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37)화 (37/138)

37화



 

노이어 성에서는 이른 저녁부터 기사단을 위한 성대한 환영 연회가 열렸다.

널찍한 연회장에는 여러 개의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이 놓였다. 영주인 노이어 남작은 가운데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그의 딸을 기사단에게 소개했다.

“아내를 병으로 일찍 떠나보냈던 탓에, 내 하나뿐인 여식이 영지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네.”

“로잘린 노이어라고 합니다.”

남작의 딸, 로잘린이 생긋 웃었다. 장미 향이 쏟아지는 것 같은 미소에 청년들이 넋을 잃었다.

찰랑대는 백금발, 맑고 투명한 연보라색 눈동자, 복숭앗빛의 두 뺨, 붉은 입술.

이름처럼 한 떨기 싱그러운 장미 같은 그녀의 미모는 과연 소문대로였다.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여인인 오스칼조차도 그녀에게 반할 지경이었다.

“융숭한 환대에 기사단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레오를 필두로, 기사단원들이 한 사람씩 로잘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예를 갖추었다.

“마티스입니다. 마드모아젤,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시몬입니다. 마드모아젤은 마치 여신 같으시군요.”

“드미트리입니다. 초면이지만 사, 사랑합니다.”

청년들은 로잘린의 미모에 이성을 잃은 듯,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뱉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뒤이어 오스칼의 차례가 되었다.

오스칼은 로잘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오스칼이라고 합니다. 이 성과 영지를 관리하시는 분이 마드모아젤이시군요. 아름다움 뒤에 더욱 빛나는 재능을 갖고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오스칼은 존경 어린 눈으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영애가 이 정도 규모의 성을 완벽한 수준으로 관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쭉 미소를 짓고 있던 로잘린이 오스칼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오스칼이 살짝 움찔거리자, 그녀는 이내 살피는 듯한 눈빛을 거두고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오스칼 경.”

목소리마저 꾀꼬리 같았다. 오스칼이 선망의 눈으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원작의 주인공에 비견할 만한 미모와 능력을 갖춘 등장인물이었다.

‘으응? 뭐지…?’

그때, 불현듯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로잘린을 마주하자 어쩐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스칼은 목덜미를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기사단의 인사가 끝나고 노이어 성의 가신들은 오른쪽 테이블, 기사단은 왼쪽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예외적으로 기사단장인 레오의 자리만 남작과 로잘린이 앉은 가운데 테이블에 마련되었다.

오스칼은 상석에서 멀찍이 떨어져 기사단 청년들 틈에 끼어 앉았다.

“으아 배고프다!”

몹시 허기진 오스칼은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노이어 남작이 얼른 연회 시작을 알려주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음식이 차려지지 않은 테이블에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제 접시와 커트러리, 그리고 술잔이 가지런히 놓였다.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연회 시작을 알리는 남작의 목소리와 함께, 멧돼지 구이, 노루 구이, 구운 감자 따위가 접시에 그득그득 차려졌다.

붉은색 과일 절임과 푸릇푸릇한 푸성귀가 요리마다 곁들여지고, 꽤 오래 숙성된 것이 틀림없는 특산품 위스키가 오크통째 테이블마다 놓였다.

“좋았어!”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고기에 신이 난 오스칼이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형님, 좋아하시는 고기 많이 드십시오.”

제라드가 오스칼에게 돼지 넓적다리를 큼지막하게 잘라주며 싱글거렸다.

“역시 고기가 최고야! 살은 역시 남의 살이 가장 맛있다고도 하잖아!”

“하하하하, 우리 형님은 유머 감각도 있으셔.”

썰렁한 오스칼의 농담에도 제라드는 큰소리로 웃어대며 오스칼의 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단원들도 낄낄거렸다.

“제라드가 형님한테 아주 푹 빠진 모양입니다.”

“어이 제라드, 줄 서. 형님이 제일 먼저 구해주신 건 나라고. 형님은 내가 더 좋아해!”

시시껄렁한 청년들의 농담에 오스칼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익. 시커먼 놈들한테 사랑받고 싶은 마음 따윈 없거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오스칼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임무 중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맛있는 것도 잔뜩 있는 오늘 밤이 꽤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와. 그런데 철통같던 단장님도 로잘린 영애 옆에선 웃으시는군요.”

시몬이 놀란 눈으로 레오가 앉은 상석을 가리켰다. 청년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오스칼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로잘린과 대화를 나누는 레오의 얼굴엔 평소에는 찾아볼 수 없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야, 정말이네요. 이렇게 보니 단장님과 로잘린 영애가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단장님은 여인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으신 것 같더니, 그게 아니라 눈이 높으셨던 거군요.”

“이러다 두 분이 결혼하시면 어쩌죠?”

청년들이 레오와 로잘린을 두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오스칼이 우적우적 씹고 있던 멧돼지 뒷다리를 손에 든 채, 멍하니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오스칼은 아까부터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빙의물의 여섯 번째 법칙,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을 엮어줘라.〉

오스칼이 탄식하듯 이마를 탁, 쳤다.〈여기사 오스칼〉이 로맨스 판타지 장르로 분류된 이상 로맨스는 필수였다. 그러니까, 드디어 이 외전에도 슬슬 여자주인공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이다.

‘로잘린이야말로 딱, 여자주인공 재질이잖아!’

얼마나 자연스러운 등장인가, 임무 중에 만난 능력 있고 아름다운 마드모아젤이라니. 원작의 여자주인공도 그랬지만, 미모+능력 캐릭터는 〈여스칼〉 작가가 환장하는 키워드였다.

