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에렌이 왕국의 법도에 따라 국왕에게 예를 갖추었다. 국왕은 곧 있을 연회가 에렌으로 인해 지체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에르네스트 대공, 짐이 널 부른 적은 없을 텐데.”
비록 어머니는 달랐지만, 어린 시절 에렌과 국왕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국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왜인지 그는 에렌이 왕위를 탐내고 있다고 믿으며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수록 에렌은 그가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통 나아지지 못했다.
“폐하, 튈르리 감옥이 이교도들에게 습격당한 일을 알고 계시지요.”
에렌은 형제가 아니라 주군을 모시는 듯한 깍듯한 태도로 국왕을 대했다. 국왕은 눈을 한번 찡그리고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랬다는군.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냐?”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교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거기다 튈르리 감옥은 왕국의 중요한 요새 중 하나입니다. 이교도 몇 명 따위에 무너질 곳이 아니지요.”
“왕국은 네까짓 게 걱정하지 않아도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다. 그리고 국방은 아르투아 대공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속을 알 수 없는 네 놈보다 훨씬 믿을 만한 사람이지. 천한 어미를 둔 너와는 다르단 말이다.”
국왕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막말을 퍼부었다. 에렌의 미간이 잠시 좁아졌으나, 그는 이내 국왕을 충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 근위대를 통해 튈르리의 경비 체계를 바꾸라고 지시한 것이 바로 아르투아 대공이라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왕실 근위대의 통수권자도 폐하가 아니라 대공이지요.”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거친 소리에도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는 에렌을 보며 국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응당 국왕 폐하 아래에 두어야 할 군사에 대한 전권을 아르투아 대공에게 일임하시는 것을 재고해 주십시오.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내리면 분명 폐하께 위협이 될 겁니다.”
에렌의 읍소에 국왕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아르투아 대공이야말로 충신이자,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루이스터 숙부의 반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아닌가.
문득 국왕은 자신이 왕세자였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왕세자 저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군요.”
“아르투아 숙부님. 오늘도 테스에게 혼났습니다.”
“저런, 왕궁학자 테스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네에…. 아무래도 전 공부엔 전혀 소질이 없나 봅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아우 에르네스트는 벌써 고급 과정까지 끝마쳤다던데….”
“에르네스트가 아무리 뛰어난 들, 일개 왕자일 뿐입니다.”
“뭐든 잘하는 에르네스트가 질투 납니다. 아버지도 에르네스트를 더 귀애하시는 것 같아요. 이러다 에르네스트가 왕세자가 되면 어쩌지요?”
“전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왕국법상 장남인 왕세자 저하만이 적법한 승계자이시니까요. 아, 하지만 저하가 돌아가신다면 또 다른 얘기가 되겠지요.”
“제가 죽, 죽으면요? 10년 전 루이스터 숙부가 그래서 아버지와 저를 죽이려 한 걸까요?”
왕세자 샤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런, 제가 실언을 했나 보군요. 하지만 저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땐 에르네스트가 태어나기 전이었으니, 국왕 폐하와 왕세자 저하를 해치면 다음 계승 순위는 루이스터 형님이었지요.
루이스터 형님도 어린 시절 꽤 총명해 테스에게 칭찬을 듣곤 하셨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아르투아가 이야기를 계속할수록 샤를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때 숙부께서 저와 아버지를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군요.”
“아무래도 루이스터 형님과 국왕 폐하는 제게 의미가 다르니까요. 루이스터 형님은 선왕 폐하의 후궁이 낳은 아들이지 않습니까. 국왕 폐하는 어머니가 같은 친형제고요.”
샤를의 눈이 커졌다. 아르투아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서렸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후궁인데….”
“이런, 제가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생각해 보니 루이스터 형님과 에르네스트는 닮은 점이 많군요. 루이스터 형님의 어머니도 출신이 미천했지요. 아무래도 혈통이란 것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국왕이 아르투아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자신 아래로 무릎 꿇은 배다른 아우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늘 저를 끔찍이 생각해 마지않는 아르투아 숙부가 위협이 될 리 없었다.
그는 에렌의 말을 더는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역시 음험한 놈 같으니라고. 숙부가 가진 권한을 네게 달라는 뜻이냐? 그간 정치에 관심 없는 척하더니, 역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구나. 군사 문제나 튈르리의 경비 체계에 관한 정보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 보니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형님께서도 상황을 잘 살피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형님이라니! 무엄한 놈, 내가 왜 네 형님이냐? 네 놈에게 형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 따윈 없다. 감히 너 따위가 숙부님을 음해하고 무사할 성싶으냐? 썩 꺼지거라!”
국왕의 노여움 가득한 축객령에 에렌은 복잡한 얼굴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국왕에게 아뢰지는 않았으나, 튈르리 감옥의 습격과 살롱의 테러 사건에는 분명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이교도들이 튈르리 감옥을 습격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왕실 근위대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이교도들이 감옥을 습격한 후에 주변 상가를 약탈할 때까지도 왕실 근위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상가에 테러를 저지른 후, 바로 현장을 벗어나지 않고 굳이 다시 사상자를 확인하러 살롱이 있는 건물에 들른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그때 복면을 쓴 자 중 한 명은 에렌을 마주치고 “놈이 살아있다.”라고 외쳤다.
이어 나타난 습격자 역시, 이미 동료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도 달아나지 않고 집요하게 그들을 공격해 왔다.
단순히 약탈을 위해 폭탄 테러를 저지른 것이라면, 자신에게 그런 반응을 보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부여받은 임무를 마쳐야 하는 것처럼 에렌과 오스칼에게 달려들었다.
