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데, 데이트요?!”
오스칼이 꽥 소리를 질렀다.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대포라도 삶아 먹은 것 같은 오스칼의 목소리에 에렌이 다시 한번 쿡쿡거리며 웃었다.
“내가 이 인쇄소를 차명으로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칼릭스 가문과 관련 있는 자와 계속 거래를 하다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잖아? 사업은 신뢰가 중요한데 말이야.”
“그게 대체 데이트랑 무슨 상관인가요?”
오스칼이 붉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에렌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은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으니, 그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갈 시간을 갖자는 거지. 그게 데이트 아니겠어?”
그가 천연덕스럽게 미소지었다.
분명 이상한 논리인데, 묘하게 그럴듯하게 들렸다. 오스칼이 말문이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대체… 그게 왜 데이트….”
에렌은 오스칼이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데이트의 첫 번째 단계는 저녁 식사니까.”
에렌의 눈이 사르르 휘었다.
***
“그…러니까, 그대가 먹고 싶은 음식이….”
“돼지발이요! 돼지발!”
오스칼이 자신의 소울푸드를 떠올리며 눈망울을 반짝거렸다. 에렌은 그 초롱초롱한 시선에 난감하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수많은 영애에게 식사 제안을 해 보았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뭘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돼지발’ 이란다. 그는 ‘돼지발’이 요리 재료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돼지발…을 사람이 먹어?”
“닭발도 먹는데 돼지발을 왜 못 먹어요?”
오스칼이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닭…발? 정말 그런 걸 사람이 먹는단 말야? 살코기를 두고 왜 자꾸 발을 먹나?”
에렌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해본 음식이었다.
“혹시 여기선 그런 거 안 먹어요?”
오스칼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오스칼의 실망한 표정을 보던 에렌이 곤란하다는 듯 자신의 턱을 한번 쓰다듬더니 종을 울려 알랭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못마땅한 표정을 한 알랭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시 시작된 제 주인의 기행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었다. 살롱의 ‘마드모아젤’ 타령이 끝난 줄 알았더니, 이젠 남루한 평민 청년 하나를 만나겠다며 아득바득 인쇄소로 출근한 참이었다.
예정에도 없던 인쇄소에 들르느라 그가 오늘 조정한 일정만 해도 무려 다섯 개였다.
“음… 알랭, 혹시 돼지발 음식에 대해 아는 것 있나?”
“돼지…발 말입니까? 저잣거리에서 평민들이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얘긴 들어봤습니다만. 저도 잘 모르겠군요.”
‘돼지발’이란 단어에 눈을 찡그리고 고고한 어투로 대답하는 알랭의 표정은 질릴 대로 질려있었다.
“평민 음식이라니….”
오스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에서 ‘족발+막국수’ 세트는 최소 35,000원부터 시작하는 꽤 비싼 음식인데.
실망한 듯한 오스칼의 표정에 에렌이 진지한 얼굴로 알랭을 향해 속삭였다.
“단테는 알지도 몰라.”
“단테…를 고작 돼지발 따위를 위해 부르신다는 겁니까?”
알랭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단테는 에렌이 가장 신뢰하는 자로, 그의 정보원이자 호위였다. 중요한 임무를 비밀스럽게 진행할 때에나 부르는 자인데….
알랭의 불만스러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렌은 단테를 찾았다. 얼마 되지 않아 기척도 없이 훤칠한 청년이 등장했다. 진한 보라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한 청년이 에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에렌은 그가 나타나자마자 닦달하듯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돼지발로 만든 음식을 알아?”
“…돼지발이라면 조크바르 말씀이십니까?”
단테의 희망적인 대답에 오스칼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걸 파는 식당을 아나?”
“예. 모셔다드릴까요?”
단테의 대답에 잠깐 주저하던 에렌이 환해진 오스칼의 표정을 흘긋 바라보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안내해.”
***
“이게 조크바르군요!”
시장 한구석의 허름한 식당에서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스칼의 건너편에는, 이 식당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차림새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다른 손님들은 물론, 가게의 주인마저도 두 사람을 계속 힐끔거렸다.
고급스러운 슈트를 입은, 누가 봐도 귀족임이 분명한 남자가 이 낡은 식당에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낯선 모양이었다.
에렌은 한쪽 눈을 찡그리고 테이블에서 몸을 멀찌감치 떨어뜨린 채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그가 접시에 담겨있는 돼지발을 끔찍한 것을 보듯이 노려보았다.
“정말…. 난 이런 게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
에렌이 충격적이라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오스칼은 포크를 들고 와작- 살점을 발라냈다. 쫄깃쫄깃한 콜라겐 껍질이 먹음직스럽게 잘려 나왔다.
푹 찍어 입에 넣자 달콤하고 짭짜름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열심히 입을 우물거린 오스칼이 탄성을 질렀다.
“와! 진짜 맛있는데요?”
“정말…. 먹은 거야?”
에렌이 울상을 지었다. 오스칼이 먹고 싶다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여기까지 왔지만, 도무지 저 혐오스러운 모양새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거참, 경도 한번 잡숴봐요.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니까요?”
오스칼이 돼지발에서 곱게 발라낸 살점을 포크로 찍어 에렌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눈앞에 덜렁거리는 고깃덩어리에 에렌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두고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하는 걸까.
그가 갈등하듯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오스칼이 제게 음식을 직접 먹여주는 기회는 앞으로 또 언제 찾아올지 몰랐다.
