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 여자는 그가 홀로 시간을 보내는 버드나무 앞에 서 있었다. 어린 클로드는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 유명한 재앙의 상징이구나. 불멸의 삶과 강한 힘을 갖고 싶지 않니? 나와 거래하는 게 어때?”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불멸 같은 거 싫은데요. 전 오히려 죽고 싶어요.”
“정말? 남들은 그걸 갖지 못해서 안달인데. 넌 참 특이한 애구나.”
“왜 그걸 굳이 내게 주려고 하죠?”
앳된 얼굴의 클로드가 경계심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난 네 불길한 머리카락 색이 정말 마음에 들거든. 너에겐 재앙이 될 재능이 있어. 난 혼란을 보는 걸 좋아하니까.”
“됐어요.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으니까.”
클로드는 여자를 향한 수상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그대로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이상한 여자였다.
어린 클로드조차 믿지 않을, 불멸 따위의 이야기를 하다니.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던 여자의 여유로운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여자에게서 한참을 멀어진 클로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아직 그를 바라보며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샤르트르의 불길한 은색. 그것은 클로드 드보이스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었다.
라인하트에서 은색은 영혼의 색, 죽음을 상징했다. 그래서 은발의 아이가 태어나는 일을 불길하게 여겼다. 대개 은발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했다.
500여 년 전, 마음 약한 클로드의 부모가 아들을 차마 해치지 못한 것은 그에게 오히려 비극이었다. 사람들은 그와 말을 섞는 것조차 두려워했고, 재앙의 상징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차라리 그냥 날 죽였더라면 이렇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것이 외톨이인 그가 부모를 원망하는 방법이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여동생 클라우디아뿐이었다. 하지만 신은 그의 안식을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클라우디아가 고작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의 고향 샤르트르에 역병이 돌았다. 역병에 걸린 마을 사람들을 돌보던 클라우디아도 결국 병석에 눕고 말았다.
클로드가 파리한 안색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답답한 듯 화를 냈다.
“정말 바보같이 착해 빠져서는!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네가 가서 도와!”
“콜록,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다니까…….”
“항상 말했잖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클로드의 투덜거림에 힘없이 웃음을 짓던 클라우디아가, 기운 없는 눈망울로 클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오빠의 머리카락 색은 달빛 같아서 예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거울을 볼 때마다 죽음을 본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알아?”
“언젠간 오빠도 그 머리카락 색을 좋아하게 될 거야.”
“재앙의 상징을 좋아할 일이 어디 있겠어?”
자조 섞인 클로드의 목소리에 클라우디아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면 좋을 텐데.
그것은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다. 다음 날 클로드가 집을 비운 사이, 클라우디아는 사라졌다. 동생을 찾아 마을을 헤매던 그의 귀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드보이스 집안의 딸을 제물로 끌고 갔다며?”
“우리 마을에 역병이 도는 건 분명 그 불길한 놈 때문이잖아!”
클로드가 마을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뭐라고요? 제 동생을 어떻게 했다고요?”
“히익! 이놈 재앙의 상징이잖아?”
“역병을 쫓는 의식에 처녀가 필요하다고 해서 네 동생을 바치기로 마을 사람들 전부가 합의했다! 네 놈 업보를 네 놈 동생으로 갚는 게 당연하지!”
마을 사람들이 클로드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클로드는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들었고, 죽도록 얻어맞았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머릿속에 ‘그 여자’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숲에서 만났던 여자.
그는 눈물과 분노로 범벅이 된 얼굴로 숲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에서, 여자를 다시 마주했다.
클로드의 눈이 복수심과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오랜만이네.”
“제게 거래를 하자고 했었죠?”
“불멸의 삶 같은 건 싫다더니, 그새 생각이 바뀌었니?”
여자가 이를 드러내며 요사스럽게 웃었다.
“여전히 싫습니다. 하지만, 내겐 당신이 말했던 강한 힘이 필요하거든요.”
“좋아, 소중한 걸 잃어버린 그 눈빛이 정말 마음에 들어.”
“거래의 대가가 뭐죠?”
