 분명 같은 술인데.
엊그제 환영 연회에서 들이켰을 때는 씁쓸했었던 술이 이번에는 달게 느껴졌다. 오스칼의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오스칼은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빙의 전엔 몸 관리를 위해 술을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경기 시즌이 끝나면 친구들과 신나게 술을 마셨었다.
기본적으로 술이 잘 받는 체질이기도 했지만, 운동으로 다져졌었던 근육질 몸 덕분에 술이라면 꽤 자신 있었다.
질 좋은 위스키에 푸짐한 안주, 거기다 마음 편한 동료들까지. 만찬의 흥겨운 분위기에 신이 난 오스칼이 자신의 컵을 술로 가득 채웠다. 두 번째 잔을 비우자 목구멍 너머로 알싸한 기운이 기분 좋게 감돌았다.
연거푸 두 잔을 모두 비워내는 오스칼을 보며 마티스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칼, 오늘은 술이 잘 받는 모양인데?”
“이 정도쯤은 거뜬하지.”
“아주 남자답고 좋아. 역시 우리 오스칼은 사나이야 사나이.”
마티스의 칭찬에 오스칼이 우쭐한 표정으로 가슴을 쭉 펴고, 장난스럽게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 보였다. 레오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느덧 만찬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청년들은 자리를 바꿔가며 오스칼 앞에 끝없이 술을 들이밀었다.
”형님, 형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제 잔을 받으시죠!“
“좋아! 건배!”
제라드와 신명 나게 잔을 부딪친 오스칼이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너는 술도 아주 과격하게 마시는군.”
레오가 끝도 없이 술잔을 비워내는 오스칼에게 걱정이 담긴 타박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술에 취하지 않는 체질이거든. 주사도 없어.”
오스칼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레오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역시, 형님은 뭐든 잘하시는군요. 그럼 제 잔도 받으십시오.”
기욤이 달려와 오스칼에게 술을 권했다. 기욤의 얼굴은 이미 그의 붉은 머리카락 색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빨개져 있었다.
“으하하, 기욤 넌 술이 약한 모양이구나.”
오스칼은 키득거리며 가득 따라진 술잔의 술을 홀짝 비웠다.
“아 조타!”
거대한 술통이 여섯 개째 비워질 때쯤, 술에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오스칼은 어느새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주당이었던 현생의 몸과는 달리, 빙의한 영애의 몸은 그다지 술에 강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취할 것 같으면 그만 마시지 그래.”
레오가 오스칼의 술잔을 빼앗듯 집어 들었다. 그 모습에 오스칼이 눈을 부릅뜨고 험악하게 얼굴을 구겨 보였다.
“남자는!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는 거야, 짜샤!”
오스칼 딴에는 무섭게 보이기 위함이었겠으나 레오에겐 마냥 귀여워 보였다. 레오의 잇새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꼴을 보니 이미 취한 것 같은데.”
“무슨 솨리야! 안 취했거던! 너도 한잔 받으아!”
오스칼이 해롱거리는 목소리로 레오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에도 술을 채우려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레오가 오스칼의 손에서 재빠르게 술병을 받아 들었다.
“네 잔은 내가 채워주지.”
그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술병을 물병으로 바꿔치기했다. 그리고 오스칼의 잔에 술 대신 물을 가득 따랐다.
“좋아! 건배!”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오스칼은 자신의 잔에 담긴 것이 술인지 물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자신의 술잔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오스칼이 젖은 입가를 소매로 북북 닦고는 레오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레오, 너!”
눈이 반쯤 풀린 오스칼이 레오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검지를 들이밀었다. 어느새 오스칼의 얼굴은 불타는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몇 번이나 놜 살려줘서 진짜 진짜 고마허….”
“주사가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었군.”
오스칼의 혀가 꼬인 발음에 레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오스칼이 가물거리는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근데 네가 러좔린 영애랑 잘돼야 내가 살 수 있거든. 놔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아는데….”
오스칼이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레오가 눈을 찡그렸다. 그와 로잘린이 잘 되는 게 오스칼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쿠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스칼의 머리가 테이블로 떨어졌다. 단원들과 한창 신나게 떠들고 있던 마티스가 그 소리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겁도 없이 술을 왕창 들이붓더니 꼬맹이는 결국 쓰러진 거야? 으하하. 오스칼, 일어나!”
테이블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오스칼의 작은 머리통을 보며 마티스가 킬킬거렸다. 그가 오스칼의 등을 가볍게 흔들자 오스칼이 눈을 뜨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우우웅.”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신나게 웃은 마티스가 큰 소리로 제라드를 불렀다.
“어이, 제라드! 여기 와서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오스칼 형님 좀 챙겨라.”
테이블 저쪽 끝에서 적당히 붉어진 얼굴로 시몬과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있던 제라드가 시몬을 와락 밀어냈다.
“엇, 오스칼 형님이 취하신 겁니까? 그럼 제가 방으로….”
제라드가 휘청이는 걸음으로 오스칼을 향해 다가왔다.
끼이익-
그 순간, 레오가 돌바닥에 의자를 끌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다급하게 일어났던지, 연회장 안이 찢어지는 듯한 바닥의 마찰음으로 웅웅 울렸다.
“이 녀석은 내가 방에 데려다주고 오겠다.”
“네가 직접?”
마티스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물었다.
“오늘 같은 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단원들에게 엉망으로 술에 취한 녀석의 뒤처리를 맡길 순 없지.”
레오가 관대한 기사단장의 얼굴로 말했다.
“역시, 저희를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 분은 단장님밖에 없습니다.”
제라드가 감동한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티스는 어딘가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오래전부터 알아 온 레오는 대개 솔선수범하고 단원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성품을 가졌으나, 이런 사소한 것까지 직접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세심한 성격은 못되었다.
불현듯 마티스는 도적 떼와의 전투에서 낙마한 오스칼에게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던 레오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레오는 더 험한 전장에서도 늘 냉정을 유지해왔다.
“흐음. 설마….”
마티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연애나 결혼 따위엔 관심이 없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설마 ‘여자’와의 연애에 관심이 없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순탄치 않은 가시밭길 인생을 걸어온 레오건만, 대체 왜 그는 사랑마저도 평범한 길을 걷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
어느새 레오는 술에 잔뜩 취한 오스칼을 자신의 양팔에 번쩍 안아 들고는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티스가 두툼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 이걸 응원을 해야 해, 반대를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