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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27)화 (27/138)

27화



 

오스칼과 제라드가 시에나로 떠났을 무렵, 레오는 그의 마음을 헤집는 정체 모를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딘가 허전하면서도 초조하고 불쾌한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레오는 손질 중이던 투구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붙들고 있었건만, 투구는 오스칼이 시에나로 떠난 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젠장, 자기 정진과 정신 수련 같은 소리.”

제 입으로 지껄인 정진과 수련에는 보기 좋게 실패한 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투구를 내려놓고 말았다.

가슴이 답답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는 시에나의 인쇄소란 인쇄소를 모두 뒤지고 있었다.

인쇄소 몇 군데에서 허탕을 친 그가, 시에나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쇄소에 도착했을 무렵 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그곳에서 레오는 어렵지 않게 오스칼을 찾아냈다. 넓은 인쇄소의 북적거리는 인부들 사이에서도 오스칼의 모습은 금방 눈에 띄었다.

“오스….”

오스칼의 이름을 부르려던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오스칼 곁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뜨일 만큼 화려한 옷차림을 한 금발 머리의 사내.

심지어 오스칼은 그 남자와 지극히 다정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레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레오는 조금 전에 느끼던 초조함이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레오가 꾹꾹 눌러 참던 감정들이 다시금 불쑥 튀어나와 그의 마음속을 사납게 헤집어 놓았다.

그의 다리는 그의 이성이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오스칼을 향해 움직였다. 저벅저벅 오스칼에게 향하는 그의 걸음에는 평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그때, 오스칼이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금발 남자의 가슴팍을 붙잡아 당겼다. 그 고운 얼굴이 남자의 귓가에 가까이 닿는가 싶더니, 수줍기라도 한 듯 귀가 불그스름해졌다.

제기랄, 지금 저 녀석이 대체 뭘 하는 거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 오르던 것이 넘쳐흘렀다. 뜨거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두 사람의 근처까지 다가간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오스칼의 팔을 붙잡아 금발의 남자에게서 떼어놓았다.

마침내 오스칼을 등 뒤로 숨긴 레오가 금발의 남자를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레, 레오?”

갑작스러운 레오의 등장에, 오스칼이 눈만 끔뻑거렸다. 금발의 남자가 옅게 찌푸린 눈으로 레오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예의를 차리며 단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자네 뒤에 서 있는 저 청년과 사업 논의 중이었다네. 그러는 자네는 누구길래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건가.”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제라드가 어쩐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세 사람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다, 단장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혀, 형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제라드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을 따라잡느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새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인쇄소의 관리인이 멀리서부터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이쿠, 주인님. 죄송합니다. 이자들은 책을 발간해 달라고 방문한 자들인데, 조건이 맞지 않고 내용도 형편없어 거래를 거절했더니 괘씸하게도 주인님께 이런 무례를 범하나 봅니다. 제가 얼른 정리하겠습니다.”

관리인은 연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허겁지겁 상황을 수습하려던 관리인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기사단의 세 사람에게 대거리했다.

“이보시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더는 이곳에서 난동 부리지 말고 얼른 썩 돌아가시게!”

“그럴 겁니다.”

레오는 바라던 바였다는 듯, 금발 남자와 관리인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리고 오스칼을 바짝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쥔 채 돌아섰다.

‘어, 어? 이게 아닌데!’

오스칼은 레오의 어깨에 반쯤 안긴 채, 고개를 돌려 금발의 남자를 다급하게 쳐다보았다.

이대로 자신들을 보낼 작정이냐는 항의의 눈빛이었다. 오스칼과 눈이 마주친 금발의 남자가 씨익 웃었다.

“잠깐.”

뒤돌아선 레오가 미처 세 발자국을 채 내딛기도 전에,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 거래, 하지. 자네들과.”

“주, 주인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관리인이 눈을 크게 뜨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금발 남자를 바라보았다.

“보증금 없이, 업계 최고의 조건으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발행할 수 있도록.”

단호한 음성이었다. 이번에는 제라드가 입을 쩍 벌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는 표정이었다.

“피에르, 자네는 방금 내가 알려 준 조건으로 저들과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게.”