“네 심장. 피와 생명을 삼키며 영원히 흑마법의 근원이 될 거야.”
“심장…. 이요?”
심장이라는 말에 클로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자가 쌩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네 심장이 저주에 걸려있는 동안, 넌 불멸의 삶을 살 테니까. 심장이 없으면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거야. 지금처럼 슬픔도, 분노도 없단다. 얼마나 편리하니?”
클로드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잔뜩 힘을 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 뭘 얻죠?”
“즐거움이지. 진짜 재앙이 된 너를 구경하는 게 얼마나 즐겁겠니?”
미소를 지은 여자가 손끝을 그의 가슴에 가져다 대자, 알 수 없는 힘이 클로드를 감쌌다.
“으아아악!”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클로드가 비명을 질렀다. 핏발이 선 그의 눈동자가 붉어지며, 고대어로 된 저주가 버드나무 위에 새겨졌다.
〈저주를 위해 심장을 바친 자는 흑마법을 지배하리라.〉
〈이 땅의 영혼은 저주를 깰 수 없을 것이니, 저주는 영원하리라.〉
어느새 자신이 좋아하던 버드나무가 끔찍한 형상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가슴과 몸에 흐르는 강렬한 힘.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여자를 향했다.
“이제 그럼 난 정말 죽을 수 없는 건가요?”
여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멸을 가졌으면서 죽을 생각부터 하는 거니? 음… 영원을 끝낼 자가 있을까? 좋아, 널 위해 특별히 선물을 줄게.”
〈불멸의 저주를 끝낸 자, 심장의 주인이 되리라.〉
나무구멍 안으로 마지막 저주의 문장이 새겨지는 것을 지켜본 여자가 즐거운 듯 웃음소리를 내며 홀연히 사라졌다.
이윽고 클로드가 마을에 모습을 드러내자, 검은 폭풍이 마을을 삼켰다.
달도 숨어버린 어두운 밤, 붉은 눈동자가 아무것도 살아남은 것이 없는 자신의 고향, 샤르트르를 차갑게 응시했다. 그는 그렇게 재앙의 상징, 불길한 자가 되었다.
***
누군가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것, 그것은 ‘불길한 자’인 클로드에게 주어진 소임과 다름없었다. 클라우디아, 마을 사람들, 계약자들. 그와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영생을 가진 그가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역설인가.
오스칼은 그런 그가 생명을 구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클라우디아와 같은 말을 하는 녀석.
나약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당돌한 녀석.
자신의 저주를 푼 녀석.
처음엔 그냥 독특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클로드는 궁금한 일을 그대로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흥미를 끄는 일일수록 그랬다. 그는 왕국 최고의 정보상이란 명칭에 걸맞게 오스칼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수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오스칼에 대해 알아내면 알아낼수록 궁금증만 커지는 기묘한 증상을 앓고 있었다.
클로드는 인신매매단의 건물 외벽이 무너질 때까지, 멀리서 오스칼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의 생사는 그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스칼이 궁금했다. 오스칼에 대한 궁금증이 자신의 신경을 긁었다.
“아직 저 녀석이 좋아하는 색깔이 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클로드가 양피지를 와작- 손에서 구겼다. 그의 뒤에는 오스칼에 대한 정보를 빼곡히 적은 양피지 한 무더기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그 녀석이 잘못되면 잔뜩 쌓여 있는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다.
“정말 신경 쓰여.”
결국, 그는 나지막한 불평과 함께 무너지는 건물에서 오스칼을 구해냈다.
그리고 지금, 클로드와 오스칼은 샤무아의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파에 앉아 있는 이는 클로드였고, 오스칼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클로드는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오스칼의 존재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변태 같은 놈아! 아까 너 의리 있다고 한 말은 취소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제 몸에 바짝 밀착된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몇 대 후려치고 나서야, 비로소 오스칼은 클로드의 품에서 벗어났다.
“뭐 하는 짓이긴, 내가 당신을 구한 거지.”
클로드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변태 같은 놈’이라니. ‘재앙의 상징’에 비하면 얼마나 귀여운 단어인가.
