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졸지에 에렌의 옷을 잡아 뜯어 벗긴 후, 그의 가슴에 코를 박은 모양새가 된 오스칼이 바짝 얼어붙었다.
“으악! 감사…. 아니 죄, 죄송해요!”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속살에 오스칼이 허둥거렸다. 허겁지겁 그의 셔츠 자락을 여며 보았지만, 제 손이 그의 가슴을 주무르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에렌이 얼뜬 표정으로 오스칼을 내려다보았다.
“아, 아니! 전 그저 경이 마차에 부딪힐까 봐! 으억! 우왁!”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른 오스칼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렌이 얼빠진 얼굴을 거두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드모아젤…. 과감한 건 여전한데? 혹시 취향이 찢고, 벗기는 뭐 그런 거친 쪽인가?”
그가 뜯어진 셔츠 자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가 장난스럽게 셔츠 깃을 양손으로 펄럭이자 그의 조각 같은 가슴 근육이 달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악! 그러지 좀 말아요. 잠깐, 잠깐. 으헉!”
“그대는 내 앞에서 드레스 자락을 찢기도 했잖아. 아무래도 그대가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건수라도 잡은 듯 저를 놀려 대는 에렌에 오스칼은 수치심으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애써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꾸 그의 가슴으로 향하는 시선을 제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 얼른 가슴 좀 여며요!”
오스칼이 두 눈을 가린 채 소리를 질러댔다.
“이렇게?”
에렌의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뜬 오스칼이 다시 한번 울상을 지었다. 그의 슈트 재킷은 가슴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며진 재킷 단추 너머로 그의 가슴골이 열렬하게 자기주장을 해댔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저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도무지 가슴을 가릴 의지가 없어 보이는 에렌을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결국, 오스칼은 입고 있던 자신의 재킷을 벗었다.
“남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가슴을 훤히 내밀고 뭐 하는 거예요! 얼른 그거라도 걸쳐요.”
오스칼이 구시렁거리며 에렌의 맨가슴 앞에 자신의 재킷을 대고는 그대로 칭칭 동여매었다. 덕분에 오스칼의 재킷을 앞치마처럼 목에 걸치게 된 에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태어나서 마드모아젤한테 겉옷을 받아보긴 처음이야. 큭큭큭.”
그는 눈물까지 보이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겨우 제 눈앞의 맨가슴을 치워버린 후 마음의 안정을 찾은 오스칼이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화끈해진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재킷을 벗었는데도 더운 기분이었다.
“전부 다.”
그가 웃음을 멈추고 오스칼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더니, 뭔가를 발견한 듯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만.”
그가 오스칼에게 짧게 양해를 구하더니 달려가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길거리에 덩그러니 남은 오스칼은 묘한 기시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에도 이 남자와 함께 있다가 갑작스럽게 혼자 거리에 남겨졌었는데.
“이 남자, 오늘도 이렇게 혼자 사라져버린 건 아니겠지?”
불만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누군가 오스칼의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뒤돌아선 오스칼의 눈앞으로 화려한 꽃다발이 나타났다.
“선물이야.”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커다란 꽃다발 뒤로 눈부신 금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푸른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의 미소에 싱그러운 향기가 실려 왔다. 멀리서부터 달려왔던 모양인지 그는 살짝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데이트잖아. 데이트에는 꽃다발이 빠질 수 없지.”
한 아름 꽃다발을 오스칼에게 안겨준 에렌이 녹아내릴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팔로 안아 들어야 할 만큼 풍성한 꽃다발을 들고서 오스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트로 서로를 알아가자는 말이 진심이었어요?”
“당연하지.”
에렌이 꽃다발 사이에 폭 파묻혀 있는 오스칼의 작은 얼굴을 보며 미소지었다.
“난 싫어요. 데이트라는 표현은 좀 그렇다고요. 그건 우리가 계약관계가 아니라 마치 남녀 관계인 거 같은….”
오스칼이 불편한 듯 말끝을 흐렸다. 에렌이 어쩐지 묘한 표정으로 오스칼을 빤히 바라보았다.
“좋아. 그러면 이건 어때? 비즈니스 미팅. 사업 파트너끼리 사업 논의도 하고 그래야 하니까.”
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오스칼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리고 다음부터 꽃다발은 안 돼요.”
오스칼이 그에게 다짐을 받듯 단호하게 말했다. 에렌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대가 그렇다면 분부대로 해야지. 그런데, 정말 꽃다발. 싫어해?”
에렌이 오스칼의 눈치를 살폈다.
“경이 자꾸 데이트라고 하니까 그러죠. 꽃다발, 안 싫어해요. 이렇게 예쁜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오스칼이 품 안의 꽃송이들에 시선을 주었다.
작약, 히아신스, 리시안서스, 은방울꽃, 라넌큘러스, 튤립. 한 송이, 한 송이가 탐스럽고 싱싱했다.
꽃집에서 가장 생기있고 예쁜 꽃들로만 골라 만든 꽃다발인 모양이었다. 꽃 사이사이 장식된 진주알과 리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오스칼이 향긋한 꽃내음을 뿜는 꽃망울들을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품에 안은 분홍작약의 빛깔이 그녀의 두 뺨에도 떠올랐다. 에렌의 눈에 그 모습이 수채화처럼 담겼다.