“예?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관리인 피에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방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레오의 팔 안에 갇힌 오스칼이 그제야 안심한 듯 눈을 굴려 금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스칼과 눈을 마주친 금발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이름은 엑스트라가 아닌 에렌이야. 편하게 에렌 경이라고 부르면 돼. 이제 그대의 이름도 내게 알려 주는 게 어때?”

오스칼이 말간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스칼…이요.”

에렌은 그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 두겠다는 듯 길쭉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오스칼이라.”

에렌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스칼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기 짝이 없었는데, 달콤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오스칼은 왠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괜한 기분에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에렌이 말을 이었다.

“이제 한배를 탄 사이가 되었으니, 각자 갈 길로 갈 수는 없을 테지.”

“…….”

에렌은 좀스럽게도 아까 오스칼이 한 얘기를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어쩐지 그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오스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렌은 인상을 구기고 있는 오스칼을 보며, 또 뭐가 그렇게 웃긴지 피식 웃었다. 오스칼은 그런 에렌을 보며 참 웃을 일도 많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여전히 팔에 가두고 서 있는 레오를 흘긋 바라보며, 웃음에 인색한 이 녀석과 에렌을 반반 섞어 놓으면 딱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에렌은 오스칼이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표정을 숨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 생각이며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아가씨였다.

그게 귀여운 부분이긴 하지만, 저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딴 생각이라니.

에렌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난 엑스트라보다는 주인공이 더 적성에 맞아서 말이야.”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러나 백조같이 우아한 몸짓으로 레오의 팔 안에 있는 오스칼의 손을 잡아끌었다. 예상치 못한 에렌의 행동에 레오는 속절없이 오스칼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 오스칼의 손을 잡은 사람은 에렌이었다. 에렌은 마치 마드모아젤에게 예를 갖추는 귀족 신사와 같은 모습으로, 오스칼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에, 오스칼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우어억!”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손등의 살갗에서 느껴졌다. 그 야릇한 감각에 오스칼의 얼굴이 불타는 듯 빨개졌다. 에렌은 오스칼의 반응에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당신 지금…!”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레오가 버럭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에렌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가 버렸다.

이제 에렌이 빠져나간 인쇄소 안은 각자의 이유로 사고회로가 정지해버린 네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늦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레오와 에렌 사이에 튀었던 불꽃 때문인지, 인쇄소의 공기가 못 견디게 뜨거웠다.

***

인쇄소 관리인 피에르와 성공적인 계약을 마친 후 기사단에 돌아온 세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레오는 더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응접실 한구석에 앉아, 아까 던져두고 나왔던 투구를 붙들고 있었다. 언뜻 투구 닦기에 열중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미간에 잡힌 세 개의 주름이 그가 상당히 분노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형님, 대체 에렌 경과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일이 잘 풀린 겁니까?”

제라드가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오스칼을 향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에렌의 이름이 들리자 저쪽에서 투구를 닦던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두 개 더 생겼다.

“그… 별건 아니고, 예전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그 사람을 좀 도와줬을 뿐이야.”

오스칼이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족들의 살롱에서 테러를 당해 죽을 뻔한 걸 구해주고 같이 도망쳐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이야. 형님은 대체 못 하시는 게 뭡니까? 형님이 나서면 일이 척척 풀리는데요? 불길에서도 다친 곳 하나 없이 탈출하시고, 우연히 도와준 사람조차 엄청난 부자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라드가 흥분한 목소리로 오스칼을 칭송했다.

“하…. 하하. 그런가.”

오스칼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만큼 일이 안 풀리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올림픽 금메달을 따자마자 망한 작품에 빙의한 날 두고 할 소리는 아니지. 일이 척척 풀렸으면, 지금 내가 여기 있겠냐고!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의 오스칼에게서 고개를 돌린 제라드가 이번에는 레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단장님께서는 갑자기 인쇄소에 무슨 일로 오셨던 겁니까.”

“그러게. 레오 넌 우리가 그 인쇄소에 있는 걸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아깐 경황이 없어서 묻질 못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

두 사람의 얼굴에 궁금증이 피어오르자, 투구 위에 올려진 레오의 손이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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