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26)화 (26/138)

26화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간 엑스트라!”

오스칼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어 말해버렸다.

이내 당황해 입을 다물었으나 갑자기 울려 퍼진 낯선 이의 목소리에 인쇄소의 이목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미, 미쳤나 봐. 왜 그 소릴 입으로 내뱉고 그래.’

오스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름다운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오스칼을 향해 걸어왔다.

불과 몇 걸음 만에 오스칼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오스칼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이윽고 남자가 마치 보물찾기에서 보물이라도 찾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은 그때 그 살롱의 마드모아젤…?”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오스칼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오스칼의 차림새를 확인한 남자가 이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드모아젤의 행색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경박… 아니 놀라운 모습이군.”

흐려지는 그의 말끝과 함께 오스칼의 인상이 구겨졌다.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례한 모습이고요.”

오스칼은 지난번부터 묘하게 자신을 하대하며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듯한 남자의 말투가 불쾌하다는 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남자는 눈썹을 한번 올렸다가 내리고는, 방금 자신의 말은 실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방금 말은 실언이었어. 마드모아젤을 만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드는군. 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건가. 아니, 그보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

그는 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어우, 전구를 백만 개 켜 놓은 듯한 후광이란 게 이런 건가.

오랜만에 만난 남자의 모습은 지난번보다 훨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전쟁 같은 살롱에서 구른 뒤에도 빛나던 외모였으니 잘 꾸며놓은 지금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그 얼굴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좀 너그러워지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반가워요. 그땐 미처 통성명도 못 해서.”

그 말에 남자가 이번에는 소리내어 웃었다.

“내 이름을 몰라서 그렇게 외친 건가? 태어나서 누가 날 ‘엑스트라’라고 부른 건 처음이야.”

그는 오스칼이 큰 목소리로 내뱉은 단어를 떠올리며 큭큭대며 웃었다. 무안해진 오스칼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하긴, 이 남자 정도의 외모라면 어디 가서 항상 주목받는 주인공이었겠지.

어쨌거나 사람을 앞에 두고 말실수를 했으니, 이 남자에게 무례하다는 말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오스칼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그건 실수로 한 말이었어요.”

“괜찮아. 나도 마드모아젤에게 실수를 했으니까.”

그가 쿨한 태도로 싱긋 미소지었다. 오스칼도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몸은 괜찮아요? 그땐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깜짝 놀랐어요. 다행히 당신의 사용인이 곧바로 데려가긴 했지만.”

“응, 덕분에 보다시피 멀쩡해. 그땐 내가 팔을 다쳐서 부득이 그대에게 내 목숨을 맡겼었지. 하지만 그건 확실히 하게 해줘. 내가 검도 못 다뤄 마드모아젤에게 보호받을 정도로 한심한 남자는 아니라는 거.”

“당신을 한심하게 본 적 없어요. 아무리 훌륭한 실력을 갖춘 사람도 곤란한 상황에선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사람이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

오스칼의 대답에 그의 표정이 일순간 묘해졌다. 그러나 이내 묘한 표정을 거둔 그가 다시 오스칼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하지만 날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은혜도 모르고 내뺐다는 생각은 하나 보군?”

남자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짐짓 슬픈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분명 오스칼을 놀리는 듯한 태도였다.

“사실이긴…. 하잖아요.”

오스칼이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내밀었다.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갔다는 표현이 좀 무례할지언정, 맞는 말이긴 했다.

이 남자가 지옥 같은 살롱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자신 덕분이건만, 그의 사용인은 저를 길가에 버려둔 채 이 남자만 쏙 빼가지 않았던가.

결국, 거리에 혼자 남아 이교도 잔당 놈들과 11:1로 싸우다 죽을 뻔했고.

그 일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레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교도에게 붙잡혀 노망난 늙은이의 노예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맞아. 의식을 잃긴 했지만,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 대해선 안 됐지. 사용인의 잘못이 곧 내 잘못이니까, 정식으로 사과하지. 그리고 다시 한번 고마워.”

오스칼의 표정을 살피던 남자가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그 우아한 몸짓에 조금 기분이 풀어진 오스칼도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저도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들일게요.”

오스칼의 대답에 남자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래도 굳이 해명하자면, 그대의 생각은 지극히 오해야.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거든. 정신을 차린 이후에 내가 그대를 찾으려 얼마나 노력했는데. 시에나의 귀족 가문 전체를 뒤졌다고. 사실 거의 포기 상태였지. 그런데…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정을 설명하고는, 이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오스칼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귀족 가문 전체를 뒤졌지만, 자신을 찾지 못했다니 새로운 정보였다. 오스칼은 내심 빙의한 몸의 영애에게 미안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비록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녀에게도 원래의 삶이 있었을 텐데, 자신이 멋대로 그 삶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애의 가족들은 살롱에 방문했던 딸이 이교도의 폭탄 테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터였다.

