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드디어 북부 노이어로 향하는 기사단의 출정일이 밝았다. 마티스는 장비를 살피느라 오전부터 분주했다. 레오 역시 전열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스칼은 입단한 후 처음 있는 공식 출정에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노이어가 북부에 있는 영지라고 했지?”
“맞습니다. 야만족 국가인 ‘바예른’과 인접한 지역이라 예전부터 바예른의 도적 떼에 의한 피해가 심각했다고 하더군요.”
“시몬, 너는 노이어에 가 본 적 있어?”
“왕국 기사단 소속일 때 파견 나간 적이 있습니다. 북부는 워낙 험지라 왕국 기사단 중 평민 기사단이 출정을 도맡았었거든요. 평민 기사단의 마지막 전투도 북부였지요.”
그렇게 말하는 시몬의 표정이 음울하게 변했다.
“마지막 전투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혹독한 겨울에 북부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임무였습니다. 그때…. 목숨을 잃은 동료들이 많았지요. 단장님이 아니었다면 사실 전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몬 말이 맞습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돌아왔을 때, 저희를 반기는 건 평민 기사단의 해산 소식이었지요.”
말을 마친 드미트리가 힘을 주어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오스칼은 말을 잃었다.
마티스가 평민 기사단의 해산으로 국왕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세세한 사정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많은 동료를 잃었다는 이야기에 오스칼은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형님께서 그런 표정을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맞아요. 노이어의 특산품이 위스키거든요.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면 끝내주는 술맛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드미트리와 시몬이 표정을 풀고서 오스칼을 향해 웃어 보였다. 오스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출정에는 오스칼을 포함해 모두 열두 명의 인원이 꾸려졌다.
노이어는 특산품인 위스키의 수익으로 먹고살기엔 충분한 영지였으나, 이렇다 할 병력은 없는 자그마한 땅이었다.
도적떼가 들이닥치자 다급히 왕국군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노이어 영주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근 인신매매단 소탕으로 명성을 높인 뤼미에르 기사단에 도움을 구한 것이었다.
“자, 그럼 다들 출발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마티스의 신호에 따라 무장한 기사단이 일제히 움직였다.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말 위에 올라탄 기사단 청년들의 모습이 늠름했다.
그중 단연 빛나는 것은 기사단의 선봉에 선 기사단장, 레오였다. 기사 정복을 갖춰 입자 그의 다부진 어깨와 남자다운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오스칼 역시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사는 그가 대단한 미남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히힝-!
멍하게 레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스칼의 손이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말이 펄떡 뛰었다.
“으악!”
깜짝 놀란 오스칼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오스칼, 정신 빼놓지 말고 고삐를 꽉 붙들어. 그러다 다친다.”
“어, 어…. 고마워.”
곁에서 이동하던 마티스가 질책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목소리에 선두에 서 있던 레오가 고개를 돌려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머리를 긁적였다. 타고난 운동 신경으로 승마도 곧잘 배운 그녀였지만, 평생 말을 이동수단으로 삼아온 다른 단원들에 비해서는 말을 다루는 데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오스칼의 승마 실력이 검술보다 뒤처진다는 사실을 아는 레오가 연신 불안한 듯 오스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오스칼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온 제라드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형님은 처음 출정하시는 거죠?”
“응, 너는 어때?”
“전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훈련했는데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제라드였지만, 오스칼이 기사단의 훈련을 몇 번 지켜본 바, 그 역시 훌륭한 실력을 갖춘 기사였다.
평소엔 마냥 허당처럼 보이던 제라드도 무장하고 정복을 차려입으니 꽤 그럴듯해 보였다.
“훈련 때 잠깐 보니, 네 검술도 꽤 대단하던걸.”
“와. 형님께 검술 칭찬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오스칼의 칭찬에 제라드가 헤벌쭉 웃었다. 어린애같이 웃는 제라드를 보니 어쩐지 귀엽기도 해서 오스칼도 웃어버렸다.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싶었다.
“그나저나 〈공작 아내의 유혹〉말야. 그래서 여자주인공 출생의 비밀은 언제 밝혀지는 거야?”
오스칼이 제라드를 향해 넌지시 속살거렸다.
“형님이 그걸 물으시면 어쩝니까.”
“아니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니까 그렇지. 그 바람난 공작이 망하는 것도 빨리 보고 싶어 죽겠어.”
“하하하. 이번 임무가 끝나면 그 부분 마무리해서 얼른 보여드릴게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한참을 이동하다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렸다. 기사단은 노이어의 영지를 얼마 앞두지 않은 지점에 캠프를 차렸다.
“도적 떼의 숫자가 우리보다 많긴 하지만, 말을 가진 자가 한둘뿐이라고 하니 전투가 시작되면 말을 탄 우리가 우세할 거다. 하지만 그놈들의 무기는 검보다 파괴력이 강하니 직접 상대하지 말고 최대한 말 위에서 섬멸해야 해.”
마티스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레오가 단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야영한 후, 내일 날이 밝자마자 도적 떼의 본거지를 급습한다.”
레오의 지시에 따라 기사단원들이 간이 침낭을 펼쳤다. 편평한 땅을 골랐지만, 북부의 험한 지형 탓인지 야외 특별 훈련보다 훨씬 조악한 형편이었다.