로잘린을 레오를 행복하게 해줄 여자주인공으로 점찍고 나자, 왜인지 오스칼은 맥이 탁 풀렸다.

여자주인공까지 찾아내고, 오늘 밤은 정말 완벽하네.

“켁, 켁.”

자신도 모르게 입안의 멧돼지 살점을 그대로 삼켜버린 오스칼이 기침을 해댔다.

미처 씹지 못하고 목으로 넘긴 두툼한 고깃덩어리가 목구멍을 할퀴자 눈물이 찔끔 났다. 오스칼이 술잔을 집어 들어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단숨에 마셔버린 술이 썼다. 순식간에 입맛이 달아나 버린 것 같아, 오스칼은 애꿎은 멧돼지 뼈만 포크로 쿡쿡 쑤셨다.

***

연회가 시작할 무렵부터, 노이어 남작은 레오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로잘린이 혼기가 다 찼는데도 아직 마땅한 짝이 없어 고민하고 있다네. 여기저기서 구혼자들은 많지만, 로잘린이 싫다고만 하니 걱정이오. 내 딸이지만 수도 사교계에 데뷔해도 모자람이 없는 아가씨인데 말이야,”

“아버지, 전 사교계에는 관심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전 영지에서 제 일을 하는 게 좋아요.”

“작위와 영지도 물려받지 못하는 네가 노이어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네가 우리 영지를 지킬 만한 강한 기사와 결혼해 아들을 낳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노이어 남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인하트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딸만 있는 귀족은 양자를 들이거나 외손자에게 작위를 물려주곤 했다. 이를 상기시키는 남작의 말에 로잘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노이어 남작이 로잘린의 표정을 외면하고는 레오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네도 아직 짝이 없다고 들었네만.”

“아직 짝을 찾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노이어 남작이 레오의 늠름한 모습에 입맛을 다셨다.

그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앞에 있는 사내는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탐이 나는 사윗감이었다. 그러나 ‘칼릭스’라는 그의 성이 마음에 걸렸다. 반역으로 몰락한 가문의 자손. 정치적으로 괜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작은 자신의 콧수염을 한번 쓸었다. 어차피 국왕의 관심이 닿지도 않는 북부 변방의 영지, 실리를 챙기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위도, 가문도 없는 자이니 그를 데릴사위로 들이면 그의 기사단을 이용해 노이어의 세력을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작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네가 로잘린과 말 상대를 좀 해주게. 우리 영지엔 젊은이들이 많지 않으니까 자네와 시간을 보낸다면 로잘린도 기뻐할걸세.”

“제가 말주변이 없어 대화엔 능숙하질 못합니다.”

레오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거… 대화란 게 어려울 것 없지 않나. 가만히 눈만 맞아도 그게 대화지…. 아닌가?”

남작은 은근한 표정으로 레오의 옆구리를 찌르며 낮게 속삭였다. 레오가 남작의 태도에 표정을 굳히자 남작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괜히 시선을 돌렸다.

“흠흠. 그나저나 기사단의 청년들이 연회 음식에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일세.”

다른 남자들이라면 왕국 제일의 미녀 로잘린의 남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일 텐데. 싸늘해진 레오의 반응이 민망한지 남작은 부러 기사단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남작의 시선을 따라 기사단 테이블로 고개를 옮긴 레오는 입가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테이블에서는 오스칼이 본인 머리통보다 커다란 돼지 뼈를 양손으로 잡고 열정적으로 살점을 뜯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차갑게 굳었던 레오의 입가에 결국 스르르 웃음이 번졌다.

레오의 곁에서 로잘린이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어느덧 연회의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살짝 취기가 오른 드미트리가 용감하게 로잘린에게 다가갔다.

“마드모아젤, 제가 술을 한잔 따라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로잘린이 우아한 태도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청년들이 너도나도 우르르 로잘린이 있는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모두 로잘린에게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마드모아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습니까?”

“뭐 타는 냄새 안 납니까? 제 마음이 불타고 있습니다.”

몰려든 청년들로 테이블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레오가 오스칼을 흘긋 바라보았다.

로잘린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오스칼의 관심은 오직 고기에만 있는 모양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돼지 뼈를 포크로 쿡쿡 쑤시고 있는 모습을 보니 또 슬며시 웃음이 났다.

격렬하게 포크질을 하던 오스칼이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오스칼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자신에게서 달아난 오스칼의 눈동자에 레오의 눈썹이 얕게 꿈틀거렸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조바심에 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레오폴드 경께선 쉬는 날 특별히 즐기시는 취미가 있으실까요.”

그때, 로잘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스칼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레오를 불렀다. 오스칼의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던 레오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흠칫 고개를 돌렸다.

“저는 쉬는 날 투구를 닦습니다.”

레오가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투구 닦기라…. 아주 건설적인 여가를 보내시는군요. 아, 이런.”

황당할 정도로 지루한 대답에도, 로잘린은 연습한 것처럼 한결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녀가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레오의 머리카락에 붙은 냅킨 조각을 떼어내 주었다.

조금 전, 레오가 머리를 쓸어올렸을 때 식탁에서 딸려 온 휴짓조각이었다.

“히야-”

레오의 머리칼을 매만지는 로잘린의 손길에 단원들이 얕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마치 레오가 여신의 축복이라도 받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레오는 그 손길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가 초조하게 오스칼의 테이블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오스칼이 머무르고 있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다리도 성치 않은 녀석이, 혼자 방에 돌아간 건가.’

순식간에 묘한 갈증이 덮쳐왔다. 레오가 자신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