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침엔 로잘린 영애와 소설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렸지만, 지금부턴 제대로 해야 해.’
오스칼은 오전 내내 로맨스 폭주 기관차의 역할에 몰두했다. 로잘린과의 티타임에 레오를 데려간 뒤, 자신은 적당히 빠져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줄 계획이었다.
‘고전적인 작전이지만 고전만큼 잘 먹히는 게 없지!’
오스칼이 레오에게 다가가 슬쩍 미끼를 던졌다.
“레오, 성의 정원이 아름답다던데, 내일 오후에 우리 티타임이라도 하는 게 어때?”
“티타임?”
“응, 내일 혹시 바빠?”
레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일정을 떠올려 보았다.
내일, 시몬이 부러진 칼을 새로 사는 걸 도와달라고 했던가. 그리고 노이어 남작이 오찬을 하자고 했었지.
순식간에 그 일들을 모두 마티스에게 떠넘기기로 한 레오가 입을 열었다.
“내일은 마침 한가하다.”
“정말 잘 됐다! 그럼 내일 시간 비워둬. 그리고 명색이 티타임이니까 잘 차려입고 와야 해. 대충 나오지 말고!”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지만, 그래도 첫 데이트 자리에는 차려입는 편이 낫지.
착착 진행되는 계획이 흐뭇해, 오스칼은 레오를 향해 활짝 웃었다. 오스칼의 천진한 웃음에 레오는 자신의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아침부터 자꾸만 씰룩이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와. 레오, 너 오늘 진짜 멋있다.”
티타임 당일, 레오를 마주한 오스칼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포마드를 발라 흑단 같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겨 올리고, 윤이 나는 새 슈트를 차려입은 레오는 아찔하리만치 멋있었다.
평소 수수한 차림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던 그의 반듯한 이목구비는 오늘따라 한껏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남자다우면서도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모습에 오스칼이 넋을 잃고 입을 뻐끔거렸다. 이제 로잘린이 그에게 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네가 잘 차려입고 나오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나.”
오스칼의 칭찬에 짐짓 태연한 척 대답한 레오였지만, 평소보다 살짝 높아진 목소리는 그의 들뜬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넘겨 올린 머리 아래 드러난 그의 귀가 붉었다.
“어, 어. 그랬지. 그럼 이쪽으로….”
오스칼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남의 데이트에 내가 굳이 차려입을 필요는 없으니까.’
레오는 어쩐지 사탕 가게로 향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오스칼의 뒤를 따랐다. 어제보다 다리의 상태가 좋아졌는지, 오스칼의 걸음은 한결 빨랐다.
어느덧 오스칼의 걸음이 보송하게 다듬어진 잔디 위에서 멈추자, 오스칼의 왼쪽 다리에 시선을 두고 걷던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에 낯익은 여인이 서 있었다.
검은 눈동자와 연보랏빛 눈동자가 당황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곧이어 두 남녀의 시선이 동시에 오스칼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에 오스칼이 멋쩍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만남을 주도해보려 했는데 좀 부자연스러웠나?
오스칼이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
푸른 하늘엔 조각구름이 느리게 흐르고, 살랑거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었다. 싱그러운 계절 꽃들로 장식된 하얀 티 테이블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테이블에 놓인 앙증맞은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꿀차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토록 아름다운 노이어 성의 안뜰에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무시무시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칼 경이 여기로 오는 길에 레오폴드 경을 우연히 만나서 함께 오셨다는 말씀이군요.”
로잘린이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자신의 피부색과 퍽 잘 어울리는 푸른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곱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잔뜩 신경 쓴 차림새였다.
“하. 하. 하. 원래 사람은 많을수록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오스칼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느 때처럼 눈부신 로잘린의 미소가 어쩐지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로잘린이 다시 한번 생긋 웃으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오스칼 경은 참 사려가 깊으시군요. 제가 ‘특별히’ 오스칼 경‘만’ 초대한 티타임에 이렇게 다른 분을 모셔온 걸 보니 말이에요. 레오폴드 경이 오늘 아주 ‘한가’하셨나 봅니다. 굳이 오스칼 경의 초대에 응해 주신 걸 보니 말이에요.”
로잘린이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의 은근한 도발에 레오가 딱딱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저도 ‘로잘린 영애’께서 주최하시는 티타임인 줄 알았다면 굳이 참석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 방에서 투구나 닦는 편이 나았겠지요.”
두 사람의 은근한 기 싸움에 오스칼이 진땀을 흘렸다. 가냘파 보이는 로잘린은 레오의 기세에 전혀 밀림이 없었다.
“그, 그러지 마시고 두 분 모두 얼른 자리에 앉으시죠….”
자리를 권한 오스칼이 두 사람 몫으로 마련된 티 테이블을 과장된 몸짓으로 가리키며, 마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이런! 의자가 두 개밖에 없으니 역시 여기서 제일 말단인 제가 자리를 비켜드려야….”
“앉으시죠.”
“앉지.”
로잘린과 레오가 동시에 싸늘한 목소리로 오스칼을 붙잡았다. 멀리서 사용인이 허둥지둥 한 사람 몫의 의자와 다기를 챙겨 달려왔다.
야속하리만치 재빠른 몸짓으로 사용인은 순식간에 티테이블에 세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윽, 적당히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두 사람은 굳이 왜 날 가운데에 앉히는 거야. 눈치가 없나!’