마침내 그가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벌렸다.
그의 입안에서 말캉한 살코기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살짝 실눈을 떠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맛있죠?”
오스칼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먹여주기까지 했으니 감상을 들려줘야 할 것 같은데.
에렌이 괴로운 듯 느릿하게 입을 닫고 조심스럽게 살점을 씹었다. 이윽고 쫄깃하고 기름진 고기의 식감이 입안에 가득 퍼지자 그는 눈을 깜박였다.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데…?
꿀꺽-
에렌의 목울대로 고깃덩어리가 넘어갔다.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거봐요! 내가 맛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오스칼이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에렌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가게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 에렌의 모습에 비로소 마음을 놓은 오스칼은 고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돼지발을 상대하는 오스칼을 향해 에렌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먹는 게 그렇게 좋아?”
“네!”
오스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이런 음식을 아는 거야?”
에렌이 신기하다는 듯 오스칼에게 물었다. 멈칫, 포크 질을 멈춘 오스칼이 꿀꺽 살점을 삼켰다.
“어, 어떻게 알았든 무슨 상관이에요. 맛만 있으면 됐지. 다 먹었으면 얼른 일어나죠. 주위에서 자꾸 경을 흘끔거려요.”
오스칼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에렌이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더니 웃어 보였다.
“내가 어딜 가든 주목받을 외모긴 하잖아?”
“윽. 정말 왕자병이야.”
물론 오스칼은 ‘왕자’라는 단어에 에렌의 눈썹이 살짝 씰룩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와 시장길을 걸었다. 오스칼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했다.
“경은 왜 인쇄소를 차명으로 운영하나요?”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에렌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제 정말 나한테 관심이 생겼나 보지?”
“인쇄소를 차명으로 운영하는 걸 보면 이 일이 본업 같진 않은데. 경의 정체가 궁금해서요.”
“옳지. 내가 궁금하다니 아주 좋은 태도야.”
그가 벌꿀색 머리칼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시답잖은 말은 그만하고 묻는 말에나 답하라는 듯 오스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에렌이 싱긋 웃었다.
“일단 사업가라고 해두지. 그대와 처음 만난 살롱의 건물도 내 것이고, 다른 사업체도 몇 개 운영 중이야. 사실 인쇄소는 내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인수하게 된 거야. 그냥… 개인적인 취미랄까.”
“와….”
오스칼이 입을 딱 벌렸다. 건물주에 사업가인 것도 모자라서, 시에나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쇄소를 취미로 운영한다고 말할 정도라니. 이 사람, 다이아몬드 수저인가.
“그러는 마드모아젤의 정체는 뭐야?”
에렌이 오스칼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도 몰라요. 기억을 잃었다고 했잖아요.”
“꼭 그렇게 남장을 한 채로 지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의 목소리가 꽤 진지했다. 오스칼이 걸음을 멈추고 에렌을 바라보았다.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칼릭스의 기사단에서?”
“그런 셈이죠.”
오스칼을 응시하는 에렌의 눈이 깊어졌다.
“그건 기억을 잃은 이후에 결심한 일인 건가?”
“맞아요.”
“그럼 내가 그날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대는 지금 내 곁에 머무르고 있었을까?”
“….”
오스칼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날 자신이 레오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에렌이 조심스럽게 오스칼의 표정을 살폈다.
“할 일이란 게…. 다른 곳에서 할 수는 없는 건가?”
“무슨 뜻이에요?”
“기사단 일은 위험할 테니까. 내가 그대의 거처나 생활을 지원해 줄 수도 있어. 그러니 그 일을 굳이 칼릭스의 기사단에서 할 필요가 있냔 말이야.”
오스칼이 눈을 깜빡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레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벌써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와 함께 기사단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기사단 일이 재밌기도 하거든요.”
오스칼이 사르르 웃었다.
정말로 기사단 일은 재밌었다. 땀을 흘리며 동료들과 수련하거나, 긴장 가득한 임무를 수행할 땐 신이 났다.
제라드와 소설 이야기를 하거나 레오와 한집에서 투덕거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에렌이 그런 오스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웃었다.
“나도 재밌어.”
뜬금없는 그의 대답에 오스칼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요?”
“그대랑 함께 있는 게.”
“윽.”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홀릴 듯이 잘생긴 얼굴로 내뱉는 간지러운 말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덜컹-덜컹-
그때, 좁은 시장길 사이로 짐 마차가 달려왔다. 포장이 덜 된 길 위로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흔들렸다. 길 바깥쪽으로 걷던 에렌이 자칫 마차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어어, 조심해요!”
오스칼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에렌을 길 안쪽으로 당겼다.
덜그럭-덜그럭-
어수선한 바퀴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가깝게 스치고, 오스칼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에렌의 턱 끝에 닿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좁은 길가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것도 오스칼의 두 손이 에렌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고급스러운 실크 셔츠의 부드러운 질감이 오스칼의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마차가 지나간 밤길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두 남녀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민망함에 오스칼이 얼른 자신의 손을 에렌의 가슴팍에서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긴장한 나머지 오스칼의 손은 쥐고 있던 에렌의 셔츠 깃까지 함께 잡아당기고 말았다.
후두두둑-
오스칼의 강한 아귀힘을 견디지 못하고 셔츠의 단추가 장렬히 뜯어져 나갔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에 오스칼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에렌의 드러난 맨 가슴이 제 코끝에 닿자, 오스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게 웬 횡재… 아니 사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