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두 쌍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레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레오는 휙 고개를 돌렸다.
젠장. 그 질문만큼은 나오지 않길 바랐는데. 자신의 다리가 이성의 지배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였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니히↗ 그게헤↘”
레오가 침착한 척 입을 열었지만,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크흐흠.”
짐짓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크게 헛기침한 레오가 말을 이었다.
“시, 시내에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나간 김에, 너희가 있을까 해서 근처 인쇄소를 들여다본 것뿐이다.”
“그런 거면 처음부터 우리랑 함께 시내에 나가지 그랬어. 난 네가 여기 남아서 투구 닦기를 하고 싶어 할 줄 알았지.”
“가, 갑자기 생각난 일이었다.”
“근데 에렌 경한텐 왜 그렇게 날을 세운 거야?”
“그…그건.”
레오가 진땀을 흘렸다. 두 사람이 지나치게 다정해 보여 끼어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는 동안, 제라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엇! 형님, 그런데 말입니다. 에렌 경이요.”
“응?”
레오의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제라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한쪽 손을 자기 입가에 대고 은근한 목소리로 오스칼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혹시 남색가이신 겁니까?”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레오의 예민한 청각은 그 단어를 또렷하게 잡아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어? 남색가?”
“형님을 대하는 태도가 왠지 좀 그랬지 않습니까.”
“날 대하는 태도가 어쨌다고 그래?”
“그…. 왜 그런 분위기 있잖습니까. 묘하게 끈적한 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 같은 분위기랄지….”
미끄덩-
레오의 손이 투구를 닦다 말고 삐끗- 미끄러졌다.
“무, 무슨 말이야. 아, 아니야! 아니 에렌 경이 남색가인지는 모르겠고. 암튼 나랑은, 아니 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오스칼이 말까지 더듬어가며 허둥거렸다. 그 모습에 제라드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사실 지난번에 형님이 남색가들에 대해 신나게 말씀하시길래, 전 형님이 그런 거엔 전혀 거부감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남자가 형님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좀 싫으시죠?”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오스칼이 터질 것 같이 빨개진 얼굴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형님이 지난번 말씀하신 소설 소재요! 남색을 즐기던 개망나니 귀족이 야한 그림을 그리는 노예 화가와 질척한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으악! 제라드 제발 조용히 좀 해!”
오스칼이 소스라치게 놀라 후다닥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그거야말로 대단한 명작이 될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거고! 갑자기 지금 그 이야기를 왜 해!”
오스칼이 잔뜩 울상을 지었다.
제라드 이 자식, 날 대체 어디까지 창피하게 만들 셈이야?
“제가 남자가 남자에게 키스하는 것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서요.”
우당탕-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레오가 닦고 있던 투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키스라니이……. 누가 들으면 입술이라도 부딪힌 줄 알겠다. 손등이잖아! 손등! 너 이 자식아 말을 좀 똑바로 해!”
오스칼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레오가 조용히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투구를 집어 들었다.
“제라드 자카. 종일 떠드는 걸 보니 힘이 남아도는 것 같군. 그런 헛소리를 계속 지껄일 거면 지금 당장 달리기 50바퀴, 팔굽혀펴기 100회, 타격 100회, 베기 100회를 실시하고 오도록.”
레오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것만 같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레오의 지시에 제라드는 영문도 모른 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나가야 했다.
***
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의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섬세하게 부조가 새겨진 벽을 따라 걸었다.
바닥에 깔린 호화로운 붉은 카펫은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하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솟아올랐다. 높은 천장 아래, 왕궁의 복도는 끝도 없이 길었다.
국왕 라인하트 10세의 배다른 남동생,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왕족, 천재, 꽃미남, 건물주, 사업가, 백만장자, 사교계의 왕자, 라인하트의 1등 신랑감 그리고….
에르네스트 대공.
모두 에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몹시 총명했던 그는, 이미 9세가 되던 해에 역사, 철학, 문학, 외교 분야를 두루 섭렵해 통달했으며, 13세가 되던 해에는 왕자에게 주어지는 영지에서 나는 수익을 외국의 광산과 상단에 투자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왕국 내에서 수많은 상단과 사업체를 직접, 혹은 차명으로 운영할 정도로 수완이 뛰어났다. 그야말로 부와 지성, 외모까지 갖춘 완벽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만큼은 관여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의 출신에 있었다.
