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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36)화 (36/138)

36화



 

바예른의 도적은 완력 순으로 뽑는 게 분명했다. 제라드가 이를 갈며 제 손을 떠난 무기를 노려보았지만, 대검을 들어 올린 램퍼드가 그에게 검을 되찾을 여유 따위 줄 리가 없었다.

‘젠장, 이렇게 비명횡사할 줄 알았으면 가족들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올걸!’

제라드는 머리 위로 날아오는 거대한 칼날을 차마 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첫 여자친구를 사귄 일, 기사단에 입단하고 기뻐했던 일, 밤새 연무장을 돌던 일…. 마지막으로 제라드는 오스칼과 소설 이야기로 꽃피우던 순간을 떠올렸다.

‘〈공작 아내의 유혹〉에서 여자주인공의 정체가 밝혀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오스칼 형님이 실망하시겠지.’

“제라드! 안돼!”

오스칼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바로 눈앞에서 제라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분명 레오가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했어! 내가 지킬거야.’

말의 속도를 올린 오스칼이 검을 휘둘렀다. 절박한 오스칼의 검이 램퍼드의 등에 박혔다.

“꾸엑!”

단말마의 비명에 제라드가 눈을 번쩍 떴다. 제라드의 눈앞에서 램퍼드의 몸을 관통한 칼날 끝이 반짝였다.

후둑- 붉은 피가 바닥에 흩뿌려지고, 순식간에 램퍼드의 몸이 허물어졌다. 고꾸라지는 램퍼드의 등 뒤로 램퍼드의 피를 뒤집어쓴 오스칼의 얼굴이 나타났다.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제라드가 비로소 안도감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혀, 형님!”

“제라드 괜찮… 악!”

살았다는 기쁨도 잠시, 제라드가 오스칼의 입에서 나온 비명에 눈을 크게 떴다.

빠른 속도의 말 위에서 급하게 내리꽂은 검 때문에 승마에 익숙지 않은 오스칼의 몸이 휘청였다. 당황한 오스칼이 소리를 지르며 고삐를 놓치자, 기수의 통제를 벗어난 말이 날뛰었다.

오스칼이 말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불행히도 오스칼의 승마 실력은 그다지 출중하지 못했다.

우당탕-

오스칼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윽.”

땅에 몸을 처박은 오스칼이 괴로운 신음을 냈다.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다행히 바닥에 구르는 램퍼드의 두툼한 몸 위로 떨어진 덕에 어디 크게 부러진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젠장! 그래, 〈여스칼〉에선 굴러야 정상이지.”

오스칼이 자조 섞인 욕을 내뱉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낙마하면서 다리가 접질렸는지 땅에 바닥을 내딛자마자 찌릿한 통증이 왼 다리에 느껴졌다. 이 상태로는 다시 말 위에 뛰어오를 수도 없었다.

그런 오스칼의 상황을 눈치챈 도적 떼들이 피라냐처럼 몰려들었다.

“말에서 떨어진 놈을 먼저 죽여!”

“약해 보이는 놈이다!”

등골이 서늘한 목소리에, 오스칼은 램퍼드의 등에 꽂혀있던 검을 얼른 힘주어 뽑아냈다.

“형님!”

제라드가 낙마한 오스칼을 쫓아 말에서 뛰어내리려 하자 오스칼이 소리를 질렀다.

“야! 너까지 말에서 내리면 어떡해? 위험하니까 말 위에 있어!”

오스칼은 비교적 멀쩡한 오른 다리로 힘겹게 몸을 지탱한 채 검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 오스칼이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조건 살아남을 거야. 여기서 끝날 줄 알고?”

휙-

가까이 다가온 도적 하나가 철퇴를 휘둘렀다. 서둘러 뒤로 물러서자 철추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두려움에 망설일 틈 따윈 없었다.

