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험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와 오스칼을 향해 마티스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자가 오스칼에게 슈트를 보냈던 사람이지? 제라드가 인쇄소 주인인 에렌 경이 오스칼을 좋아한 덕분에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고 떠들던데.”
제가 잘못 안 것이냐는 듯 마티스가 뒤통수를 한번 긁었다.
“그 사람이 날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소설이 괜찮아서야!”
오스칼이 씩씩거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제라드 이놈은 대체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야?
“마티스 빅토르. ‘좋아한다’는 단어가 그렇게 가벼운 말인 건가.”
마티스의 부적절한 단어 선택에 레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하하. 뭐…. 그 사람이 오스칼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런 뜻이었지.”
마티스가 두 사람의 날카로운 태도에 어색하게 웃으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스칼이 받은 고급 슈트는 한동안 기사단에서 화제였다.
제라드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한 기사단원들에게 에렌과 오스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서 ‘마음에 들어했다.’ 따위의 점잖은 표현을 사용했을 리 없었다.
마티스는 제라드가 에렌을 설명할 때 쓰던 단어를 떠올렸다.
‘끈적’이라거나 ‘야릇’이라거나, 심지어 ‘남색’까지…. 기사단원들은 역시 에렌이라는 귀족이 남색가가 틀림없으며, 그가 오스칼에게 반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오스칼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라드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면, 제라드건 자신이건 둘 중 하나는 오스칼의 칼에 무사하지 못하지 싶었다. 마티스가 오스칼 옆에 놓인 검을 한번 바라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튼, 마티스. 똑똑히 들어둬. 나랑 에렌 경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해야.”
“그래. 아무래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너도 좀 그렇지…?”
오스칼의 표정을 슬슬 살핀 마티스가 레오를 바라보았다. 레오는 심사가 뒤틀린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른 일에 정신을 집중하기로 작정한 듯, 우당탕 소리를 내며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마티스가 눈을 굴려 그 모습을 지켜보자 오스칼이 마티스를 불렀다.
“마티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다시 예산에 집중하자고. 혹시 이번에 내 검을 새로 살 수 있을까? 사실 내 검은 어디서 주워온 거라…. 마땅한 검이 없어서 지금까지 계속 쓰고 있거든.”
오스칼의 말에 마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네 검이 어디서 주운 거였다고? 그 검, 꽤 비싸 보이는 것 같은데. 물론 전투용이라기보다 장식용에 더 어울리긴 하지만. 어디서 주운 건데 그래?”
“어? 그런 거였어?”
오스칼이 당황해 눈알을 굴렸다.
줍긴 주웠지. 다이아몬드 수저가 소유한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살롱 건물에서.
“그 검도 좋긴 하지만 네 실력이라면 전투용 상급자 검을 써도 될 것 같긴 해. 조만간 네 검을 사러 시내로 나가자.”
“좋아!”
오스칼의 신난 목소리에 마티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어느새 응접실 청소를 마친 레오가 바깥에 널어놓았던 빨랫감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제 그는 응접실 한구석에서 빨래를 접어 쌓아 올리고 있었다.
싱글거리던 오스칼이 웃음을 멈추고 그가 하는 양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점점 오스칼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리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질렀다.
“레오, 내가 빨래는 이렇게 개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하는 거야!”
“어차피 펼쳐서 쓰는 건데, 어떻게 개어 놓든 대체 무슨 상관인가?”
오스칼의 잔소리를 익숙한 태도로 맞받아치는 레오의 모습에 마티스가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모든 물건을 각을 잡아 정리하는 것은 오스칼의 몸에 밴 오랜 습관이었다.
빙의 전, 어릴 때부터 선수단의 합숙 생활을 해온 오스칼은 빨래며 물건이며 각을 잡아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레오는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만 들어가 있으면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항상 마른 수건이며 옷가지를 대충 서랍에 던져 넣는 정도로 빨래를 마무리했다.
“펼쳐서 쓴다고 잘 개어 놓지 않을 거면, 곧 배고파질 건데 밥은 왜 먹느냐는 거랑 똑같은 논리지.”
“밥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잖나. 빨래를 개어 놓는 게 생존에 필수는 아닌 것 같은데.”
“깨끗하게 정돈된 서랍이 기분도 좋고 보기에도 좋다고!”
“하루 동안 서랍을 들여다볼 일이 몇 분이나 된다고 그러는 건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들이느니 훈련을 좀 더 하는 게 낫지 않은가.”
“쓸데없다니! 정리정돈이 기사의 기본 덕목 아니었어?”
“그런 덕목은 들어본 적 없다.”
마티스는 두 사람이 빨래를 정리하는 일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았다.
기사단의 누구 중에서도 레오에게 저렇게 잔소리를 할 사람이 없기도 했거니와, 레오가 누군가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듯 대꾸하는 모습도 낯설었다.
오스칼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녀석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데… 왜 대체 정리 면에서는 재능이 없을까?
그의 잘생긴 얼굴과 훌륭한 몸매는 두말하면 입이 아픈 일이었다. 매일 아침 오스칼이 마당에서 근력운동을 하고 있자면, 어느샌가 레오가 옆으로 다가와 종종 함께 운동하곤 했다.