선왕의 후궁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천한 신분의 무희였다. 천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감히 형보다 뛰어날 수 없었다.
그가 형보다 뛰어난 인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간, 그 존재 자체로 왕위를 이을 형에 대한 죄가 될 테니.
그는 어느 정도 철이 들면서부터 궁정 정치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며, 왕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한량 행세를 했다. 왕국 내 파티란 파티는 모두 참석하며, 뭇 귀족 영애들과 어울려 다녔다.
덕분에 시에나 사교계에 데뷔한 마드모아젤이라면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물론 평생 사교계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레오와 평민인 제라드는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오스칼이라고….”
오스칼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괄괄한 말투에 정숙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말괄량이 아가씨. 평소 그가 어울리던 요조숙녀 같은 귀족 영애들과는 전혀 딴판인 마드모아젤이었다.
과연 그녀에게 ‘마드모아젤’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될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굴 때는 언제고, 겨우 가벼운 손등의 키스에도 소스라치듯 놀라던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에렌은 결국 소리내어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영애들이라면 ‘꺄아악’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우어억’이라니.”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드레스를 찢질 않나, 무장한 사내들을 베어 버리질 않나, 갑자기 제 인쇄소에 나타나서 동업을 제안하질 않나.
“우연이 계속되면 운명이라던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빙긋 웃었다.
불과 며칠 전, 그녀를 찾는 일을 결국 포기한 에렌이었다.
에르네스트 대공이 그의 집사 알랭 도비에를 통해 귀족 영애의 초상화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시에나의 사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딸을 가진 귀족 가문 사이에선 혹시 그가 신붓감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은근한 기대감으로 들떴다. 라인하트의 모든 마드모아젤들이 초상화를 그려대느라 화가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야.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자네 초상화를 다 구해 온 것은 맞아?”
“그게 시에나에 있는 그 나이 또래 귀족 영애 전부입니다. 무려 37점의 초상화지요. 심지어 유부녀들도 초상화를 보냈습니다만?”
유부녀들조차 왕국 최고의 신랑감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던 모양이었던지, 넌지시 자신의 초상화를 알랭에게 들이밀었다. 에렌이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듯 아차 싶은 표정을 했다.
“설마 그 마드모아젤이 기혼이었거나, 사실 보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걸까?”
“그렇다면 대공께서 대체 어쩌시게요?”
알랭이 속이 터진다는 듯 되물었다.
“혹시 시에나에 거주하는 영애가 아닌 건가? 알랭, 수도 밖 영애들의 초상화도 찾아야 할까?”
에렌의 집착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실존하지도 않는 여인을 찾느라, 전 세계 귀족 영애의 초상화를 모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알랭은 사직을 불사하고 그의 주인에게 직언을 퍼부었다.
“지금 전하께서는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겁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영애를 찾고 계신 거라고요! 그날 폭발의 충격으로 사람을 착각하셨거나, 정신이 혼미해지신 탓에 어디에 홀리신 게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내가 두 눈으로 그 영애를 똑똑히 보았네만…….”
에렌이 다시 항변했다. 그 말에 알랭이 팽팽하게 맞섰다. 물론 가슴 속에 품은 사직서가 에렌의 눈에 띄도록 살짝 꺼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인을 찾겠다고 에렌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이후, 품에 넣고 다닌 사직서였다.
“좋습니다. 대공께서 찾으시는 영애가 존재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살롱에 드나드는 영애 중에 전하가 누군지 모르는 분도 계십니까? 그 영애께서 전하를 찾으려고 했으면 분명히 먼저 대공저에 연락을 취했을 겁니다!
그 영애가 라인하트의 귀족이었다면 그동안 전하께서 이 난리를 치셨는데,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까지 꼭꼭 숨은 걸 보면 그분 쪽에서 전하 앞에 나타날 마음이 없는 겁니다! 이제 그만 인정하십시오!”
알랭의 묵직하고, 다소 긴 일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포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운명처럼, 찾기를 포기하자마자 그녀는 제 눈앞에 나타났다. 에렌은 제게 올망졸망한 눈을 부라리던 오스칼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다시 한번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문득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길게 이어진 웅장한 복도가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어느덧 그의 상념도 끝이 났다.
어느새 거대한 문 앞에 선 그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 시종장이 그가 당도했음을 알리자, 천천히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