오스칼은 재빨리 몸을 비켜서며 철퇴를 휘두른 도적의 팔을 베었다. 그러자 도적이 꽥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챙-

이번엔 옆구리 쪽으로 칼이 날아왔다. 오스칼이 재빨리 검날을 쳐냈다. 욱신거리는 다리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순식간에 무장 해제된 도적이 뒤이은 오스칼의 일격에 쓰러졌다.

오스칼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저항에 도적들이 당황해 주춤거렸다. 낙마로 성치 않을 것이 분명한 자그마한 몸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급소만을 노려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멍청한 자식들아! 비루먹은 놈 하나를 처리 못 하고 쩔쩔매고 있는 거냐!”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덩치 큰 남자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동료들을 향해 답답한 듯 욕을 해댔다.

“이 변변치 못한 놈들 같으니! 내가 가서 해치워 주…크윽!”

조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던 도적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하얀 말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쓰러진 도적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흰 말에 올라탄 레오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 도적들을 단칼에 베어냈다. 눈앞의 적을 그대로 쓸어내는 그 무자비한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한 마리의 마수 같았다.

“으어어 저게 뭐야? 인간이야?”

“도, 도망쳐!”

백마가 지나간 자리마다 도적의 시체들이 즐비하게 쌓였다. 오스칼을 공격하던 도적들이 공포에 찬 얼굴을 했다.

“실전에서 한눈을 팔면 안 되지!”

“으억!”

오스칼 역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레오의 기세에 눌려 우물거리는 도적 몇을 찌르고, 긋고, 또 베어냈다.

도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쓰러졌다. 어느덧 오스칼에게 덤벼들던 도적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쯤, 레오가 달리는 말에서 거칠게 뛰어내렸다.

오스칼이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제게 달려오는 레오를 향해 씩 웃었다.

“늦었어. 이미 내가 다 해치웠다고! 역시 새로 산 검이 아주 좋은….”

오스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오가 양손으로 오스칼의 어깨를 와락 붙들었다. 그는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스칼은 그의 검은 눈동자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살기와 섬뜩하리만치 굳은 표정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헉, 헉. 다친 덴 없나!”

이렇게까지 여유 없는 표정의 레오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느다란 오스칼의 어깨를 움켜쥔 그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젖은 그의 머리카락 아래에서 검은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그의 뺨 위에는 도적들이 뿜어낸 붉은 핏방울들이 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오가 램퍼드의 피를 뒤집어쓴 오스칼의 얼굴과 목덜미를 정신없이 문질렀다. 그의 손이 닿은 곳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땀이 섞인 레오의 체향이 코끝에 훅 끼쳐오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오스칼의 심장이 쿵-내려앉았다.

“나, 난 괜찮아.”

늘 보던 레오의 얼굴이 새삼 낯설게 느껴져 오스칼이 말을 더듬었다.

“다행이야…. 난 네가 이대로….”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어졌다. 낮게 한숨을 쉬며 레오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오스칼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멀리서 마티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부상자는 없는 건가! 다들 확인해!”

“부단장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크게 다친 이가 없다는 이야기에 오스칼은 긴장으로 굳은 어깨에 힘을 뺐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느새 칼 소리와 함성으로 시끄럽던 들판이 고요해졌다. 기사단이 전장을 정리하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려왔다.

“으흐흑, 형님! 괜찮으십니까.”

제라드가 말에서 내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오스칼에게 달려왔다. 램퍼드의 거친 검을 맞받아내느라 찢어진 제라드의 손은 피투성이로 엉망이었다.

“제라드!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윽.”

달려오는 제라드를 향해 몸을 움직이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접질린 왼쪽 다리에서 다시 고통이 느껴졌다. 오스칼이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섰다. 레오의 눈썹이 구겨졌다.

“제라드, 잠깐 물러나라.”

다가오는 제라드를 한 손으로 막아선 레오가 오스칼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 이게 무슨…? 레오!”

갑자기 허공에 떠오른 몸에, 오스칼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레오는 미약한 저항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스칼을 자신의 말 안장 위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한창 전장을 정리 중인 드미트리에게 외쳤다.