“구할 거면 그 자리에 얌전히 내려놓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날 데려와?”
오스칼은 클로드에게서 멀리 떨어져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문득, 그의 발치에 고인 붉은 피가 눈에 들어왔다. 오스칼이 클로드의 손아래로 떨어지는 핏방울에 와락 소리를 질렀다.
“으악! 지금 당신 손에 피…!”
여전히 단검을 말아 쥐고 있는 클로드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오스칼이 허둥지둥 다시 그에게로 다가가 단검을 빼앗아 들었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지금 이렇게 피가 철철 나는데? 이건 대체 왜 쥐고 있었던 거야?”
“내가 쥐고 있지 않았으면 당신이 쥐었을 거 아냐.”
“뭐?”
“추락하기 직전까지 꽉 붙들고 있길래 당신한테 소중한 건가 했지. 하지만 칼날이 좀 위험해 보여서.”
“칼날은 당신에게도 똑같이 위험하잖아!”
오스칼이 이젠 역정을 내다시피 투덜거렸다. 클로드는 골을 내는 오스칼의 목소리에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의아한 듯 오스칼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다친 건 나인데 왜 당신이 화를 내?”
“왜냐니! 사람이 다쳤는데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여기 치료 도구 같은 거 없어?”
오스칼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방안을 살폈다. 클로드가 그 모습을 선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걱정이라. 분명 그런 감정이 있었던 것 같긴 하군.”
그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게다가,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준 기억은 일찍부터 없었다.
“걱정이 걱정이지 뭘 그 단어를 곱씹기까지 해? 하여간 당신,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언어 구사에 문제 있어.”
오스칼이 투덜대며 찬장 한편에서 구급상자를 찾아 들고 왔다. 이곳에 구급상자 같은 것이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 밖에 있을 건 다 있는 모양이었다. 오스칼의 손에 들린 상자를 바라본 클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설마 거기 있는 잡동사니들로 내 손에 뭔갈 하겠다는 건가?”
“당연하지, 손 이리 내봐.”
그가 경멸스러운 눈으로 붕대와 약 따위를 바라보았다.
“난 그딴 거에 의존할 만큼 약하지 않아.”
“혹시 네 흑마법으로 상처도 치료되고 그래?”
오스칼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했다. 분명〈여스칼〉에 그런 설정은 없었는데.
“당신은 흑마법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군? 흑마법은 치유계열의 힘이 아냐. 바보 같긴.”
“그럼 잔말 말고 손 이리 내. 그 단검 돌벽에 박혀 있던 거라 잘못하면 너 파상풍 걸려.”
“파상…. 뭐…?”
바보 같은 건 자신이었다. 오스칼의 유도신문에 넘어간 그는 상처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오스칼은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클로드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손을 숨기려는 그의 팔목을 확 잡아끌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소독약을 상처에 쏟아부었다.
콸콸-
“윽.”
베인 상처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감각에 클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도 좀 참아.”
“그냥 두는 게 덜 아플 거 같다. 방금까지 하나도 안 아팠다고.”
“안 아프긴 뭐가 안 아파. 상처가 꽤 깊은데.”
클로드의 눈이 아래로 처지며,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오스칼은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거즈로 손의 상처를 닦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클로드가 콧잔등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어쨌든 당신한테 소중한 걸 잃어버리진 않았잖아.”
“그게 그렇게 소중한 것도 아니거니와, 설령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면서까지 지켜야 할 소중한 건 없어.”
오스칼이 딱 잘라 대꾸했다. 클로드가 실눈을 뜨고 오스칼이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상처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지금껏 상처나 피 같은 것에 무감각하게 살았었는데. 어느새 찌르르 느껴지는 통증에 그가 눈을 찡그렸다.
“당신이 나를 걱정한다고 하니까, 좀 아픈 것 같아.”
“별소릴 다 듣겠네.”
오스칼이 툴툴거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클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왜 거기 있었던 거야? 설마… 당신이 인신매매의 배후는 아니지?”
오스칼의 물음에 클로드의 얼굴이 굳었다.