게다가 하필 그 살롱에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 또한 석연치 않았다. 살롱의 건물은 에렌의 소유였다.
에렌이 건물의 관리를 겸해서 종종 살롱에 들른다는 사실은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결국, 에렌은 살롱에서의 사건이 이교도에 의한 테러를 가장하여 자신을 암살하기 위한 무대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누가 수많은 귀족을 죽일 위험을 무릅쓰고 테러를 벌여 자신을 살해하려 했냐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사람.
왕실 근위대의 통제권을 가진 사람.
그가 그 살롱에 드나드는 것을 아는 사람.
튈르리 감옥의 경비 체계가 바뀐 것을 아는 사람.
이교도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보력이 있는 사람.
단 한 사람뿐이다.
에렌은 왕궁에 심어 놓은 자신의 사람을 은밀히 불렀다.
“아르투아 대공이 최근에 누굴 만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존명.”
조용히 왕궁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보며 에렌은 눈을 빛냈다. 이제 에렌의 첩자가 아르투아 대공을 감시할 것이었다.
***
어느 늦은 밤, 오스칼은 오늘도 제라드의 소설을 눈이 빠져라 읽고 있었다. 제라드의 소설을 읽는 일은 최근 오스칼의 낙이었다.
한창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이 무르익고 있을 무렵, 방 안에 바람이라도 분 듯 촛불이 일렁였다. 오스칼은 혹시 창문이 열려 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설마…. 또…?”
불현듯 떠오른 남자의 얼굴에 오스칼이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 날 생각하는 거야?”
“으악!”
귓불에 느껴지는 뜨거운 바람과, 야릇한 목소리에 오스칼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언제 나타났는지 클로드가 오스칼의 등 뒤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내가 보고 싶진 않았어?”
“제발 기척을 좀 하고 다녀! 아니, 아예 나타나지를 마! 한밤중에 남의 방에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거 정말 민폐야.”
오스칼이 클로드를 향해 우다다-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럼 당신이 내게 오면 되잖아.”
“내가 왜 거길 가? 이제 너한테 볼일도 없고, 거기 들어가려면 피도 내야 하고. 싫어, 딱 질색이야.”
“당신은 용건도, 피도 필요 없이 언제든 그냥 들어오게 해줄게. 내 방은 당신에게 항상 열려 있어.”
“닫아.”
오스칼이 그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당신이 말했던 그 인신매매단에 관한 정보를 가져왔는데.”
“오! 그래? 알아보니 좀 어땠어?”
뜻밖의 이야기에 오스칼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가 정말 인신매매단에 대한 정보를 알아 오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스칼의 빠른 태세 전환에 클로드가 살짝 심통이 난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정보에 대한 대가를 받을 걸 그랬어. 지금이라도 나와 키스….”
스릉-
“그 이상 입을 열면 당신, 목이랑 몸이 분리되는 수가 있어.”
오스칼이 클로드의 지치지도 않는 헛소리에 검을 뽑아 들었다. 살기등등한 오스칼의 기세에 클로드가 억울하다는 눈빛을 지어 보였다.
분명 원작에서 클로드를 묘사한 단어는 ‘왕국 최고의 냉혈한’, ‘피도 눈물도 없는 정보상’ 이런 것들이었는데, 직접 보니 그냥 ‘나사 빠진 변태’였다.
입을 삐죽이며 침대에 걸터앉은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그 양피지는 아주 고급이었어. 고위 귀족들이나 쓸 법한 것이었지.”
“치안대에 체포된 자를 풀어 줄 정도로 힘을 가진 자라면 그럴 만하지. 역시 왕국의 높은 자 중에 흑막이 있다는 얘기군.”
오스칼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던 중에 불완전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어.”
“흐, 흑마법이라고?”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스칼〉에서 흑마법을 쓰는 자로 설정된 등장인물이 클로드 말고 또 있었나?
“오직 고대 마녀만이 완전한 흑마법을 다룰 수 있어. 난 그 마녀와 계약을 했기에 흑마법을 다룰 수 있지. 많은 자가 흑마법을 가지고 싶어 했지만 그건 모두 불완전한 것들뿐이야. 인신매매단의 배후도 그런 자들 중 하나일 거야.”
“불완전하다는 게 어떤 의미야?”
“스스로 발휘하는 힘이 아니란 거야. 매개체를 이용해 부정한 에너지를 빨아들인 후 흑마법으로 사용하는 거지.”
인신매매단의 배후가 흑마법까지 쓰려고 한다는 말에, 오스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순간, 오스칼이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빛냈다.
“25년 전에 미색으로 남자들을 홀려 악행을 저지르다 화형당한 잔느라는 마녀가 있었잖아? 설마 그 마녀가 당신이 계약한 고대 마녀야?”
여자였던 주인공은 미색에 홀리지 않아, 마녀를 붙잡아 처형할 수 있었다는 원작의 작은 에피소드였다. 클로드가 잠깐 생각하는 기색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그 여자는 마녀가 아니야. 마도구를 이용해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사악한 여자일 뿐이지.”
“…당신이 누군가에게 사악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어?”
오스칼이 클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야말로 이 왕국에서 가장 나쁜 놈으로 소문났으면서.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은 클로드가 눈을 찡그렸다.
“난 계약을 이행할 뿐 사람을 조종한 적은 없는데.”
“그래서 그 여자가 당신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오스칼의 말에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오스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당신 말처럼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어볼까? 이를테면…. 지금부터 당신의 몸과 마음을 조종한다든지.”
창문 사이로 비친 달빛이 클로드의 미소 위로 내려앉았다. 아름다운 그의 외모와 달리 그가 내뱉은 말은 퍽 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