“대체 그대는 어느 가문의 영애인가? 그리고 지금 그대의 차림은 또 뭐고?”

남자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이었다.

오스칼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살롱에 함께 있었던 이 남자도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남자의 말에 따르면, 시에나의 귀족 가문 중에서는 이 영애를 찾는 가족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럴 땐 섣불리 대답하기보단 모르쇠가 정답이다.

“그게…… 제가 사실 그날 폭발의 충격으로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그 이후엔 사정이 좀 있어서 당분간 이런 모습으로 지내고 있고요. 달리 절 찾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하니, 부디 제 진짜 모습은 모르는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에서 흥미로운 듯 오스칼을 살폈다. 그리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상실이라…. 그대가 날 모르는 것도 조금 이해가 되는군. 좋아. 그대의 정체를 모른 체해 달라는 말은….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 둘만의 비밀, 뭐 그런 걸 만들자는 건가?”

“둘만의 비밀이요…?”

놀리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오스칼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 짜증 가득한 눈빛에, 남자는 반성한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이 남자도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썩 정상은 아닌 모양이다. 더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는 당신은 여기 어쩐 일인가요? 아니 왜 여기 있는진 중요하지 않고. 그간 절 찾았다면서요? 제가 당신 목숨을 구해 준 보답 때문이라면 지금 깔끔하게 계산하고 서로 갈 길 가시죠.”

오스칼이 간단하게 대화를 정리했다. 여기서 입씨름이나 하며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돈 많은 귀족인 듯한 이 남자에게 사례금이라도 받아서, 보증금을 요구하던 인쇄소를 다시 찾아가 볼 심산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옅은 장난기가 묻은 표정으로 오스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턱을 한번 쓸고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여기 주인이야.”

“네?”

“이 인쇄소, 내 거라고.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남자는 오스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질문에 먼저 대답했다. 싱긋 눈웃음을 지은 그가 말을 이었다.

“마드모아젤 말대로, 물론 내 목숨을 구해준 사례는 해야지. 서로 갈 길 가는 건 일단 생각해 보고.”

이 남자가 인쇄소의 주인이라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기회였다. 오스칼이 눈을 빛냈다.

“그럼 목숨을 구해준 사례를 어떤 거로 받을지는 제가 정해도 되겠죠?”

“좋아,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그대는 어떤 걸 원하시는지? 현금? 보석?”

남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스칼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이 맹랑한 아가씨가 자신을 구해준 대가로 과연 무엇을 요구할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살롱에 드나들던 귀족 영애가 남장을 할 사정이란 당연히 금전적인 문제일 것이었다.

제게 당당하게 보답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니 꽤 배포가 큰 아가씨인 것 같은데, 자신의 몸값을 얼마나 크게 부를지 기대됐다. 이 마드모아젤이 생각하는 내 생명의 가치는 얼마일까?

“이 인쇄소에서 제가 원하는 소설을 아무 조건 없이, 언제든 발간해 주세요.”

남자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의외의 대답에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여기 온 이유가 그거거든요. 정말 대단한 소설이 있는데, 방금 여기서 출간을 거절당했어요.”

오스칼이 뾰로통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마드모아젤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융통성이 없는 건지, 순진한 건지. 호기롭게 사례를 해달라기에 억만금이라도 요구할 줄 알았더니 고작 원한다는 게 소설 발간이라니.

“그쪽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예요. 분명 책이 출간되면 대박이 날 테니까.”

“그러니까 내게 사업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얘기로군. 난 사실 아무나하고 거래하지는 않는데 말야. 이래 봬도 내가 꽤 유능한 사업가거든.”

남자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확답은 하지 않고 능글맞게 웃는 남자의 태도에 오스칼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눈썹을 치켜떴다.

“생명의 은인을 ‘아무나’라고 말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들어 줄 거예요. 말 거예요?”

그때, 어느새 볼일이 끝났는지 저쪽에서 걸어오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오스칼은 급히 남자의 가슴팍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입을 바짝 가져가 소곤거렸다.

“일단, 저기 오는 내 동료에겐 내가 여자라는 걸 절대 들켜선 안 돼요!”

“알았어, 그대의 부탁이라면 들어드려야지 마드모아…. 흐읍!”

오스칼이 허겁지겁 남자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제발 그 마드모아젤이라는 소리부터 좀 그만 해요…!”

제라드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초조함에 오스칼의 귀가 빨개졌다.

혹시라도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마드모아젤이라는 단어를 제라드가 들었을까 두려워 간이 콩알만 해졌다.

그 순간, 크고 단단한 손이 오스칼의 팔목을 붙들었다. 몸이 한번 기우뚱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커다란 어깨 뒤로 밀려났다.

당황한 오스칼이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금발의 남자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대신 넓은 등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주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레, 레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