불침번을 서는 보초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긴 여정에 지친 듯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오스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칼도 모자라서 도끼와 철퇴라니, ‘검투마니아’였던 작가의 세계관은 그새 ‘흉기마니아’ 로 진화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주 종목 ‘사브르’는 기마병이 구사하는 전투형 검술에서 유래된 것이라,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에 금방 익숙해지긴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본편보다 한층 가혹해진 외전의 설정에 오스칼이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다. 잠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훈련이라도 하는 것이 나았다.
휙-휙-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스칼이 검을 휘둘렀다. 새로 장만한 검이 손에 착 붙는 듯 마음에 들었다.
“괜찮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레오였다. 검을 거둔 오스칼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 잤어? 그냥 좀 긴장해서 그래. 난 출정이 처음이잖아.”
“네 실력 정도면, 걱정할 것 없이 충분할 거다.”
“사실... 내가 걱정이라기보다. 혹시 다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싶어.”
제가 다치는 것도 무섭지만, 전투 중에 다른 단원들이 다친다는 것도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오스칼의 걱정에 레오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의 오지랖이란.
“넌 또 네가 아니라 다른 녀석들을 걱정하는 건가.”
“무서워. 전장에서 동료를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오스칼이 레오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그는 북부의 전장에서 많은 동료를 잃었다고 했다.
“기사의 길을 선택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익숙해지는 일은 아니더군. 괴로운 일이지.”
그가 담담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칼이 눈을 내리깔았다.
“앞으로 기사단의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지켜주고 싶어.”
잘게 떨리는 오스칼의 목소리에 레오가 싱긋 미소짓고는 오스칼의 정수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분명 아무도 다치지 않을거다.”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손바닥의 온기에 어쩐지 안심이 된 오스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에 미소짓는 오스칼을 위해서라도 진실이 되길 바란다고, 레오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었다.
***
새벽 어스름, 열두 필의 말이 인근 숲에 있는 도적 떼의 본거지를 급습했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굵직한 비명이 뒤섞여 울렸다.
예상치 못한 급습에 잠을 자던 도적 떼들이 우왕좌왕했다. 기사단은 그들이 상황을 파악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세차게 몰아붙였다.
도적 떼가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무기들은 기사들이 탄 말의 앞발에 튕겨 나갔다.
말 위에 올라타 머리 위에서부터 공격하는 기사들의 칼날에, 무기도 없이 맨몸인 도적들이 가차 없이 썰려 나갔다.
첫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오스칼의 활약은 대단했다. 말 위에서 힘껏 팔을 뻗어 칼을 내지를 때마다 도적들이 종잇장처럼 쓰러져 나갔다.
“오스칼, 기마 전투는 처음인데 제법 하잖아?!”
방금 막, 한 사람의 도적을 베어버린 마티스가 큰 소리로 오스칼을 불렀다.
“마티스. 딴짓하지 말고 전투에 집중해!”
마티스가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도끼로 내리치려던 도적을 베어내며 오스칼이 소리를 질렀다.
“하하, 엄호 고맙다!”
오스칼의 도움에 호쾌한 웃음을 지은 마티스는 드미트리의 말에 달라붙은 도적을 처리하기 위해 달려가 버렸다.
채앵-
이히힝-
금속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말의 울음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그때, 세 남자가 말을 타고 숲으로 달려 들어왔다. 바예른에 조달을 위해 자리를 비웠던 도적 떼의 우두머리 바론과 그의 심복 아만, 램퍼드였다.
바론은 레오보다도 한 뼘은 커 보이는 압도적인 체격의 소유자였다.
초토화된 진지를 본 바론의 눈이 살기로 빛났다.
“이 개자식들이!”
바론이 욕지거리를 하며 기사단에게 달려들었다. 거칠게 휘두르는 그의 대검을 레오가 막아냈다. 두 사람은 흉흉한 기세로 맞붙었다.
말을 탄 도적의 등장에 전세가 조금씩 달라졌다.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던 도적들이 반격하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서른 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 도적들과 치열하게 맞섰다. 오스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잔뜩 기합을 넣어 검을 휘둘렀다.
그때, 램퍼드를 상대하고 있는 제라드가 보였다.
램퍼드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거대한 신체에서 나오는 파괴력으로 제라드를 무섭게 공격하고 있었다.
그의 어마어마한 완력에 그의 검을 맞받아친 제라드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오스칼이 다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오는 바론을 상대하고 있었고, 다른 기사단원들 역시 합세해 아만을 공격하고 있거나 다른 도적 떼들과 난투 중이었다.
오스칼이 자신의 말에 달려드는 도적을 단칼에 베고는 급히 말머리를 제라드 쪽으로 돌렸다.
램퍼드의 손에 힘줄이 서기 무섭게 섬뜩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큭!”
묵직한 타격감에 속절없이 제라드의 손에서 무기가 빠져나갔다. 무기를 놓친 제라드를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낸 램퍼드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제라드의 눈에 램퍼드의 등 뒤로 속도를 내어 달려오는 오스칼의 모습이 보였다.
“이걸로 끝이다!”
램퍼드의 끔찍한 목소리를 들으며 제라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라드! 안돼!”
오스칼의 비명과 함께, 끝이 노랗게 변해가고 있는 초가을의 풀밭 위에 붉은 핏방울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