그때마다 땀에 젖어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레오의 탄탄한 가슴 근육에 눈길이 가는 것은, 신체 건강한 여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검술 실력이야 왕국 최고라는 데 이견이 있을 리 없고, 심지어 그는 머리도 좋았다. 숫자가 가득한 기사단의 장부를 척척 읽어내며 업무를 처리하는가 하면, 전술을 짜는 데에도 탁월했다.
심지어 오랜 기간 혼자 살아온 덕에 청소나 요리 같은 집안일도 곧잘 해내는 그를 보고 있으면, 오스칼은 작가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저렇게 한 사람에게 능력치를 몰빵 해도 되는 건지.
“작가가 널 만들 때 좋은 건 다 때려 넣으면서, 정리정돈 의지만 조금 덜 넣었나 보다.”
“무슨 괴상한 소리야.”
“에잇. 아쉬운 사람이 해야지 어쩌겠어!”
포기했다는 듯 툴툴거린 오스칼은 성큼성큼 레오의 곁에 다가가 빨래 더미를 빼앗아 들고는 그와 마주 앉아 마른빨래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둘이 같이 사는 게 영 안 맞나…?’
마티스가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레오 녀석은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으니,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할 법도 했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오스칼이 살 곳을 따로 마련해 줘야 하나.’
마티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흘끔 레오를 바라보았다.
‘으잉?’
마티스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레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분명 오스칼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레오는 자기도 모르게 슬쩍 웃음이 새어 나와 얼굴이 풀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도무지 대충 갠 빨래를 용납할 수 없었던지 빨래를 다 챙겨가 정성스럽게 각을 잡아가며 수건을 접는 오스칼의 고집스러운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의 눈이 다정하게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대체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마티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마티스의 등 뒤로 드미트리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장님! 전보가 왔습니다.”
레오는 오스칼을 보며 잔뜩 풀어져 있던 자신의 얼굴 근육을 황급히 추스르고는, 드미트리가 건네는 전보를 받아들었다.
“전보라니? 뭔데?”
오스칼이 빨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전보의 내용이 궁금한 듯 귀를 쫑긋 세웠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전보의 내용을 읽던 레오가 전보를 마티스에게 건넸다.
전보의 내용을 확인한 마티스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한 오스칼에게 답을 해주었다.
“북부 국경지대의 땅 노이어 영주가 우리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했어. 최근 도적 떼가 들끓나 봐.”
“오! 전에 네가 말했던 용병일 의뢰 같은 거야?”
오스칼이 흥미롭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마티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멋진 일은 아냐. 도적 떼 소탕 임무는 꽤 위험한 편이거든.”
“맞습니다, 형님. 특히 북부 야만족 도적 떼는 거칠기로 유명해요. 이교도들처럼 얄팍한 검을 쓰지 않거든요. 도끼나 철퇴를 주로 사용하니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라고요.”
“헉.”
드미트리의 무시무시한 말에 오스칼이 숨을 들이켰다.
“피해가 꽤 심각한 것 같은데. 국왕은 왕국군 파견을 거절했나 보군.”
레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티스 역시 분한 듯 화난 목소리를 냈다.
“북부는 험지니까. 왕국 평민 기사단을 해산시켰으니 이제 북부로 파견 보낼 인력이 마땅찮겠지. 이 괘씸한 놈들!”
“드미트리. 뤼미에르 기사단이 노이어로 가겠다는 답신을 보내. 며칠 내로 출정을 하도록 한다. 모두 준비해 둬.”
“예, 알겠습니다. 단장님.”
드미트리가 전보를 부치기 위해 서둘러 기사단을 떠나고, 마티스 역시 출정 준비를 위해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건네고는 바삐 나가버렸다.
어느새 두 사람만 남은 본부에서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오를 바라보았다.
“출정이란 건 오래 걸리는 일이야?”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곳에서 연회를 하는 일도 있으니, 일주일 이상 머무르게 되는 때도 있다.”
“와아! 연회라니. 북부의 음식은 맛있어?”
“넌 출정 임무보다 연회 음식에 더 관심이 많은 건가.”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오스칼이 헤헤 웃으며 뺨을 긁었다.
“아까 마티스 말대로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다. 상대는 규율도 법도도 없는 자들이지. 무자비하게 덤벼올 거다.”
“역시 용병 일이란 건 쉬운 게 아니구나….”
오스칼이 긴장된 얼굴로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모습에 레오가 설핏 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오스칼도 흉포한 도적 떼에는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가 오스칼을 향해 믿음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넌 실전 경험도 많지 않으니까, 가서 혼자 있지 말고 꼭 내 옆에….”
“역시 그렇다면 마티스에게 당장 내 검을 더 좋은 거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 도끼와 철퇴를 상대하려면 이런 예쁘장한 검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스칼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는 마티스를 쫓아 달려나가 버렸다.
“내 옆에 있는 게 좋겠….”
레오가 뒷말을 삼키고는, 오스칼이 박차고 나간 문을 허탈하게 응시했다. 오늘도 그는 응접실에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