“어이, 드미트리. 오스칼은 다리 부상 때문에 나와 함께 간다. 오스칼의 말은 네가 챙겨오도록.”

“예, 단장님!”

드미트리의 우렁찬 대답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레오는 훌쩍 뛰어올라 오스칼의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쿵쿵쿵쿵-

등 뒤에서 느껴지는 레오의 존재감에 오스칼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흉기를 든 수십 명의 도적 떼를 상대해서 그래. 그럼, 그렇고말고. 레오와 몸이 가까워져서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게 아니라고.’

오스칼이 애써 변명하듯 되뇌었다. 그럴 이유도 없건만, 꼭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스칼은 뒷자리에 앉은 레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또렷한 눈매와 매끄러운 콧날은 오늘따라 더 도드라져 사람을 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오스칼과 눈이 마주친 레오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제야 자기도 모르게 레오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오스칼이 레오로부터 고개를 휙 돌렸다. 귓바퀴로 열이 오르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레오가 오스칼에게 속삭였다.

“내가 어제 말했었지. 네 실력이면 충분할 거라고. 오늘 넌 잘했어. 그리고… 무사해서 다행이다.”

레오가 제 가슴팍에 폭 안긴 모양새가 된 오스칼의 정수리를 칭찬하듯 가볍게 쓰다듬었다.

“으응.”

오스칼이 겨우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오스칼의 심장은 노이어 성으로 향하는 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어찌나 팔딱거리는지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오스칼은 제 앞에 있는 말의 갈기를 꼭 붙잡았다.

부디 제 등 뒤에 바짝 붙어 앉은 레오가 그 떨림을 눈치채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몇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그들을 괴롭혀 온 바예른의 도적 떼가 소탕되었다는 소식에, 노이어 영지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노이어 성의 모든 사람이 밖으로 달려 나와 자신들을 외면한 왕국군 대신, 한달음에 달려와 준 뤼미에르 기사단을 환대로 맞이했다.

노이어 성은 작은 영지의 성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멋졌다.

돌로 된 바닥은 반들반들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고, 어두운색의 벽돌을 켜켜이 쌓아 올려 만든 성벽은 수리할 곳 하나 없이 견고해 보였다.

화려한 장식 대신 추운 북부의 날씨를 막아 주기에 알맞은 방한용 태피스트리가 문과 벽을 둘렀다. 적은 수의 사용인들조차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성내 업무에 공백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성 진짜 좋다! 관리자가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걸.”

깨끗하게 손질된 침대 위에 걸터앉아 기욤에게 다친 다리를 치료받던 오스칼이 소담하게 잘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성의 관리인은 전투로 지쳤을 기사들을 위해 모두에게 방을 하나씩 내어주었다. 세심한 배려였다.

“형님 못 들으셨습니까? 성과 영지를 관리하는 이가 바로 영주인 노이어 남작의 딸인데, 그 영애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미녀라고 합니다!”

“우와. 정말? 난 몰랐어!”

기욤의 대답에 오스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녀라니!

지금껏 미남들은 의도치 않게 많이 구경할 수 있었지만, 미인만은 마주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평민 기사단과 어울려 다니는 탓에 귀족 영애와의 만남은 꿈도 못 꿨다.

로판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인데!

오스칼이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기욤이 말을 덧붙였다.

“남작 영애를 볼 생각에 다들 들떠서 오늘 저녁 연회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모와 실력을 갖춘 영애라니! 가슴이 웅장해지는데?”

제 취향을 저격하는 설정에 오스칼이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도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기사라면 그런 마드모아젤을 모시는 게 평생의 꿈이죠. 자, 이제 치료는 다 끝났습니다.”

치료를 마무리한 기욤이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오스칼이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넘겼다.

“그런 마드모아젤이라면…. 레오도 좀 다르려나.”

오스칼은 사랑 따윈 사치라고 말하던 레오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오스칼은 턱을 매만지며 여인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레오를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영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남자주인공인데….”

오스칼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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