오스칼이 예상한 그림은 두 사람이 뜻밖의 조우에 얼굴을 붉히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는 제게 고마워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오스칼이 안절부절못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자, 그럼. 이렇게 된 거 함께 차를 들까요. 아차, 그런데 오스칼 경. 전에 말씀 주신, 구원 서사 말이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옅게 눈썹을 구겼던 로잘린은 어느새 독서의 즐거움과 로맨스 소설이 가진 문학적 가치에 대해 세련된 화법으로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통에, 레오는 대화에 조금도 참여할 수 없었다. 명백히 의도적으로 그를 대화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태도였다.
레오 역시 언짢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는 딴 곳만 쳐다보며 로잘린의 말을 예의상 경청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어제 오스칼 경과 이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어찌나 대화가 잘 통하던지요. 아, 이를 어쩐다. 레오폴드 경께선 워낙 ‘남자다우셔서’ 아무래도 이런 주제엔 관심이 없으실 텐데, 제가 실례했군요.”
로잘린이 레오가 ‘남자답다’라는 말을 강조하자, 오스칼은 다시 한번 로맨스 폭주 기관차에 연료를 쏟아부었다. 오스칼은 마치 쇼호스트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역시 그렇죠? 마드모아젤도 아시겠지만 여기 레오는 남자다움을 갖춘 건 물론, 왕국 최고의 기사랍니다. 그리고 흠흠. 전부 다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지금 레오에게 작위가 없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염려하지 마세요. 분명 나중에는 달라질 겁니다.”
오스칼은 레오의 정체에 대한 은근한 스포일러도 잊지 않았다. 반역 누명을 벗기는 일만 잘 해결되면, 그는 공작가를 물려받을 호재가 기다리고 있는 저평가된 우량주니까!
오스칼의 말에 로잘린의 미간이 잠깐 좁아졌다 풀어졌다. 이 깜찍한 기사님은 다 좋은데 눈치가 없는 게 문제인 것 같았다.
작전을 바꾸기로 한 로잘린이 말린 꽃을 띄운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예쁘게 웃었다.
“오스칼 경께서는 레오폴드 경과 꽤 친하신 것 같군요. ‘레오’라고 애칭으로 다정하게 부르시네요.”
“하하하! 단장님이 워낙 포용력이 넓으셔서 그런지 저 같은 새내기 기사에게도 이렇게 허물없이 대하도록 허락해 주신답니다.”
한 번도 이름을 부르는 것에 레오의 허락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오스칼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기분으로 급하게 레오의 미담을 지어냈다.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오스칼에게 칭찬을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묘하게 불쾌했다.
“제 이름도 그럼 그렇게 불러주세요, 로즈라고 부르시면 된답니다. 그리고 저도 경을 오스칼이라고 부르는 걸 허락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한 로잘린이 코를 찡긋해 보이며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애교에 오스칼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미인계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 모양이었다.
“저, 저야 영광이지요. 로, 로즈.”
“고마워요, 오스칼.”
로잘린이 오스칼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자 레오의 이맛살이 한층 구겨졌다. 그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는 꽤 사교적이신 모양입니다. 만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은 ‘남자기사’를 이토록 격의 없이 대하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어머, 그럴 리가요. 당연히 ‘깊은 정서적 교감’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거지요. 아무래도 투구를 닦는 것을 취미로 가진 남자와는 나눌 수 없는 교감이랄까요.”
이제 로잘린은 대놓고 그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내가 오스칼에게 관심 있는 걸 눈치챘으면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고 당장 꺼져’라고 말하고 있었다.
레오가 콧방귀를 꼈다. 그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정서적 교감이란, 모름지기 같은 기사 간에 더 돈독한 법이지요. 함께 모험을 떠나 서로의 살을 맞대어 자면서 생기는 교감이야말로 진정한 교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스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에 황급히 끼어들었다.
“하하하, 로즈. 기사들끼리 꼭 살을 맞대고 자는 건 아니에요.”
“오스칼, 샤르트르에서 나와 함께 끌어안고 한밤의 추위를 견뎌냈던 추억을 잊은 건가?”
오스칼과의 친밀함을 잔뜩 과시하는 듯한 레오의 다정한 목소리에 로잘린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로즈,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 레오는 생존! 야영 시 생존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스칼이 황급히 로잘린을 향해 해명하고는 눈을 부라려 레오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미쳤나. 왜 로잘린에게 자기 매력이 아닌 나와의 추억을 어필하고 있어?
레오는 홱 고개를 돌려 오스칼의 시선을 모른 체했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은 로잘린이 입을 열었다.
“레오폴드 경 말씀대로 역시 기사단 생활은 고되군요. 하지만 그렇게 추위와 싸우며 거친 사내들 틈에서 지내시는 것보다는, 아담한 영지에서 대화가 통하는 여인과 살을 맞대며 지내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오스칼?”
“그, 그런가요?”
분명 사랑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두 사람 사이에, 어쩐지 다른 종류의 불꽃이 튀는 기분이었다.
환영 연회에서부터 오스칼을 지켜보았던 로잘린은, 레오의 눈길이 자신과 같은 곳을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로잘린은 레오가 남색가인 것이 틀림없으며, 그가 자신을 오스칼로부터 떼어놓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로잘린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남자를 만났는데, 이런 목석같은 자에게 빼앗길 줄 알고?
로잘린이 생긋 웃었다.
“내일 있을 기사단의 환송 연회에는 무도회가 있을 예정이에요. 오스칼, 오스칼이 제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제, 제가 무도회에서 로즈의 파트너를요?”
“물론이죠, 기사는 마드모아젤을 에스코트해야 하는 법이죠. 무도회에서 기사와 기사가 파트너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로잘린의 제안에 레오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본 로잘린이 비로소 승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오스칼이 잔뜩 울상을 지었다. 오스칼이 운행하는 로맨스 폭주 기관차는 브레이크를 모르고 달리다 결국,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