“나도 좋아해. 예쁜 거.”
그가 그렇게 말하며 선선하게 웃었다.
“방금은 꽃다발을 사러 다녀온 거예요?”
“응.”
“말을 하지 그랬어요. 꽤 기다려도 안 오길래 이번에도 나만 두고 가버린 줄 알았어요.”
오스칼이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에렌이 부드러운 눈빛을 한 채, 오스칼의 품에 들린 꽃다발에 손을 뻗어 작약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그는 살짝 열린 꽃봉오리에 가볍게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오스칼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아름다워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에렌이 오스칼을 향해 미소짓고는 자신의 슈트 주머니에 꽃대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이젠 정말 안 놓칠 거거든.”
***
에렌에게 정산금을 받아 돌아온 뒤, 평화로운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에 에렌이 심부름꾼을 통해 오스칼에게 보내온 엄청난 크기의 선물상자 때문에 레오가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던 작은 사건을 제외하면 말이다.
오스칼의 재킷을 빌려 갔던 에렌은, 오스칼의 재킷을 돌려주는 대신 멋들어진 새 슈트 한 벌을 보내는 것으로 제 의무를 다했다.
물론 슈트에 따라붙는 구두니, 행커치프니, 커프스니 하는 시시콜콜한 액세서리들이 당연하듯 함께 포장되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세상에! 형님 이게 다 뭡니까?”
“이야! 태어나서 이렇게 윤이 나는 옷은 처음 봅니다.”
“무슨 짓을 하면 옷에서 광채가 나는 겁니까?”
에렌이 기사단으로 보낸 번쩍거리는 최고급 슈트를 본 청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년들의 눈이 커지면 커질수록 레오의 눈은 한없이 가늘어졌다.
오스칼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화려한 옷을 받게 된 것이 창피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본인에게나 어울릴 만한 옷을 내게 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오스칼이 빨개진 뺨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아! 혹시 이거 전에 제라드가 말했던 그 남색…쿨럭.”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애버트의 옆구리를 제라드가 쿡 찔렀다. 애버트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리를 움켜쥐느라 미처 말을 마치지 못했다.
“대체… 그자가 이건 왜 보낸 건가?”
레오가 선물상자 바닥에 찰싹 붙어있는 쪽지를 들어올리며 오만상을 썼다. 에렌의 서명이 담긴 쪽지였다.
“내 재킷을 빌려줬었는데… 이걸 대신 보냈네. 그 재킷을 잃어버렸나?”
레오가 사준 재킷 중 하나였는데.
오스칼이 아쉬운 듯 머리를 긁었다. 그 말에 레오의 눈썹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그가 불쾌한 듯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작자로군.”
“사정이 있었겠지. 어쨌든 레오 네가 사줘서 아껴 입던 재킷인데.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해. 아쉬운 대로 네가 이 슈트 가질래?”
미안한 듯 레오의 표정을 살피던 오스칼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해맑게 웃으며 슈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오스칼의 말에 레오의 표정이 짧은 순간에도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제가 사준 거라 아껴 입었다는 말에 기분이 누그러졌다가도, 오스칼의 몸에 딱 맞춘 것 같은 새 슈트를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그 슈트엔 내 팔 한쪽도 안 들어갈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그자가 네 옷 치수는 어떻게 안 건가?”
“엇. 그러게. 내 몸에 꼭 맞네?”
의아한 표정으로 슈트를 걸쳐보던 오스칼이 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하하. 그 사람이 눈썰미가 좋은가 보지!”
레오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 형님 옷이 날개라더니. 그런 고급스러운 옷을 입으시니 어느 귀족 집안의 영식같이 보이는데요?”
“으하하. 역시 그렇지?”
기욤의 칭찬에 우쭐한 오스칼이 다시 한번 슈트를 손으로 쓸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고급 원단의 감촉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결국, 오스칼은 레오의 이글거리는 눈을 피해 슈트를 벗어 제 방에 곱게 걸어두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렇게 자그마한 소동이 있었다는 것만 빼면, 요 며칠간 오스칼은 마티스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산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단원들 검이랑 방패를 다 바꿔주는 건 어때?”
“흐흐. 보호장구를 원하는 녀석들도 있을 거야. 갑옷이나 투구 말이야.”
“전부 다 바꾸기엔 아직 좀 모자라겠지?”
“이대로라면 3개월 내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후후후.”
마티스는 연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넉넉해진 기사단의 자금으로 새 장비를 잔뜩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모양이었다.
“이제 인원도 더 충원할 수 있겠지?”
“본부 건물도 멋지게 새로 짓고!”
마티스가 생각만 해도 좋다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다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 같군. 지금의 자금으로 가능한 선에서 차근차근 생각해.”
레오가 몽상에 빠져 키득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끌끌 혀를 찼다. 한창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중이었는데 산통을 깨는 것이 불만인 듯 오스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차기작도 끝내주게 잘 될 거거든? 에렌 경도 차기작에 큰 흥미를 보였다고!”
“아, 에렌 경이라면 오스칼을 좋아한다는 그 귀족?”
“뭐?”
“뭐라고?”
마티스의 해맑은 목소리에 오스칼과 레오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